<colbgcolor=#000><colcolor=#fff> '''''' | ||||
출생 | 1675년 | |||
사망 | 1716년 6월 7일 (향년 41세) | |||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 ||||
재위기간 | 왈라키아 보이보드 | |||
1714년 4월 5일 ~ 1716년 1월 6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콘스탄틴 칸타쿠지노 어머니: 미상 | ||
배우자 | 파우나 | |||
자녀 | 라두, 콘스탄틴 | |||
가문 | 칸타쿠지노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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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왈라키아 공국 68대 보이보드.2. 생애
조부 콘스탄틴 칸타쿠지노는 왈라키아 공국의 고위 관리인 포스텔닉을 역임했으며, 아버지 콘스탄틴 칸타쿠지노는 왈라키아의 저명한 인문주의 학자로서 명성을 떨쳤으며, 정치에서도 왕성하게 활약했다. 또한 그는 왈라키아 제66대 보이보드 셰르반 칸타쿠지노, 미하이 미하이 칸타쿠지노, 제67대 보이보드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의 부인인 스탄카의 조카였다. 아버지 콘스탄틴은 동생 미하이와 함께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를 보이보드로 옹립하는 대신, 차기 보이보드로는 자기 아들 슈테판을 옹립하길 바랐다. 그러나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가 자기 아들을 차기 보이보드로 세우려 하면서, 양자간의 갈등은 고조되었다.1707년 6월, 미하이 칸타쿠지노가 그랜드백 직위에서 해임되었고, 외교 임무를 수행하던 대사 콘스탄틴 칸타쿠지노가 코스탄티니예에서 소환되었다.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가 자기 외삼촌 2명을 경질한 건 그해 4월 프란시스 라코치를 러시아 주재 대사로 삼으려 했는데 두 사람이 이를 무시하고 데이비드 코베아를 대사로 삼았고, 이후 코베아는 칸타쿠지노 인사들에게만 편지를 쓰는 모습을 보인 데서 비롯되었다. 이에 루스 차르국이 개입해 자기들과 우호관계를 맺고 있는 미하이 칸타쿠지노를 복직시키라고 요구하자, 콘스탄틴은 두 삼촌은 여전히 국정을 수행하고 있다며 듣지 않았다. 그해 7월, 표트르 1세가 콘스탄틴에게 서신을 보내 미하이 칸타쿠지노를 복권시켜달라고 청했지만, 콘스탄틴은 정중하게 거절했다.이후 콘스탄틴과 그의 두 삼촌간의 관계는 매우 나빠졌다. 미하이는 표트르 1세에게 망명을 요청했고, 콘스탄틴 칸타쿠지노는 영지로 물러났다.
1714년 3월, 아버지 콘스탄틴 칸타쿠지노 등이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가 루스 차르국 차르 표트르 1세와 비밀 협약을 맺어 오스만 제국을 배신하려 했다고 고발했다. 이에 오스만 파디샤 아흐메트 3세가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를 폐위하고 코스탄티니예로 소환했다. 그 후 슈테판이 4월 5일에 수태고지 성당에서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선출되었다. 슈테판은 콘스탄틴 브랑코비아누가 합스부르크 제국과 주고받은 서신을 전부 오스만 궁정에 넘겨서, 콘스탄틴과 네 아들이 처형되도록 유도했다. 1714년 4월 23일 또는 5월 4일에 콘스탄틴 슈티르베이와 라두 두데스쿠를 코스탄티니예에 특사로 보낸 후 파디샤로부터 왈라키아의 주권자로 인정받았다.
슈테판이 집권했을 무렵, 오스만 제국은 사부아 공자 외젠이 이끄는 합스부르크 제국군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슈테판은 합스부르크 제국 편에 서기로 마음먹고 오스만 제국의 전쟁 준비 상태 등 여러 정보를 트란실바니아에 주둔한 합스부르크 제국군 사령관 에티엔 드 스테인빌을 통해 외젠에게 전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첩자들을 통해 슈테판의 행동을 고스란히 밝혀냈다.
1716년 1월 6일, 카푸쿠[1]의 성토를 받고 부쿠레슈티에서 체포된 뒤 아버지, 아내, 두 아들과 함께 코스탄티니예로 끌려갔다. 그 후 1716년 6월 7일 코스탄티니예에서 아버지와 함께 처형되었다. 두 사람의 시체는 바다에 던져졌고, 머리는 면화로 채워진 뒤 에디르네로 전해졌다. 여기에 왈라키아 대장 미하이 칸타쿠지노와 라두 두데스쿠도 긴급 체포된 뒤 에디르네로 끌려가 교살되었다. 이후 니콜라에 마브로코르다트가 왈라키아 최초의 파나리오테스 출신 보이보드로 등극했다.
3. 가족
- 파우나(? ~ 1740): 안드로닉 그레시아누의 딸. 두 아들과 함께 코스탄티니예에서 탈출한 뒤 유럽 각지를 전전하다가 트란실바니아의 레시아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홀로 사망했다.
- 라두 칸타쿠지노(1699 ~ 1761): 아버지가 처형된 뒤 네덜란드 대사의 아내의 도움을 받아 코스탄티니예에서 어머니, 동생과 함께 탈출한 뒤 로마로 망명했다. 이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의 도움을 받아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등극하길 희망해, 사부아 공자 외젠의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동행했으며, 1736년 일리리아 후사르 연대 지휘관에 선임된 뒤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끝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폴란드의 카메니차에서 사망했다.
- 콘스탄틴 칸타쿠지노: 어머니, 형과 함께 망명한 것 외에는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