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 | |||
출생 | 미상 | ||
사망 | 1383년 (향년 ?세) | ||
왈라키아 공국 쿠르테아 데 아르게슈 | |||
재위기간 | 왈라키아 보이보드 | ||
1377년 ~ 1383년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니콜라에 알렉산드루 어머니: 클라라 도보카이 | |
형제 | 블라디슬라프 1세, 엘리자베타, 안카, 안나 | ||
배우자 | 안나, 칼리니키아 | ||
자녀 | 단 1세, 미르체아 1세 | ||
가문 | 바사라브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clearfix]
1. 개요
왈라키아 공국 제4대 보이보드.2. 생애
왈라키아 공국 제2대 보이보드 니콜라에 알렉산드루와 클라라 도보카이의 아들이다. 친형제로 안카[2], 안나[3], 이복형제로 블라디슬라프 1세, 엘리자베타[4]가 있었다. 1377년 형이 사망한 후 왈라키아 공국 제4대 보이보드가 되었다.베네치아 공화국 측 기록에 따르면, 왈라키아 공국은 1377년에 전신 갑옷을 대량으로 주문했다고 한다. 그 후 라두 1세는 불가리아 제2제국 차르 이반 시슈만, 오스만 술탄국의 무라트 1세와 동맹을 맺고 헝가리에 대항했다. 이에 헝가리 국왕 러요시 1세는 왈라키아로 군대를 파견해 왈라키아-불가리아 연합군을 격파하고 세베린 바나트를 공략했다. 그러나 왈라키아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에르데이로 쳐들어가 약탈을 자행했고, 이들과 함께 하던 튀르크군은 바나트를 철저히 약탈했다.
1377년 11월 19일, 러요시 1세는 브라쇼브에서 온 트란실바니아의 작센 상인들에게 왈라키아가 자신의 소유가 되면 세금을 감면해주겠다고 약속했다. 1382년, 러요시 1세는 오르소바의 지주들에게 내린 칙령에서 외국 상인이 상품을 가지고 왈라키아에 들어가는 걸 금지하고 밤낮으로 국경을 지키며 모든 일을 자기에게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여기서 세베린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오르소바가 왈라키아-헝가리 국경 요충지로 거론되는데, 학자들은 이에 대해 세베린은 왈라키아에 완전히 넘어갔고, 오르소바 역시 상당수가 라두 1세에 의해 합병되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라두 1세는 1380년대에 성 필로프테아의 유해를 타르노보에서 쿠르테아 데 아르게슈로 옮기고 그곳의 왕립 교회에 이를 기념하는 벽화를 그리도록 했다. 또한 그는 치세 내내 많은 교회를 건설했는데, 티스마나, 코지아, 코트메아나에 정교회 성당을 건설했고, 세베린(1380년경), 아르게슈(1381년)에 2개의 가톨릭 성당을 건설했으며, 타르고비스테에 가톨릭 수도원을 세웠다. 라두 1세가 언제 사망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학자들은 1383년일 거라고 추정한다. 사후 장남 단 1세가 보이보드에 선임되었지만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고, 차남 미르체아 1세가 그 뒤를 이었다.
3. 가족
- 안나: 쿠르테아 데 아르게슈 대성당에 그려진 벽화에 언급되었지만, 정확한 기원 및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 단 1세(1354 ~ 1386): 왈라키아 제5대 보이보드. 다니슈티 왕조의 시조.
- 칼리니키아(? ~ 1439): 그리스 출신이라고 전해진다.
- 미르체아 1세(1355 ~ 1418): 왈라키아 제 6대 보이보드. 드라쿨레슈티 왕조의 시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