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 | |||
출생 | 미상 | ||
사망 | 1431년 6월 1일 (향년 ?세) | ||
재위기간 | 왈라키아 보이보드 (1기) | ||
1420년 8월 ~ 1421년 5월 | |||
왈라키아 보이보드 (2기) | |||
1421년 11월 ~ 1423년 여름 | |||
왈라키아 보이보드 (3기) | |||
1423년 여름 ~ 1424년 12월 | |||
왈라키아 보이보드 (4기) | |||
1426년 5월 ~ 1427년 11월 | |||
왈라키아 보이보드 (5기) | |||
1427년 봄 ~ 1431년 6월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단 1세 어머니: 마리아 | |
자녀 | 바사라브 2세, 블라디슬라프 2세, 단 3세 | ||
가문 | 다니슈티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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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왈라키아 공국 제9대 보이보드. 별칭은 비테아줄(Viteaz: 용감한 자)2. 생애
왈라키아 공국 제5대 보이보드 단 1세와 세르비아 출신으로 전해지는 마리아의 아들이다.[1] 1386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보이보드에 선임된 미르체아 1세에게 충성했으며, 1411년 오스만 제국이 내전에 휘말렸을 때 미르체아 1세의 지시에 따라 무사 첼레비가 아드리아노폴리스를 공략하는 걸 지원하는 왈라키아 파견대를 이끌었다. 1418년 미르체아 1세가 죽고 그의 아들인 미하이 1세가 보이보드가 된 뒤에도 잠자코 지냈다.1419년 오스만 제국군이 왈라키아를 쳐들어가 미하이 1세를 압박한 끝에 3년간 바치지 않던 공물을 한꺼번에 바치고, 다뉴브 강변에 있는 지우르지우 및 여러 요새를 양도하는 협약을 받아냈다. 이에 알불(Albul)과 우트메스(Utmeș) 등 왈라키아 보야르들은 단 2세를 보이보드로 옹립했고, 단 2세는 미하이 1세와 내전을 치렀다. 미하이 1세는 처음엔 그를 격퇴했지만, 미하이 1세가 협약을 얼른 집행하지 않는 것에 반감을 품은 오스만 제국군이 쳐들어오면서 전세가 불리해졌다. 1420년 여름, 헝가리 왕국과 손잡은 미하이 1세가 오스만 제국군과 맞붙었으나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미하이 1세 사후, 단 2세가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1421년 5월, 미하이 1세의 이복형제인 라두 2세가 반기를 들어 단 2세를 축출했다. 단 2세는 추종자들을 끌어모은 뒤 반격을 가해 그해 11월 라두 2세를 축출했다. 라두 2세는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한 뒤 오스만 제국 술탄 무라트 2세의 지원을 받는 대가로 왈라키아가 오스만 제국의 확실한 속국이 되고 다뉴브 강 남쪽의 도브로게아를 오스만 제국에게 내주는 걸 받아들이겠다고 서약했다. 1423년 여름, 라두 2세가 오스만 제국군의 지원에 힘입어 단 2세를 몰아내고 보이보드로 선임되었다. 하지만 단 2세는 군대를 끌어모아 반격을 가해 오스만 제국군을 격파하고 라두 2세를 도로 몰아냈다.
1424년 12월, 라두 2세는 3번째로 오스만 제국군의 지원을 받아 단 2세를 밀어내고 권좌를 되찾았으며, 사전에 약속한 대로 도브로게아를 오스만 제국의 소유물로 인정했다. 이에 단 2세는 헝가리 왕국의 지원을 받아 반격을 가해 1426년 5월 라두 2세를 몰아내고 보이보드에 복위했다. 오스만 제국은 단 2세를 몰아내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지만, 단 2세는 많은 수의 불가리아 군인을 용병으로 고용해 오스만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1427년 1월 라두 2세가 재차 오스만군의 지원을 받고 쳐들어오자 물러났다.
1427년 봄, 단 2세는 헝가리군과 왈라키아 추종자들의 지원에 힘입어 라두 2세를 다시 몰아내고 오스만 제국군을 격파했으며, 지우르지우 요새를 탈환했다. 이후 라두 2세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데, 일부 학자들은 라두 2세가 단 2세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을 거라고 추정하나 불확실하다. 1428년, 단 2세는 기병 6,000명을 이끌고 지기스문트의 헝가리군과 함께 세르비아의 골루바슈에 있는 오스만 요새 공방전에 참여했다. 그러나 공방전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퇴각하던 중 오스만군에 생포되었다. 이후 오스만 제국과 협상한 끝에 그들을 주권자로 받들고 공물을 납부하며, 더 이상 헝가리 왕국을 돕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이로 인해 단 2세와 지기스문트간의 관계가 냉각되었다.
1431년 6월, 오스만 제국군이 왈라키아를 침공했다. 단 2세는 이번엔 헝가리 왕국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단독으로 맞섰지만 끝내 전사했다. 그 후 오스만 제국은 미르체아 1세의 또다른 사생아인 알렉산드루 1세 알데아를 왈라키아의 새 보이보드로 옹립했다.
3. 가족
- 자녀
- 바사라브 2세(? ~ 1443년 이후):왈라키아 제14대 보이보드(1442년 6월 ~ 1443년 3월).
- 블라디슬라프 2세(? ~ 1456): 왈라키아 제15대 보이보드(1447년 12월 ~ 1448년 10월 / 1448년 12월 ~ 1456년 8월 20일)
- 단 3세(? ~ 1460): 보이보드가 되기 위해 브라쇼브와 사라 바르세의 작센인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블라드 3세에 맞서 싸웠지만 1460년 4월 루차르 전투에서 블라드 3세에게 생포된 뒤 자기 무덤을 파도록 강요받은 후 참수형에 처해졌으며, 그의 추종자들은 꼬챙이에 산 채로 꿰뚫리는 형벌을 받았다.
- 바사라브 3세(? ~ 1480): 왈라키아 제18대 보이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