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 | ||||
출생 | 1760년 | |||
오스만 제국 코스탄티니예 | ||||
사망 | 1799년 2월 11일(향년 39세) | |||
왈라키아 공국 부쿠레슈티 | ||||
재위기간 | 왈라키아 보이보드 | |||
1797년 11월 ~ 1799년 2월 11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게오르게 한제를리 어머니: 스마라그다 | ||
형제 | 알렉산드루 한제를리 | |||
배우자 | 룩산드라 기카 | |||
자녀 | 미하일, 마리아, 엘레나 | |||
가문 | 한제를리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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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왈라키아 공국 86대 보이보드.2. 생애
1760년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에서 게오르게 한제를리와 스마라그다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알렉산드루 한제를리가 있었다. 한제를리 가문은 팔레올로고스 가문의 후손을 자처했으며, 조상이 오스만 제국 파디샤 메흐메트 4세의 중병을 치료한 뒤 이 이름을 부여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함대의 드라고만(Dragoman: 유럽 등 타국 사절단의 통역자, 번역가, 공식 가이드)으로 재직한 뒤 1797년 11월 알렉산드루 입실란티를 대신해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부임했다. 일각에서는 덜 알려졌던 그가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옹립될 수있었던 것은 그와 함께 오스만 함대에 근무했던 동료이자 카푸단 파샤를 역임한 후세인 퀴퀵이 강력히 추천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1798년 1월 4일 부쿠레슈티에 도착한 뒤, '칼리아 셰르반 보다(Calea Şerban Vodă)' 문을 통해 입성하는 관례를 깨고 모고소아이아 다리를 통해 입성했다. 이에 주민들은 이를 나쁜 징조이자 현명하지 못한 통치의 신호로 간주했다고 한다. 그는 공식 취임식을 위해 바카레슈티 수도원에 들어갔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성 사바 수도원으로 이동하기 전에 한 달 넘게 그곳에 머물렀고, 성 사바 수도원에서 쿠르테아 누아 궁전이 완전히 복원될 때까지 머물렀다.
그는 대규모 세금 인상을 도입했고, 과부 세금을 포함한 새로운 세금을 고안했다. 이는 루멜리아에서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반기를 든 비딘 파샤 오스만 파즈반토글루를 진압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후세인 퀴퀵에게 군자금을 보내주면서도 자기 수입도 늘리기 위한 조치였다. 급기야 전임 보이보드 콘스탄틴 마브로코르다트가 영구적으로 폐지했던 소에 관한 세금이 다시 도입되자, 루마니아 정교회의 강력한 반대를 불러 일으켰다. 보야르 역시 법령 서명을 거부했다. 이에 콘스탄틴은 보야르 4명에게 뇌물을 줘서 서명하도록 했고, 반란을 막기 위해 모든 보야르에게 매겨진 세금을 면제했다.
1798년 겨울, 주민들이 가지고 있던 가축을 숨겨가며 세금을 내지 않으려 하자, 콘스탄틴은 부하들을 왈라키아 각지로 파견해 주민들을 협박하고 고문해 세금을 받아내게 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거나 정신 이상에 걸렸고, 많은 마을이 약탈당했다. 후대의 루마니아 연대기 작가들은 1798년 겨울을 "한제를리의 겨울"로 일컬으며 이때의 수탈이 왈라키아 농민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안겼다고 밝혔다.
한편, 후세인 퀴퀵은 오스만 파즈반토글루의 반란군을 상대로 연전연패했다. 이에 후세인은 패전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콘스탄틴이 자기한테 충분한 자금을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1799년 2월 11일, 오스만 파디샤 셀림 3세는 콘스탄틴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카푸쿠( kapucu, 오스만 제국 궁정에서 속국 군주들에게 보내는 사절)가 사형집행인과 함께 부쿠레슈티로 파견되었다.
그들은 평범한 임무를 가지고 찾아온 척하면서 궁정에 도착한 뒤, 자기들을 맞이하러 온 콘스탄틴에게 파디샤의 칙령을 보여줬다. 그가 그걸 다 읽고 경비병을 급히 부르려 하자, 카푸쿠는 즉시 달려들어 그의 목을 졸랐고, 다른 한 명이 가슴에 두 번 총을 쏴서 완전히 제압했다. 경비병들이 총소리를 듣고 급히 달려오자, 카푸쿠는 파디샤의 칙령을 보여줘서 더 이상 개입하지 못하게 했다. 카푸쿠는 그의 수급을 벤 뒤 모두에게 이를 두루 보여줬다. 이후 콘스탄틴의 수급은 코스탄티니예의 세라이 문에 박혔고, 목이 잘린 시신은 부쿠레슈티의 성 스피리돈 노우 교회에 안장되었다.
3. 가족
- 룩산드라 기카: 왈라키아 공국 78대 보이보드 알렉산드루 스카를라트 기카의 딸.
- 미하일(? ~ 1821): 함대 드라고만.
- 마리아(1779 ~ 1871): 왈라키아 보이보드 그리고레 4세 기카의 부인, 몰다비아 왈라키아 연합공국 총리 디미트리 기카의 어머니.
- 엘레나(? ~ 1883): 파블로스 네그레폰티스의 부인. 외손자 파블로스 쿤투리오티스는 그리스 제2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