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 | ||||
출생 | 미상 | |||
사망 | 1559년 9월 21일 (향년 ?세) | |||
재위기간 |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 | |||
<colbgcolor=#f5f5f5,#2d2f34> 1차 | 1545년 1월 ~ 1552년 11월 16일 | |||
2차 | 1553년 5월 ~ 1554년 2월 28일 | |||
3차 | 1558년 1월 ~ 1559년 9월 21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라두 4세 어머니: 미상 | ||
배우자 | 치아나 | |||
자녀 | 스탄카, 페트루 1세, 라두, 미르체아, 안카, 마리나, 도브라 | |||
가문 | 드라쿨레슈티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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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왈라키아 공국 제38대 보이보드.2. 생애
라두 4세의 아들이자 라두 7세의 동생으로 전해지는 인물이다.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오르기 전에 코스탄티니예에서 양을 구매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목동(Ciobanul)'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545년 1월, 오스만 제국 파디샤 쉴레이만 1세가 라두 7세를 폐위해 이집트로 유배보낸 뒤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고, 3월 17일 부쿠레슈티에 입성했다.연대기에 따르면, 미르체아 5세는 부쿠레슈티 입성 2주 후 코아다 보르니쿨, 라둘 코미술, 드라굴 스톨니쿨, 스트로 스파타룰루, 빈틸라 코미술을 비롯한 여러 보야르를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또한 연대기에는 보야르들이 돈과 보석을 어디에 숨겼는지 밝히기 위해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그 후 살해된 보야르들의 친척들이 트란실바니아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연합해 그를 왕좌에서 전복하려고 시도했다. 1545년 8월 24일, 한 보야르가 이끄는 군대가 오라라키아로 진입했다가 페리슈에서 미르체아 5세의 기습 공격을 받고 궤멸되었다.
1548년 초, 스토이카 스톨니쿨, 빈틸라 보르니쿨, 라두 마렐레 로고팻, 파르부 포스트텔니쿨 등 미르체아 5세의 의심을 받은 보야르들이 해외로 추가로 피신해 기존에 피신한 보야르들과 합세했다. 그해 말 보야르들이 1,000명의 용병과 함께 왈라키아에 진군하면서 백성들이 호응하기를 기대했지만, 백성들은 미르체아 5세를 굳건히 지지했다. 이후 벌어진 발체아의 밀로스테아 전투에서, 미르체아 5세는 다시 승리했고 간신히 목숨을 건진 보야르들은 사방으로 탈출했다.
1552년, 합스부르크 제국은 트란실바니아를 공략한 뒤 왈라키아에 자신들의 대의에 헌신하는 통치자를 세우기로 했다. 합스부르크 제국 장성 조반니 바티스타 카스텔도는 라두 5세의 아들이며 망명중인 보야르들의 지지를 받는 라두 8세를 옹립하기로 했다. 1552년 11월, 카스텔도는 15,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왈라키아로 진군했다. 미르체아 5세는 8,000 ~ 9,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에 맞섰는데, 전투가 벌어지기 이틀 전에 배신이 두려워 보야르 47명을 식사하던 중에 체포해 처형했다고 하다. 1552년 11월 16일 매네슈티 전투에서 카스텔도가 승리했고, 미르체아 5세는 지우르지우로 피신했다.
1553년 5월 11일 몰다비아 공국의 통치자 알렉산드루 4세의 지원을 받은 미르체아 5세가 라두 8세를 밀어내고 보이보드에 복위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루 4세는 곧 그와 마찰을 벌였고, 1554년 2월 28일에 군대를 보내 그를 축출한 뒤 라두 7세의 아들인 파트라스쿠 첼 분을 새 보이보드로 세웠다. 미르체아 5세는 코스탄티니예로 망명했다. 1558년 1월 파트리스쿠가 사망한 후, 쉴레이만 1세는 미르체아 5세를 다시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선임했다.
이에 많은 보야르가 카르파티아 지역으로 도망치자, 미르체아 5세는 그들이 돌아와서 자신에게 충성을 서약하면 용서해주겠다고 했다. 이에 보야르들이 돌아왔고, 오스만 제국 고위 인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쿠레슈티에서 보이보드와 보야르들의 화해 의식이 거행되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 인사들이 떠난 후, 미르체아 5세는 여러 보야르를 처형했고 1558년 2월 3일에는 성직자들도 처형되었다. 1559년 9월 25일에 사망했고, 부쿠레슈티의 쿠르테아 베체 교회에 안장되었다. 사후 아들 페트루 1세가 뒤이어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3. 가족
- 치아나(1525 ~ 1588): 몰다비아 보이보드 페트루 5세 라레슈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