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 | ||||
본명 | 바사라브 4세 라이오타 Basarab IV | |||
이명 | 셀 타나르(cel Tânăr)[1] | |||
출생 | 1443년 이전 | |||
사망 | 1482년 3월 23일 (향년 ?세) | |||
재위기간 |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 | |||
<colbgcolor=#f5f5f5,#2d2f34> 1차 | 1477년 11월 ~ 1481년 9월 | |||
2차 | 1481년 11월 ~ 1482년 3월 23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바사라브 2세 어머니: 미상 | ||
자녀 | 네아고에 바사라브? | |||
가문 | 다니슈티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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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왈라키아 공국 제19대 보이보드.2. 생애
왈라키아 공국 제14대 보이보드 바사라브 2세의 아들로, 1474년 트란실바니아 공 바토리 이슈트반에 의해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추대되어 당시 왈라키아 보이보드를 맡았던 사촌 바사라브 3세와 대결했다. 트란실바니아군은 바사라브 3세와 2차례 맞붙었는데, 처음에는 패배했지만 두 번째 전투에서는 격파했다. 그러나 1474년 10월 20일, 오스만 제국군의 지원을 받은 라두 3세가 바사라브 3세와 바사라브 4세를 몰아내고 보이보드에 복위했다. 그 후 바사라브 4세는 헝가리로 피신했고, 1476년 여름 블라드 3세와 함께 트란실바니아로 파견되었다.1477년 11월, 몰다비아 공 슈테판 3세가 바사라브 3세를 축출하고 바사라브 4세를 왈라키아의 새 보이보드로 세웠다. 1479년, 오스만 제국 파디샤 메흐메트 2세의 지시를 받은 알리 코차 베이가 트란실바니아 원정에 착수했다. 그는 메흐메트 2세의 지령에 따라 5,000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그러나 그들의 군대는 1479년 10월 13일 헝가리 왕국과 바사라브 3세가 이끄는 연합군에게 오라슈티에 전투에서 격파되었다. 1481년 메흐메트 2세가 사망한 뒤, 두 아들 바예지트 2세와 젬 술탄이 파디샤 자리를 놓고 내전을 벌였다. 이로 인해 바사라브 4세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지원이 끊어지자, 슈테판 3세는 이 때를 틈타 그해 6월 왈라키아를 침공하여 람니쿠 발체아에서 바사라브 4세를 격파했다. 바사라브 4세는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했고, 블라드 4세가 슈테판 3세에 의해 왈라키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1481년 11월, 바사라브 4세는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토대로 블라드 4세를 축출하고 보이보드에 복위했다. 그러나 1482년 3월 23일 고르지 글로고바에서 사망했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왈라키아 보야르들이 일으킨 음모에 휘말려 살해되었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슈테판 3세가 블라드 4세를 복위하기 위해 침공하자 이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고 한다.
1512년에서 1521년까지 왈라키아 보이보드를 역임한 네아고에 바사라브는 자기 어머니 네아가가 바사라브 4세와 불륜을 맺고 자신을 낳았다고 주장했지만, 진위는 불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