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 | ||||
출생 | 1780년 | |||
왈라키아 공국 올테니아 주 블라디미르 | ||||
사망 | 1821년 5월 27일 또는 5월 28일(향년 41세) | |||
왈라키아 공국 트르고비슈테 | ||||
재위기간 | 왈라키아 보이보드 | |||
1821년 2월 15일 ~ 6월 7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콘스탄틴 어머니: 이오안나 | ||
형제 | 파파, 콘스탄티나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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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왈라키아 공국 제90대 보이보드. 왈라키아 공국 역사상 유일한 비귀족 출신 보이보드로, 오스만 제국의 지배로부터 왈라키아의 독립을 꾀했으나 끝내 실패해 살해되었다. 오늘날 루마니아인들에게 민족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2. 생애
1780년경 왈라키아 공국 올테니아 주의 블라디미르에서 출생했다. 블라디미레스쿠(Vladimirescu)는 블라디미르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아버지 콘스탄틴과 어머니 이오안나 모두 블라디미르에서 대대로 농사를 짓고 사는 마질리(mazili: 토지 지주)였다. 형제로 파파, 콘스탄티나가 있었다. 12살 때 크라이오바로 가서 그곳의 보야르인 이오안 글로그코비아누를 섬겼고, 수사학, 문법, 그리스어를 익혔다. 이후 보야르 재산 관리인으로 발탁되었고, 1806년 클로사니에에서 바타프(vătaf, 지역 민병대 대장)으로 선임되었다.1806년 제9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발발했을 때 러시아군에 입대해 왈라키아 자원부대로 구성된 판두르 군단에 배속되었다. 이들은 러시아로 망명한 전임 왈라키아 보이보드 콘스탄틴 입실란티의 지휘하에 활약했다. 투도르는 전장에서 탁월한 용맹을 보여줬고, 성 블라디미르 황실 기사단 3급 훈장을 러시아 군부로부터 수여받았다. 이후 중위로 승진했고, 판두르 군단 분견대의 지휘를 독자적으로 수행했다. 1812년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이 평화 협약을 맺은 뒤, 판두르 군단에 가담했던 왈라키아인들은 오스만 제국 정부의 박해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러시아 제국이 부여한 면책 특권이 있었고,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 제국이 신변을 보호해주는 그를 감히 건드리지 못했다.
1814년 6월 14일 빈으로 가서 12월 26일까지 여행했다. 당시 빈에서는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파괴된 유럽 질서를 복원하고 유럽 국가들을 위한 새로운 국경을 정의하기 위한 빈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는 빈 회의를 지켜보면서 프랑스 혁명 사상을 접했으며, 그리스인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걸 목표로 삼은 비밀 단체인 필리키 에테리아(Φιλική Εταιρεια: 친구 협회) 인사들과 접촉했다. 특히 그와 함께 러시아군에 복무하면서 친분을 맺었던 게오르가키스 올림피오스(Γεωργάκης Ολύμπιος, 1772 ~ 1821)가 적극적으로 설득했고, 그는 이들과 뜻을 함께 하기로 했다.
1815년 초 왈라키아에 돌아간 그는 메헤딘치와 고르즈 카운티를 배회하던 아다칼레의 오스만 수비대가 세르네치에 있던 자신의 가족을 학살하고 식량을 약탈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에 반드시 오스만 제국에게 복수하겠다고 마음먹은 그는 오스만 제국이 선임한 그리스계 관리가 다뉴브 공국(왈라키아와 몰다비아)를 통치하는 파나리오테스 체제를 타도하고 국민을 무장시켜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운다는 계획을 동지들과 함께 수립했다. 이후 왈라키아 정부 하급 관리로 일하면서 입지를 다지던 그는 1821년 1월 23일 파데슈 선언문에 서명하고 왈라키아 전역에 배포했다. 그는 이 선언문에서 보야르와 수도원의 토지를 농민에게 분할하고, 보야르들의 특권을 폐지하며, 오스만 제국의 압제로부터 독립하여 정의와 자유를 실현하자고 호소했다.
왈라키아 국민 형제들이여, 여러분은 어떤 사촌이 되겠습니까? 인간이 악에 맞서 싸우는 것을 막는 규칙은 없습니다! 뱀이 눈앞에 나타나면 뱀에게 물려 생명이 위험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곤봉을 사용하여 때립니다. 그러나 우리를 산채로 삼키는 용, 즉 교회와 정치의 지도자들이 우리에게서 피를 빨아먹도록 허용하는 이때, 언제까지 그들의 종이 되겠습니까? 형제들이여, 우리 모두는 악한 자를 악으로 쳐서 우리에게 유익이 되도록 합시다!
우리의 전능하신 왕이신 하느님은 그분을 믿는 신자인 우리가 잘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지도자들이 우리 머리에 악을 씌우는 짓을 허용하지 마십시오! (중략) 우리 지도자들이 선할 수 있는 사람들을 선택하게 하십시오. 그들은 우리의 것이며 약속된 대로 우리와 함께 선을 이룰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게으르지 말고 힘써 서둘러 오십시오. 무기가 있는 사람은 무기가 있고, 무기가 없는 사람은 쇠 갈래와 창을 가지고 있습니다. 온 나라의 이익과 이익을 위하여 모임이 있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곳으로 서둘러 오십시오.
그리고 그 큰 의회들은 당신들에게 무엇을 따르도록 지시할 것이며, 그들은 당신들을 어디로 부르게 될 것입니까? 형제들이여, 우리 뺨의 눈물이 아직 마르지 않은 지 너무 오래되었으니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고통받는 행운과 불운을 제외하고는 곡식, 물건, 상인, 마을 사람, 농민, 화가의 집조차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보야르 폭군들은 희생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약속대로 우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공유지의 이익을 위해 가져가야 할 사람들뿐입니다!"
<파데슈 선언문> 일부.
우리의 전능하신 왕이신 하느님은 그분을 믿는 신자인 우리가 잘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지도자들이 우리 머리에 악을 씌우는 짓을 허용하지 마십시오! (중략) 우리 지도자들이 선할 수 있는 사람들을 선택하게 하십시오. 그들은 우리의 것이며 약속된 대로 우리와 함께 선을 이룰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게으르지 말고 힘써 서둘러 오십시오. 무기가 있는 사람은 무기가 있고, 무기가 없는 사람은 쇠 갈래와 창을 가지고 있습니다. 온 나라의 이익과 이익을 위하여 모임이 있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곳으로 서둘러 오십시오.
그리고 그 큰 의회들은 당신들에게 무엇을 따르도록 지시할 것이며, 그들은 당신들을 어디로 부르게 될 것입니까? 형제들이여, 우리 뺨의 눈물이 아직 마르지 않은 지 너무 오래되었으니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고통받는 행운과 불운을 제외하고는 곡식, 물건, 상인, 마을 사람, 농민, 화가의 집조차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보야르 폭군들은 희생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약속대로 우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공유지의 이익을 위해 가져가야 할 사람들뿐입니다!"
<파데슈 선언문> 일부.
1821년 1월 31일, 왈라키아 보이보드 알렉산드루 수추가 급사했다. 일설에 따르면, 필리키 에테리아가 혁명에 방해되는 그를 독살했다고 한다. 이후 카이마캄(Caimacam: 임시 통치자) 그리고레 브랑코비아누를 비롯한 3명으로 구성된 정부 위원회는 오스만 제국이 왈라키아 보이보드로 선출하려던 스카를라트 칼리마치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하고, 민중이 열렬히 지지하던 투도르를 새 보이보드로 세우기로 결의했다. 2월 15일 투도르가 선임되었고, 판두르 군단 장교였던 드미트리오스 마케돈스키가 부관을 맡았다. 당시 올테니아에 있던 투도르는 같은 날 오스만 파디샤 마흐무트 2세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의 목표는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거부하는 게 아니라 파나리오테스 체제를 거부하고 전통 제도를 보존하는 데 있다고 밝혔다.
이후 올테니아의 티스마나와 스트레하야 수도원을 요새화했으며, 능력주의 도입, 특정 세금 및 세금 기준 폐지, 주요 세금 인하, 왈라키아 군대 설립 및 내부 관세 폐지, 매관매직을 통해 얻은 관료 경질을 발표했다. 여기에 더해 일부 파나리오테스 가문을 추방했고, 미래의 보이보드가 공직을 놓고 지역 보야르와 경쟁하는 것을 금지했다. 1821년 3월 21일 각지의 호응 덕분에 병력을 크게 증강한 그는 부쿠레슈티에 입성한 뒤 오스만 제국과의 평화를 유지하고 싶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반포했다. 한편, 필리키 에테리아는 몰다비아에서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를 중심으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군은 이를 불허하고 그들을 축출했고, 입실란티스의 군대는 부쿠레슈티로 이동하여 투도르와 합류했다.
그러나 투도르는 오스만 제국과의 정면 출돌은 승산이 없다고 여기고, 입실란티와 필리키 에테리아 회원들이 오스만 제국과 대결하는 데 힘을 기울이는 데 협조하지 않고 중립을 선언했으며, 다뉴브 강 남쪽에 병력을 집결시키는 오스만 제국군과 수차례 서신을 주고받았다. 이에 그가 배신했다고 여긴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 및 필리키 에테리아는 투도르를 축출할 음모를 꾸몄다. 여기에 투도르의 급진적인 정책에 위협을 느낀 보야르들은 그에게 등을 돌리고 오스만 제국군에 호응했다. 1821년 5월, 오스만 제국군이 부쿠레슈티로 진군했을 때 보야르들이 대거 호응했고, 시민들은 별다른 저항 없이 성문을 개방했다. 투도르는 올테니아로 후퇴해 병력을 규합하려 했다. 그러던 중 일부 병사가 약탈을 벌이자, 그는 이들을 체포해 군사 재판을 연 뒤 교수형에 처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오히려 그를 따르던 병사들이 자기 동료를 해친 것에 분노해 그에게 등을 돌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1821년 5월 21일, 게오르가키스 올림피오스가 기병대와 보병대를 이끌고 골레슈티에 주둔하던 투도르의 숙영지에 도착한 뒤 장병들에게 투도르를 계속 따를 거냐고 물었다. 장병 대부분은 투도르를 더 이상 따르지 않겠다고 답했고, 그들은 곧바로 투도르를 체포했다. 이후 필리키 에테리아 부대 진영으로 끌려간 투도르는 5월 27일에서 28일 사이의 밤에 오스만 제국과 협력했다는 비난을 받고 트르고비슈테에서 가혹한 고문을 받은 뒤 처형되었다. 그의 유해는 절단된 뒤 구덩이에 던져졌다. 그 후 투도르의 군대 일부는 입실란티스와 올림피오스에게 가담했고, 나머지는 귀가했다. 오스만 제국군은 1821년 8월에 에테리아 반란을 진압한 뒤 1826년까지 왈라키아에 군대를 주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