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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반 스라치미르 (영어:Ivan Sratsimir, 불가리아어: Иван Срацимир) |
출생 | 1324년 또는 1325년 |
사망 | 1397년 |
직위 | 불가리아 제2제국 차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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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불가리아 제2제국 23-2대 차르. 이복 동생 이반 시슈만의 차르 등극에 반발하여 비딘과 불가리아 북부 일대에서 차르를 칭하며 맞섰다. 오스만 술탄국의 불가리아 침략이 거세지는 상황에서도 동생을 돕지 않고 훼방만 놓다가 1397년 오스만군의 공격으로 사망했다.2. 생애
1324년 또는 1325년 이반 알렉산더르와 왈라키아의 테오도라 황후 사이에서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 미하일 아센 4세와 동생 이반 아센 4세가 있었다. 1337년 비딘을 공략한 알렉산더르는 장남 미하일 아센 4세를 공동 차르로 선임하고, 스라치미르를 비딘의 데스포티스로 임명했으며, 프레슬라프를 이반 아센 4세에게 맡겼다. 스라치미르는 외교권과 전쟁을 일으킬 권한만 없을 뿐 관료를 마음대로 임명하고 해임하는 등 비딘을 자율적으로 다스릴 수 있었다.그러던 1349년 동생 이반 아센 4세가 오스만군과 전투를 벌이던 중 전사했고, 1355년 형 미하일 아센 4세가 흑사병에 걸려 사망했다. 스라치미르는 내심 자신이 차기 차르가 되리라 여겼지만, 알렉산더르는 유대인이었다가 정교회로 개종한 두번째 아내 테오도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이반 시슈만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스라치미르는 이에 분노하여 비딘에서 외교권을 자기 마음대로 행하고 중앙 정부의 지시를 제대로 따르지 않는 등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하지만 알렉산더르는 막 나가는 아들을 내버려뒀다.
1365년, 헝가리 왕 러요시 1세가 스라치미르에게 비딘의 종주권을 자신에게 넘긴다면 불가리아의 왕으로 임명하겠다고 제안했다. 스라치미르가 거절하자, 러요시 1세는 그해 5월 1일 비딘을 침공했고 6월 2일 함락시키며 스라치미르를 사로잡았다. 러요시 1세는 즉시 스라치미르를 포함한 포로들이 가톨릭식 세례를 받도록 강요했다. 이후 크로아티아의 훔니크 성에 수감되었다가 1369년 부친이 비딘을 탈환한 뒤에야 가까스로 풀려나 비딘의 데스포티스로 복귀했다. 다만 스라치미르의 두 딸은 헝가리 왕실에 인질로 보내졌는데, 그 중 한 명인 도로테아는 1374년경 보스니아의 통치자 트바르드코와 결혼했다.
1371년 2월 13일 이반 알렉산더르가 사망한 뒤 이반 시슈만이 새 차르로 즉위했다. 스라치미르는 이에 반발하여 역시 차르를 칭하고 불가리아 북부를 장악했다. 여기에 오랫동안 세력을 확장했던 도브루자의 데스포티스 도브로티차 역시 이반 시슈만에게 복종하길 거부하고 독립국을 세웠다. 이리하여 불가리아는 3개로 분열되었다. 1381년 타르노보에 있는 불가리아 총대주교구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비딘 대주교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구의 관할로 두었다. 이로 인해 비딘과 타르노보 양자간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지만, 무력 충돌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1388년경 스라치미르는 오스만 술탄국의 봉신이 되어 오스만군이 비딘에 주둔하는 걸 받아들였다.
1393년 오스만군이 타르노보를 공략했고, 1395년 이반 시슈만이 니코폴리스에서 처형되었다. 이제 비딘의 앞날이 위태로워지자, 스라치미르는 헝가리 왕 지기스문트가 조직한 십자군에 참여했다. 십자군이 비딘에 도착하자, 그는 성문을 열고 오스만군이 도륙되도록 방치했다. 그러나 1396년 9월 25일에 벌어진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십자군은 오스만군에게 완패했다. 바예지트 1세는 즉시 비딘으로 진격하여 1396년 말 또는 1397년 초에 함락했다. 스라치미르는 오스만 술탄국의 수도 부르사로 끌려갔다. 최후에 관한 기록은 없지만, 1397년을 넘기지 못하고 처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