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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14 16:43:53

존 피츠길버트 마셜

성명 존 피츠길버트
John FitzGilbert
이명 마셜
Marshal
생몰년도 1105년경 ~ 1165년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미상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윌트셔 브란덴스톡 수도원
아버지 길버트 피츠길버트
어머니 미상
형제 윌리엄 기퍼드
아내 에일린, 솔즈버리의 시빌라
자녀 길버트, 월터, 존 2세, 윌리엄, 안셀, 헨리, 마틸다, 성명 미상의 딸
직위 잉글랜드 왕실 마셜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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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 왕실 마셜. 무정부시대 시기에 스티븐 왕을 따랐다가 마틸다 편으로 돌아섰다. 윌리엄 마셜의 아버지다.

2. 생애

1105년생으로, 아버지 길버트 마셜은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했을 당시 또는 직후에 노르망디 공국에서 잉글랜드로 이주한 뒤 윌트셔에 토지를 구매한 길버트 기퍼드의 아들 또는 사위로, 윌리엄 2세 또는 헨리 1세 치세에 마셜(Marshal)을 맡았다. 길버트 마셜이 맡은 '마셜'은 군대 최고 계급인 원수가 아니라 , , 사냥개를 관리하고 왕실의 일상 생활을 조직하는 일을 담당하는 궁정 직위였다. 길버트 마셜의 후예는 대대로 마셜 직위를 물려받았고, 나중에는 마셜 자체가 그들의 성씨가 되었다. 존 피츠길버트에게는 형제 윌리엄 기퍼드가 있었다.

존 피츠길버트는 1130년 이전에 아버지의 지위를 얻기 위해 은화 40마크를 헨리 1세에게 바쳤고, 스티븐 왕 치세 초기에 작성된 <왕실의 설립(Constitutio Domus Regis)>에는 최고 마셜로 언급되었다. 그는 그리 큰 권력을 갖지 않았지만, 마셜이라는 지위 덕분에 왕과 가까운 곳에 있을 수 있었다. 그는 조수 4명, 왕실 예식장 여러 명, 방 관리인, 왕실 벽난로 관리인을 이끌었으며, 왕궁 근처의 여러 주택, 윈체스터 성, 윌트셔 및 버크셔에 있는 여러 토지를 관리했다. 주요 사유지인 햄스테드 마셜은 윌트셔와 버크셔의 경계에 인접한 케넷강 계곡에 지어졌다.

무정부시대 시기 존의 피츠길버트의 행적은 그의 아들인 윌리엄 마셜의 전기인 <윌리엄 마셜의 역사>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 전기는 상당히 편향되었으며, 종종 왜곡과 과장이 포함되었다. 이 전기에서, 존 피츠길버트는 용감하고, 현명하며, 믿음직하고 담대한 기사이자 본받을 만한 사람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당시 존은 백작이나 남작이 아니었고, 큰 부도 없었으며, 스티븐 왕과 마틸다의 사이를 오가면서 전쟁에서 많은 이득을 챙기려고 노력했다.

1135년 12월 헨리 1세가 사망한 뒤. 스티븐 왕은 헨리 1세가 생전에 지정한 후계자 마틸다를 무시하고 왕위에 올랐다. 이때 존 피츠길버트는 스티븐 왕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마셜 직위를 유지했으며, 1137년 스티븐 왕이 노르망디 원정을 떠났을 때 동행했다. 윈체스터 연대기에 따르면, 존은 1138년 말버러 성과 라거샬 성의 성주였다고 한다. 아마도 스티븐 왕이 자신을 지지해주는 그에게 보답하고자 2개 성을 맡겼을 것이다. 말버러 성은 잉글랜드 서부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로, 런던브리스톨 사이의 주요 도로와 윌트셔 북부의 땅을 통제할 수 있었다. 그는 이제 잉글랜드 서부에서 상당히 영향력 있는 인물로 떠올랐으며, 햄스테드 마셜을 건설한 건 바로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1139년, 마틸다는 이복형제인 글로스터의 로버트의 지원을 받아 잉글랜드에 상륙한 뒤 브리스톨에 정착했다. 이후 잉글랜드는 스티븐 왕의 추종자들과 마틸다의 추종자들로 양분되었는데, 두 세력의 경계에 영지가 있던 존 피츠길버트는 상황을 지켜보다가 1141년 2월 링컨 전투에서 스티븐 왕이 글로스터의 로버트에게 패배하고 사로잡히자 마틸다 편으로 넘어갔다. 그해 7월, 존은 옥스퍼드에서 마틸다와 함께 있었으며, 8~9월 윈체스터 전투에 참여했다. 그러나 윈체스터 전투는 마틸다군의 완패로 끝났다. <윌리엄 마셜의 역사>는 존 피츠길버트가 마틸다에게 남자처럼 말을 타서 피신하라고 조언하고, 사력을 다해 싸워서 그녀를 구했다고 기술했다. 하지만 실제로 후위대를 맡아 마틸다를 지킨 이는 글로스터의 로버트였고, 공식 기록에서는 로버트가 용감하게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함께 했을 때 함께 있던 장교들로 여러 인물이 언급되지만, 존 피츠길버트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윌리엄 마셜의 역사>에 따르면, 존 피츠길버트는 워벨 수도원 인근에서 분견대를 이끌고 적군과 맞서 싸우다가 패배를 면치 못하게 되자 퇴각하여 수도원 교회에 숨었다. 그러나 스티븐의 지지자들이 교회에 불을 질러 납 지붕이 녹았고, 뜨거운 납 한 방울이 존의 얼굴에 떨어져서 한쪽 눈을 잃는 중상을 입었지만 폐허가 된 교회에서 가까스로 탈출했다고 한다. 그는 이후에도 마틸다를 지지했으며, 동생 윌리엄 기퍼드는 1141년과 1142년 마틸다의 시종장을 맡았다. 그러나 그는 스티븐 왕과 마틸다의 전쟁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대신 버크셔와 윌트셔에서 권력을 강화하는 데 중점을 뒀다. 애빙던 수도원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훌륭한 성을 쌓았지만 이를 이용해 폭정을 자행하고 주민들에게서 재산을 갈취했으며, 교회의 재산에 손을 대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고 한다.

12세기 연대기 작가 맬스버리의 윌리엄에 따르면, 글로스터의 로버트를 섬겼던 용병대장 로버트 피츠허버트는 1140년 봄 윌트셔에 있는 왕실 소유의 데비지스 성을 장악했지만, 로버트에게 넘겨주지 않고 자신이 그대로 확보했다. 그 후 로버트는 존 피츠길버트와 손을 잡아서 글로스터의 로버트가 응징하려 하는 것에 대비하려 했다. 존은 함께 의논하자며 로버트 피츠허버트를 말버러 성으로 불러들였지만, 로버트 피츠허버트가 부하들과 함께 찾아오자 긴급 체포한 뒤 고문을 가했다. 그 후 존은 글로스터의 로버트에게 500마크에 로버트 피츠허버트를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가, 나중에 마음을 바꿔 데비지스 성 앞에 로버트 피츠허버트를 데려간 뒤 수비대 앞에서 당장 성을 넘기지 않으면 그들의 성주를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수비대가 항복을 거부하자, 존 피츠길버트는 로버트 피츠허버트를 교수형에 처했다고 한다.

1140년대 후반, 존은 윌트셔의 가장 강력한 봉건 영주 중 한 사람인 솔즈버리 백작 패트릭과 갈등을 벌였다. 패트릭은 윌트셔에서 가장 요새화된 도시 중 하나인 올드 사룸을 다스렸으며, 마틸다의 지지자였다. 존은 자신의 영향력을 동쪽으로 확장하기 위해 윌트셔의 라거샬에 작은 요새를 지었고, 패트릭은 자기 영지가 침해되고 있다고 여기고 반감을 품었다. 이후 양자는 상대 영지에 습격대를 보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으며, 소규모 접전도 잇달아 벌였다. 그러나 두 영주 모두 서로를 꺾지 못하자 화해하기로 하고, 존은 첫 아내 에일린과 이혼한 뒤 패트릭의 자매인 시빌라와 재혼했다. 그는 이 결혼으로 4남 3녀를 낳았는데, 이중 한 아들이 그 유명한 윌리엄 마셜이다.

1150대 초, 존 피츠길버트는 영지를 확장하기 위해 옥스퍼드와 윈체스터 사이에 있는 도로를 통제하고자 새로운 요새를 건설했다. 이 요새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윌리엄 마셜의 역사>는 뉴버리에 그 성이 있었다고 기록했지만, 뉴버리에서 성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스티븐 왕은 자기를 배신하더니 이제는 노골적으로 자신의 세력권 내에 성을 쌓는 그를 응징하고자 군대를 일으켜 존 피츠길버트가 새로 세운 요새를 포위했다. 당시 그곳에 없었던 존은 스티븐과 평화 협상을 제의한 뒤, 그에게 새 요새를 넘겨주고 당시 5살 정도의 어린 아이였던 막내아들 윌리엄 마셜을 인질로 넘길 테니 물러나달라고 요청했다.

스티븐 왕은 이를 받아들이고 물러났지만, 존 피츠길버트는 곧바로 요새에 들어가서 성문을 걸어잠그고 약속을 파기했다. 이에 격분한 스티븐 왕은 다시 요새를 포위한 뒤 그의 아들 윌리엄을 처형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자 존 피츠길버트는 이렇게 응수했다.
"나에게는 더 나은 아들을 만들 수 있는 망치와 모루가 있다!"

스티븐 왕은 이 말을 듣고 더욱 격분해 윌리엄을 투석기에 태워서 성을 향해 날려버리려 했지만, 아이가 워낙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이자 마음이 흔들려 결국 중단했다고 한다. 그 후 새 성채는 포위를 견디지 못하고 항복했지만, 존 피츠길버트는 포로 신세를 모면하고 탈출했다. 윌리엄은 1년 넘게 인질로 잡혀 있다가 1153년 11월 6일 스티븐 왕이 왕위를 유지하되 마틸다의 아들 헨리 2세가 후계자가 되는 조건으로 윈체스터 평화 협약이 체결되면서 내전이 종식된 뒤 풀려났다.

1154년 스티븐 왕이 사망하고 헨리 2세가 잉글랜드 왕위에 오른 뒤에도 존은 왕실에서 중요한 인물로 남았다. 그는 라거샬 성을 제외한 대부분의 성 관리직을 유지했으며, 마셜 직위도 계속 맡았다. 그러나 1158년, 헨리 2세는 그로부터 말버러 성을 회수했다. 연대기 작가 디스의 랄프는 헨리 2세가 유럽 대륙으로 떠났을 때 소위 '멀린의 예언'을 근거로 헨리 2세가 잉글랜드로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발언한 게 헨리 2세의 귀에 들어갔기에 이런 조치가 내려졌다고 밝혔다. 1163년 잉글랜드로 돌아온 헨리 2세는 그를 아예 숙청해버리려 했지만, 존이 토머스 베켓과의 분쟁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입장을 보이자 왕실에서 계속 활동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존 피츠길버트는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베켓의 전임자인 테오발드의 영지 중 하나가 유전적 구너리에 따라 자신에게 속한다고 주장했으며, 해당영지를 어떻게든 접수하려고 토머스 베켓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법정 판결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그는 헨리 2세가 토머스 베켓을 미워하고 있다는 걸 잘 알았기에 왕에게 호소했고, 헨리 2세는 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1164년 11월 노샘프턴에서 의회를 소집했다. 헨리 2세는 이 의회에서 토머스 베켓에게 불만을 품은 영주들로부터 여러 고발장을 접수한 뒤, 이를 근거삼아 토머스 베켓을 잉글랜드에서 추방했다. 그러나 존 피츠길버트는 자기가 원하던 영지를 받지 못했다.

존 피츠길버트는 1165년경에 사망했고 윌트셔의 브란덴스톡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의 재산은 첫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 중 장남인 길버트 피츠존과 두번째 아내와의 낳은 자식 중 장남인 존 2세 마셜에게 분배되었지만, 마셜의 지위와 재산은 딱히 정해지지 않았다. 길버트가 1166년경에 사망한뒤 존 마셜이 모든 재산을 가져갔고 마셜 지위와 재산도 획득했다. 1194년, 마셜의 지위와 재산은 두번째 아내 사이에서 낳은 둘째 아들인 윌리엄 마셜에게 넘어갔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