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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시오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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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루마니아 공영방송 TVR이 루마니아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루마니아인 100명'을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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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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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에밀 시오랑
Emil Cioran
파일:emil cioran.jpg
본명 에밀 미하이 시오랑[1]
Emil Mihai Cioran
출생 1911년 4월 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라시나리
사망 1995년 6월 20일 (향년 84세)
프랑스 파리
국적
[[루마니아|]][[틀:국기|]][[틀:국기|]]
직업 철학자, 작가
분야 대륙철학
성향 염세주의, 실존주의
동거인 시몬 부에 (1919~1997)
종교 무종교[2]
서명
파일:Emil_Cioran_signature.svg

1. 개요2. 생애3. 저서
3.1. 국내 번역3.2. 미번역
3.2.1. 루마니아어3.2.2. 프랑스어
4. 평가

[clearfix]

1. 개요

루마니아 출신의 철학자, 작가.

2. 생애

1911년, 트란실바니아의 작은 시골인 라시나리에서 태어났다. 당시 트란실바니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치하에 있었는데, 동방정교회 수도자였던 아버지 에밀리안 시오랑은 저항의 표시로 자식들에게 라틴어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후 부쿠레슈티 대학에 입학해 철학과 미학을 공부하며, 훗날 저명한 종교학자가 되는 미르체아 엘리아데와 만나 친구가 된다. 이후 앙리 베르그송에 대한 졸업 논문을 제출, 최우수 성적으로 학사 학위를 받는다.

1933년, 훔볼트 재단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독일 베를린 대학교에서 수학하는데 이 시기 나치에 매료되어 히틀러에 대해 "그처럼 심금을 울리고 존경할 만한 정치인은 없다"는 극찬을 남기고, 동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자신을 '히틀러주의자'라 칭하는 등 공공연히 지지하는 태도를 보인다.[3] 동시기 이탈리아 파시즘에도 비슷한 견해를 보였는데,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이탈리아가 승리하자 이를 환영하기도 했다.

1933년, 첫 저서 '절망의 끝에서' 'Pe culmile disperării를 발간, 루마니아 왕립 아카데미 상을 수상하며 작가로서 발걸음을 내딛는다. 1936년, 고국으로 돌아와 브라소프 고등학교의 철학교사로 일하는데 이때 주변 사람들로부터 몰이해와 괄시를 받았으며 '미친 사람'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후 장학금을 지원받아 1937년 프랑스로 떠나 앙리 베르그송에 대한 논문을 준비하고 '루마니아 얼굴의 변모' Schimbarea la față a României와 '눈물과 성자' Lacrimi și Sfinți을 출간하는데 이 책들은 루마니아 사회에 큰 충격을 주며 신성모독이라는 비판까지 받게된다. 1940년, 루마니아로 돌아와 3개월 정도 체류하는데 이 시기 파시즘 조직 철위대와 밀접히 교류하며 해당 조직의 창시자인 코르넬리우 젤레아 코드레아누를 찬양하는 라디오 연설을 하기도 했다. 훗날 시오랑은 인터뷰와 글을 통해 젊은 시절 파시즘을 지지한 것에 대해 여러 차례 후회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후로 프랑스로 돌아와 평생을 파리에서 살게 된다. 파리에 정착한 시오랑은 '열정적인 핸드북'Îndreptar pătimaș을 출간, 이 책을 마지막으로 모국어인 루마니아어와 결별하는데 후일 시오랑은 "언어를 바꾸면서 나는 내 인생의 한 시절과 결별했다"고 담담하게 회고한다. 이후 자전거로 프랑스 전역을 비롯, 스페인과 스위스, 그리고 영국을 여행하며 견문을 쌓는다. 1949년 '해체의 개설' Précis de décomposition의 출간을 시작으로 평단으로부터 주목을 받으며 생트 뵈브 상, 콩바 상, 니미에 상 등 각종 상들로부터 수상자로 지목받으나 전부 수상을 거부한다. 이후로도 수많은 저술들을 집필하며 평단과 식자층으로부터 찬사를 받았고 1995년 84세를 일기로 파리에서 사망한다.

시오랑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 인간에게 최선이라고 믿었고, 그렇기에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3. 저서

3.1. 국내 번역

3.2. 미번역

3.2.1. 루마니아어

3.2.2. 프랑스어

4. 평가

생존 페르스는 에밀 시오랑을 "폴 발레리 사후 프랑스 어를 빛낸 가장 위대한 프랑스 작가"로 평했다.


[1] 루마니아어에 따른 표기는 '에밀 미하이 치오란'. 프랑스에서 주로 활동하여 프랑스어식 표기로 알려졌다.[2] 《내 생일날의 고독》(태어났음의 불편함 1994년 번역본)에 실린 인터뷰에서 본인을 윤회를 믿지 않는 불교 신자로 묘사했다.[3] 사실 나치 집권 초기에는 나치가 독일 사회를 구제할 것이라는 희망에 매료되어 이러한 실수를 범한 지식인이 적지 않았는데, 대표적으로 20세기 최고 철학자로 평가되는 마르틴 하이데거도 그 중 한 명이었다.[4]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로 재출간. 이렇듯 매출이나 편집부의 취향 때문에 제목을 왜곡에 가깝게 변경하는 경우가 꽤 있다.[5] '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로 출간되기도 하였다.[6] 1950년대 후반 당시의 정치와 역사, 유토피아에 대한 시오랑의 견해로, 국내에 "역사와 유토피아"로 소개되어 있다.[7] 미공개 작업들 모음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