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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파이어아벤트 Paul Feyerabend | |
<colbgcolor=#000000> 본명 | <colbgcolor=#fff,#191919>파울 칼 파이어아벤트 Paul Karl Feyerabend [1] |
출생 | 1924년 1월 13일 오스트리아 빈 |
사망 | 1994년 2월 11일(향년 70세) 스위스 제놀리에 바우드 |
국적 | [[오스트리아| ]][[틀:국기| ]][[틀:국기| ]] |
모교 | 빈 대학교 (철학 / Ph.D.) (1951년) |
경력 | 브리스톨 대학 강사 캘리포니아 UC 버클리 교수 런던 대학 과학사 과학철학 교수 베를린 대학 과학철학 교수 예일 대학교 과학철학 교수 취리히 연방공과대학교 교수 |
직업 | 과학철학자 |
[clearfix]
1. 개요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과학철학과 방법론에 관련해서, 과학에는 일반적인 방법론이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접근법이 허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2. 생애
1924년 오스트리아 빈의 중류층 이하의 가정에서 출생했으며 희곡, 철학, 물리학, 수학, 천문학에 뛰어난 관심과 재능을 보인 영재였다. 14살 되던 해에 오스트리아는 독일에 합병이 되었다. 18세에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바로 나치군에게 징병당해 프랑스 브르타뉴 브레스트(Brest)에 배치됐다. 브레스트 주둔이 끝나고 살기 위해[2]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했으며, 1년 뒤 어머니는 우울증으로 자살했다. 직후 파이어아벤트는 전선에 투입되었다. 파이어아벤트가 속한 부대는 지금의 에스토니아 지역까지 진군했고 그 과정에서 그는 상병과 하사를 거쳐 소위로 임관했다. 한번은 부대가 러시아군의 공격을 받고 대피하기 위해 주변 마을을 잠시 점령하고 있다가 다시 도망쳐 나왔는데, 이때의 공로로 2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1945년 21살 때, 상관들이 연이어 부상당한 까닭에 파이어아벤트는 보충대와 수많은 독일 난민들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그러던 중 러시아군의 습격을 받아 얼굴과 척추에 총을 맞았다. 다행히 야전 병원에서의 수술을 통해 살아남았지만 이후 평생을 절름발이와 성불능으로 살게 된다. 그는 소설, 시, 에세이 등 온갖 종류의 책을 읽었던 병원생활에서 만족감을 얻었으며, 오히려 이러한 삶이 전쟁터에서의 삶보다 좋았었다고 회상한다.
독일이 패망하고 부상에서 어느 정도 회복하여 목발에 의지하여 걸을 수 있게 되자[3] 연예오락 쪽의 직업을 알아보고 음악 학교에 다녔으며 오폐라와 가수 오디션을 보기도 했다. 그는 나치군에서 활동하긴 했지만, 나치당에 입당한 적도 없고 어떤 전쟁범죄행위에도 가담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윤리심사위원회의 심사 결과 아무 문제가 없음을 인정받았다. 다만 그것은 그가 나치에 소극적으로 저항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전쟁범죄를 저지를 그런 상황에 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4] 그는 자서전에서, 나치 시대 때 유대인이나 공산주의, 볼셰비키의 위협 등에 대한 어떤 일반적인 이야기에도 그것을 지지하거나 반대하지 않았으며, 이야기들을 그저 한 귀로 들었다가 한 귀로 흘리며 살았다고 이 시절을 반성한다.
1947년 빈 대학교에 입학하여 칼 포퍼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강의를 듣기도 하고 덴마크 여행 도중 닐스 보어의 세미나에 참가하기도 하면서 에델투르트와 결혼했다. 매우 현실적인 이유로 결혼했는데, 1940년대는 오직 결혼한 부부만 함께 여행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밖에 2번의 결혼생활[5]과 수많은 연애를 했었지만 결정적인 상황이 되면 성불구여서 섹스를 피하려고 했다. 파이어아벤트는 섹스의 초기 단계를 좋아했고 그 단계에서 상대방에게서 받는 암시와 행동에 행복해 했었지만, 그 스스로는 한번도 오르가즘을 느껴보진 못했다. 행복에 겨워 몸을 뒤틀어대는 파트너를 보면서 종종 웃기다고 생각했다.[6] 이 결핍을 채우는 것은 항상 성악과 오폐라였다. 그는 꾸준히 성악 수업을 들었으며 자신의 목소리가 아름다운 소리를 낼 때 거기서 환희를 느꼈다. 오폐라도 일주일에 다섯번 갈 정도로 푹 빠져 있었는데, 그의 자서전을 보면 절반이 오폐라와 연극 이야기일 정도로 오폐라 광이었다.
1951년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비트겐슈타인에게 배우기 위해 영국으로 떠났으나 마침 비트겐슈타인이 죽었고 다른 지도교수를 찾아야 했다. 파이어아벤트는 칼 포퍼를 선택했고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 칼 포퍼의 과학방법론을 배웠다. 철학자 엔스콤으로부터 분석철학을 배웠으며 양자역학과 비트겐슈타인의 이론에도 관심을 가졌다. 처음에는 포퍼의 반증주의적 과학관을 존경하였지만 후에는 포퍼의 과학관을 부정하게 된다. 1955년에 브리스톨 대학에서 과학철학 강의를 시작하여 이후 세계 여러대학에서 과학철학을 가르쳤으며 20여년 간 UC버클리 교수 자리에 있으면서 수많은 대학의 종신교수를 같이 역임했다. 1989년 UC 버클리를 떠난 파이어아벤트는 학술회의, 강연, 저술 등에 매진하다가, 1994년 뇌종양으로 인한 뇌출혈으로 스위스에서 숨을 거두었다.
3. 사상
3.1. 전기: 수용된 견해 비판
파이어아벤트의 철학은 1975년 출간된 《방법에의 도전》을 기점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양분된다.[7]우선 파이어아벤트가 《방법에의 도전》을 출간하였을 때 왜 그렇게 화재와 논란이 되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가 이전에 다른 연구들로 학계에서 이미 영향 있던 학자라는 점을 주시 할 필요가 있다.
1962년 파이어아벤트가 발표한 《설명, 환원 경험주의》는 전기의 대표적인 업적이다 이 논문의 목표는 당시 인정 받던 네이글(Negel)의 환원 모델과 헴펠-오펜하임(Hempel-Oppenheim)의 과학적 설명이론 등이 아리스토탈레스의 운동학이나 뉴턴 역학 혹은 양자역학 같은 보편 이론에 적용되는데 상당한 난점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데 있었다.[8]
이 책에서 그는 당시 논리실증주의자들의 '수용된 견해' 를 비판하였는데, 이 모델에서는 과학에서 사용되는 언어를 관찰언어와 이론언어로 구분한다.
그런데 파이어아벤트가 비판하기로는 이론이란 보편적인 것을 지향하기에 세계에 모든 것을 포괄하기 때문에 이론언어란, 과찰언어에도 관찰에 사용 되는 언어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보편이론이 관찰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면 보편이론을 어떻게 확실하게 경험적으로 검증 할 수 있을까?[9]
여기서 파이어아벤트는 '통약불가능성' 개념을 도입하였다. 특정 이론에 대한 검사와 검증을 위해서는 서로 상반되는 서로 양립될 수 없는 두 이론의 맞부딪힘이 필요하다. 이론은 사실이 아니라 다른 이론에 의해서 검사된다. 한 이론의 난점은 그 이론의 관점만으로는 검증할 수 없으며 다른 대안 이론이 존재할 때만 서로 맞부딪힘을 통해서 검증이 이루어질 수 있다. 대안이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경쟁을 통한 맞부딪힘도 없을 것이고 독단적인 정체상태만 있을 뿐이다..[10]
여기서 파이어아벤트는 반드시 '이론증식'(pro-liferation)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만일 이론들이 서로 맞부딪힘을 통해서만 검사될 수 있다면 경험적 검증을 위해서는 대안이론들의 생기는 것이 반드시 요청되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이론의 개념은 다른 이론의 관점에서는 타당하지 않고 서로 부딪혀야 한다. 그는 이러한 이론간의 관계를 '통약불가능성' 이라 하였다. [11]
파이어아벤트는 이렇게 '통약불가능성' '이론증식' 등의 개념을 토대도 당시 과학철학의 '수용된 견해' 를 비판하였다. 이러한 비판들은 학계에서 영향을 미쳤고 파이어아벤트는 러커토시 등과 함께 당시 과학철학 학계에서 주요한 학자중에 한명이었다고 한다.[12]
3.2. 인식론적 아나키즘
《방법에의 도전》(1975)의 출간은 파이어아벤트가 이전에 쌓아올렸던 과학철학자로서의 이미지를 단번에 무너뜨렸다. 책의 출간과 함께 많은 논란과 비판들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13]파이어아벤트는 자신이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주의 사상을 따라가고 있다고 한다. 밀은 특정한 사상만이 진리라는 독단을 배격하고, 회의주의적 인식론에 입각하여 진리는 결코 확언할 수 없으며 강요할 수도 없기 때문에 언론과 사상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이다. 파이어아벤트의 과학철학은 이러한 밀의 사상을 이어받은 것이다.
파이어아벤트에 따르면, 과학사를 통해 보면, 모든 상황에 다 적용되는 구체적인 과학적 방법은 존재하지 않으며, 만일 그런 모든 상황에 다 적용되는 과학적 방법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뭐든 된다(Anything goes). 심지어 파이어아벤트는 "과학은, 신화나 미신, 점성술과 비교해서 결코 우월한 지식일 수 없다"고 까지 주장한다. 과학에도 권위가 있으며 그 권위로 인해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 때문에, 그 과학의 권위를 깨부술 수 있으면 무엇이든지 가능하다는 것. 따라서 '과학적 방법론'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파이어아벤트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갈릴레오는 기존에 잘 성립된 이론(아리스토텔레스 역학)과도, 관측결과(연주시차가 측정되지 않는 것)와도, 전혀 안 맞는 가설을 제시하였고, 논리 실증주의나 반증주의적인 과학적 방법론적 입장에서 갈릴레오는 "비합리적"이었다. 갈릴레오와 같은, "비합리적"인 학자가 있었기에, 그리고, 이러한 "비합리성"이 이른바 "과학적 합리성"을 누르고 승리하였기 때문에, 근대 과학이 "진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논리 실증주의든, 칼 포퍼식 반증주의든, 특정한 과학적 방법론에서 제기되는 "합리성"이라는 권위에 의지하여, 학자들을 특정한 방법론에 가둬놓는 것은 과학의 "진보"에 해를 끼치게 한다는 것이다. 학문의 자유를 누리게 하는 것이 방법론보다 더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여러면에서 상대주의적 주장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그는 자신이 상대주의자가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그의 서적들을 살펴보면 일관성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자신이 말하지도 않았던 것"을 옹호했다고 스스로 밝혔는데, 그건 단지 비평가들의 말을 반대하기 위해서 옹호한 것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상대주의자라는 비판을 그는 결코 피할 순 없다.
나는 그것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나 자신의 콜라주의 구체적인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기도 했지만 그것을 확인하는 데 게을렀던 나는 비평가들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어떤 서평자가 "파이어아벤트가 X를 말했다"라고 쓰고, 그 X를 공격하면, 나는 내가 정말 X를 말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옹호하려고 했다. (...)
내가 쓴 텍스트를 포함하여 모든 텍스트는 종종 그 의미가 모호하게 여겨진다. 그것들은 어떤 한 가지를 의미하다가 다른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킬링 타임》 p.253~254
또한 그의 주장은 과학이 절대적으로 합리적이거나 객관적이지 않다는 점은 잘 지적해주고 있지만, 그렇다고해서 그의 주장대로 점성술과 미신에서 과학의 근거를 찾는 것이 마냥 과학의 성장과 진보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보긴 힘들다는 점에서 문제점이 드러난다. '무엇이든 된다'는 아나키즘적 방법론은 과학을 진보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가능성이 있는 만큼, 퇴보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가능성도 지니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과학적 권위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점은 잘 파악했으나 '무엇이든 된다'는 그의 방법론은 결코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철학계에서는 파이어아벤트의 '인식론적 아나키즘[14]'이 매우 '급진적이고 상대주의적 주장'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내가 쓴 텍스트를 포함하여 모든 텍스트는 종종 그 의미가 모호하게 여겨진다. 그것들은 어떤 한 가지를 의미하다가 다른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킬링 타임》 p.253~254
3.3. 과학은 대중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과학이라는 한 가지 앎의 방식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앎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고 그것들이 서구적 문명화에 훼손되기 이전에는 사람들을 살아 있게 만들고 그들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효과적이었다. 과학 그 자체는 그밖의 전략, 결과물, 형이상학적 장식물과 충돌하는 부분을 갖는다. 그것은 하나의 시스템이 아니라 콜라주다. 더욱이 역사적인 경험과 민주적인 원리는 모두 과학이 대중적 통제 아래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제안한다. 과학 제도는 '객관적'이 아니다. 과학과 그것의 생산물 중 어느 것도 바위나 별과 같이 사람들과 대면하지 않는다. 과학은 종종 다른 전통과 섞여서 그것들로부터 영향을 받고 그것들에 영향을 미친다. 결정적인 과학의 움직임은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감정에 의해 촉발된다. 과학의 물질적 이득은 전혀 명확하지 않다. 커다란 이득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만큼 커다란 불리함도 있다. 또한 그러한 이득을 산출하는데 추상적 실재인 과학의 역할은 그다지 분명하지 않다.
《킬링 타임》 p. 251
파이어아벤트는 과학이 과학자의 통제를 받아야 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통제를 받아야 된다고 말한 가장 대표적인 학자라고 볼 수 있다. '과학'이 진리 탐구의 영역이라는 명목으로 절대화되선 안되는 까닭은, 역사적으로 봤을 때 과학의 적용은 인간의 삶을 절대적으로 좋은 쪽으로만 이끌고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과학적 행동 방침이 무조건적으로 인간에게 옳은 것도 아니었다. 어떤 면에 있어서는 과학은 불평등과 부자유를 합리화하기도 한다. 과학은 단지 세상을 바라보는 여러가지 관점 중 하나에 불과한데다 과학 제도는 결코 객관적이라 볼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삶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 과학의 적용은 대중의 통제를 받아야 된다는 것이 파이어아벤트의 주장이었다.《킬링 타임》 p. 251
이에 과학계는 '과학을 통제하는 대중들은 과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며 파이어아벤트를 격렬히 비판하였다. 또한 과학계는 무분별하게 과학용어를 사용하는 인문철학자들과의 싸움을 거치면서, 그 싸움의 기원이 파이어아벤트에 있었음을 거론하기도 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과학계와 대중 간의 소통 노력이 중요하다는 결론으로 가고 있다. 과학계는 대중들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통해 어려운 과학적 지식을 쉽게 알릴 필요가 있으며, 대중들은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과학적 지식이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판단하고 여론을 형성하여 정책에 반영하는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4. 주요 저서
- 《방법에 반대한다》: 새로운 과학관과 인식론적 아나키즘 (Against Method: Outline of an Anarchistic Theory of Knowledge) (1975) : 대표작 1
- 《자유 사회 속의 과학》: (Science in a Free Society) (1978) : '방법에 반대한다'를 보충
- 《이성이여 안녕》: (Farewell to Reason) (1987) : 대표작 2
- 《킬링 타임》: (Killing Time:The Autobiography of Paul Feyerabend) (1995) : 말년의 자서전
- 《풍요로움의 정복》: (Conquest of Abundance:A Tale of Abstraction versus the Richness of Being) (1999) : 미완성 유고집
5. 관련 영상
6. 여담
- 《방법에 반대한다》를 출간하고 과학계로부터 수많은 공격을 받았다. 1987년 《네이처》지는 파이어아벤트를 소개하면서 "과학의 최악의 적"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파이어아벤트는 이러한 공격에 "나는 이 X같은 책을 쓰지 말았어야 했다고 몇 번이고 생각했다"고 한다.[15]
[1] 원래는 독일에서 흔한 이름인 Feierabend(마감 시간이라는 뜻) 이었는데, 할아버지가 좀더 이국적인 이름으로 보이기 위해서 i를 y로 바꾸었다.[2] 파이어아벤트의 표현에 따르면 '살기 위해' 육군에 입대하려고 했고 그러기 위해 사관학교에 지원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죽음으로부터 살기 위한 것인지, 먹고 살기 위한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다.[3] 이후 평생을 목발을 짚고 살아간다.[4] 파이어아벤트 자서전 《킬링 타임》 p.122[5] 총 3번의 결혼을 했다. 첫번째는 에델투르트, 두번째는 메리 오닐, 세번째는 그라지아.[6] 파이어아벤트 자서전 《킬링 타임》 p.153[7] 정병훈, 《과학철학: 흐름과 쟁점, 그리고 확장》, (주)창비, 2011[8] 정병훈, 《과학철학: 흐름과 쟁점, 그리고 확장》, (주)창비, 2011[9] 정병훈, 《과학철학: 흐름과 쟁점, 그리고 확장》, (주)창비, 2011[10] 정병훈, 《과학철학: 흐름과 쟁점, 그리고 확장》, (주)창비, 2011[11] 정병훈, 《과학철학: 흐름과 쟁점, 그리고 확장》, (주)창비, 2011[12] 정병훈, 《과학철학: 흐름과 쟁점, 그리고 확장》, (주)창비, 2011[13] 정병훈, 《과학철학: 흐름과 쟁점, 그리고 확장》, (주)창비, 2011[14] Epistemological anarchism[15] 《킬링 타임》 p.2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