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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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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88><colcolor=#fff>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
[1]
파일:Hannah-Arendt-jeune43.gif
본명 요한나 콘 아렌트
Johanna Cohn Arendt
출생 1906년 10월 14일
독일 제국 하노버 린덴
사망 1975년 12월 4일 (향년 69세)
미국 뉴욕 주 뉴욕 시 맨해튼
국적
[[독일 제국|]][[틀:국기|]][[틀:국기|]] →
[[미국|]][[틀:국기|]][[틀:국기|]]
직업 정치철학자
학력 지트니크 학교 [2] (1913~16)
샤르로텐부르크 라이지움 [3] (1914)
루이제 학교 [4] (1917~21, 1924 졸업)
마르부르크 대학교 [5] (1924~25)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6] (1925)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7] (1926~29, 1929년 철학박사)
베를린 정치학대학교 [8] (1931~33)
경력 프린스턴 대학교 교수 (1959~63)
웨슬리언 대학교 연구교수 (1961~)
시카고 대학 교수 (1963~67)
사회연구를 위한 새 학교[9] 교수 (1968~)
배우자 귄터 앤더스 (1929~37, 이혼)
하인리히 블뤼허 (1940~70, 사별)
종교 무종교 (무신론)[10]
서명 파일:Hannah_Bluecher-Arendt_signature.svg

1. 개요2. 생애3. 사상4. 주요 저술5. 어록6. 관련 영상7. 여담

[clearfix]

1. 개요

유대계 독일 출신 미국의 정치철학자.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 이론철학가 중 한 사람으로, 고전적 시민 공화주의의 맥락에서 적극적 시민의식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2. 생애

1933년 나치 독일의 유대인 탄압을 피해 파리로 이주하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때문에 1941년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독일 국적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미국 시민권을 따기 전까지 무국적 상태였으며 실제로도 독일 출생이지만 독일 국민이라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유부남이었던 스승과 연인사이였지만 (스승의 부인도 둘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스승이 나치당원이었던 이유로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훗날 스승이 노환으로 앓아눕게되자 스승의 부인이 직접 한나 아렌트에게 편지를 보내 "남편이 임종을 앞두고 당신을 보고싶어한다"며 초청하였고, 한나 아렌트는 그 초청에 응하여 독일로 날아가 스승을 만난 뒤 미국으로 돌아와서는 정작 임종 직전이던 스승보다 본인이 먼저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1960년 나치의 대표 전범으로 유명한 아돌프 아이히만이 약 12년간의 도주 끝에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잡히자 당시 뉴욕에 거주 중이었던 그녀는 기자로서 예루살렘에서 진행된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에 참석하였고, 그곳에서 아이히만을 관찰하면서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으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집필한다. 종전 후 하이데거를 위해 증언하였다.

3. 사상

3.1. 인간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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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대표작인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는 진정한 삶의 가치란 노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행위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본질(목적:telos)은 정치를 하는데에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아렌트는 이 개념을 들고 나와서 '인간이 되기 위한 조건'은 정치적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데에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여기서 아렌트가 말하는 정치란, 정치 행위뿐만 아니라 '타인과 관계맺고 소통하는 일체의 활동'들을 말한다. 즉, 사람들의 정치적 무관심이 나치를 막지 못한 주된 원인이며 공동체 구성원들의 적극적인 정치참여를 통해 나치로 대표되는 전체주의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시대는 시장이 만든 소비사회에서 먹고 살기 위한 노동만으로도 힘겹기 때문에 정치적 무관심이 발생하며, 우리는 이를 경계해야 된다고 아렌트는 주장한다.

3.1.1. 탄생성

“인간은 각자가 탄생함을 근거로 해서 이니티움, 즉 시작이면서 세계로 새로 온 자이기 때문에 스스로 시작하는 자발적 능력을 지니며, 그래서 시작하는 자가 되며,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아렌트는 세계창조설과 연관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니티움”(initium; 시작, 출발)과 “프린키피움”(principium; 태초)의 구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프린키피움”은 요한복음에서 “세계의 시작”을 의미하지만, “이니티움”은 오히려 "시작(출발)으로서의 인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세계가 창조되고난 이후에 인간이 만들어졌다는 점을 아렌트는 주목한다. 인간은 세계와 함께 동시에 창조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는 “세계 안에서 하나의 시작인 이니티움”인 것이다. 모든 인간은 “마치 이 세계가 그와 함께 새로이 발생하듯이” 하나의 시작이며, 이 세계 속에서 인간은 “새로 온 자들”이면서 “낯선 자들”인 것이다. 그래서 아렌트의 인간의 시작(initium)으로서 인간의 탄생은 개별적이고 유일하고 불가역적인 “누군가”의 시작이다.

“탄생성” 덕분에 모든 인간은 우선적으로 “한 번 유일하게 새로운 자"로서 세상에 나타난다. 탄생이라는 사태로 주어진 이 유일성 때문에, 유일한 새로운 것은 마치 모든 인간에게서 다시 신의 창조 행위가 반복되고 증명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인간이 “시작(initium)으로서” 창조되었다면, 그 인간은 최초로 이 세계에서 새롭고 유일한 “누군가”의 시작함이라는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한나 아렌트의 새로운 시작으로서 탄생성은 “아무도 아닌 자” 였던 자가 “왜 도대체 누군가”로 존재해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이것은 "인간은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가"라는 의미를 묻는 물음이며, 이것의 대답은 바로 누군가가 하나의 시작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시작하는 자라는 것이다.

따라서 한나 아렌트의 이러한 탄생성(출생성)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독교 구원과 결부된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인간은 자신의 삶에서 겪는 실수나 실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인간의 실존적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3.1.2. 공공성론

아렌트는 "폴리스(polis) = 공공적 영역, 오이코스(oikos) = 사적 영역"이라 하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사유를 들고나와, 모두가 다 같이 모여서 얘기하고 토론할 수 있는 곳인 공공적 영역을 강조한다. 즉, 공공적 영역이란 정치적 활동이 오고 갈 수 있는 담론의 장소를 뜻하는 것이다. 사회는 담론이 이루어지는 공공적 장소를 중시해야 하며, 이런 공론의 장소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역할을, 정치가나 경제적 시장(market)에게 맡기면 안된다는 것이 아렌트의 주장이다.

그녀는 공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중간에 위치하는 "사회적 영역"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여기에선 사람들이 경제활동을 하거나 결사나 집단을 형성하긴 하지만 정치적 활동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사회적 영역은, 사람들이 "활동(活動)"이라고하는 상호행위를 전개하는 장소가 아닌, 오직 획일적인 행동으로서 생(生)의 욕구를 해소하는 노동의 장소이며, 따라서 정치활동이 벌어지는 공공적 영역과는 엄격히 구별된다. 그렇기 때문에 아렌트는, 공공적 영역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토론과 상호작용을 통해서 이루어진 정치담론은 긍정하였지만, 사회적 영역에서 시장 경제의 요구가 정치에 그대로 입력되는 정치담론에는 부정적 평가를 하였다.

3.2. 악의 평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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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학살을 자행한 나치의 아이히만은 개인적으로는 매우 친절하고 선량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엄청난 학살을 자행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해서 결론을 내린 것이 바로 악의 평범성이다. 즉,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은, 부당한 권위에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그 권위에 동조되어 언제든지 악을 저지를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4. 주요 저술

제목 발간 연도
<colbgcolor=#fff,#1f2023> 그림자
Die Schatten
<colbgcolor=#fff,#1f2023> 미출간[11]
사랑과 성 아우구스티누스
Love and Saint Augustine
1929년[12]
라헬 바른하겐: 유대인 여성의 삶
Rahel Varnhagen: The Life of a Jewess
1957년[13]
전체주의의 기원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1951년
인간의 조건
The Human Condition
1958년
과거와 미래 사이
Between Past and Future
1961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Eichmann in Jerusalem
1963년
혁명론
On Revolution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Men in Dark Times
1968년
공화국의 위기[14]
Crises of the Republic
1972년
정신의 삶[15]
The Life of the Mind
1978년
이밖에 사후에 이미 발표된 글들 및 미발표 원고 등을 주제별로 편집하여 『파리아로서의 유대인』(1978) 『이해에 대한 에세이』(1994), 『책임과 판단』(2003), 『정치의 약속』(2005), 『유대적 저술』(2007), 『문학과 문화에 대한 성찰』(2007) 등이 출간되었다.

아렌트를 대표하는 저서로는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들 수 있다. 이 3권의 책은 전체주의를 분석하고 그 해답으로 서로 다른 차이(다원성)를 가진 인간들을 보존하면서 그들 각각이 '사유'를 통해 정치적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장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 외에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 『공화국의 위기』, 『혁명론』, 『정신의 삶』 등도 중요하다고 평가받는다.

5. 어록

그것은 인간의 사악함에 대한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마치 저 마지막 순간에 그가 요약하고 있는 듯 했다. 무시무시한 교훈, 즉 말과 사고를 거부하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16]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 때 그것은 처벌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절대적인 악이 된다. [17]
나는 이해하고 싶습니다. [18]
정치는 아이를 맡기는 곳이 아닙니다. [19]
무엇이 남았냐고요? 언어가 남았습니다. [20]
아이히만은 전형적인 공무원입니다. 그런데 한 명의 공무원, 그가 정말로 다름 아닌 한 명의 공무원일 때, 그는 정말로 위험한 사람입니다. [21]
나는 하나의 '~주의(ism)'를 떠올리게 할 수 있는 엄격한 정치철학을 가지고 있지 않답니다. [22]

6. 관련 영상

독일어 다큐멘터리

7. 여담

아렌트는 지금까지 소개한 다른 여러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자유를 굳게 신봉했다. 특히 그녀는 표현의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의미 있는 언론을 위해서는 자유를 실천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저널리스트들에게 조언할 것이다. 아렌트는 역사가 바바라 터크만과 마찬가지로 저널리스트에게 창조적인 예술가가 되어, 글에서 의미와 모험을 추구하라고 말할 것이다. 또, 마틴 부버처럼 이러한 예술가들이 도덕적 공동체를 창조하기 위해 서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할 것이다. 아렌트는 저널리스트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타인과 관계를 맺어라. 주위의 악과 계속해서 싸워라. 예술가처럼 쓰고 생각하라. 자유를 존중하고 경계를 뛰어넘어라. 자유와 정의의 이름으로 행동하라.”
아렌트는 저널리스트에게 잘 생각하여 잘 쓰고, 문명과 사회의 안녕을 도모하여 인간으로서 주어진 힘을 최대한 발휘하라고 말하였다.
존 머릴(John Merrill), 철학자들의 언론강의 언론사상사, 185~186쪽.
파일:한나 아렌트.jpg}}}||

[1] 독일어 발음은 '하나 아런트', 미국식 발음은 '해나 어뤤트'로 들린다. # 그러나 한국에서는 관용어로서 '한나 아렌트'로 쓰인다. 그러나 요즘 일부에서 말하듯이 IPA 기호상 n이나 m이 하나라는 이유만으로 이에 ㄴ이나 ㅁ 하나만 대응되게 발음된다고 할 수만은 없다. 영어 단어 중간의 t처럼 일단 음절을 끊어주다보면 후속 음소에 연속적인 영향을 주게 되고 이는 이중자음처럼 들릴 수 있다. '한아'와 '하나', '임아누엘'과 '이마누엘'을 동일한 연음발음으로 여기는 것은 한국어나 한글의 연음규칙을 무리하게 확장한 것이다. 영어에서 저지독일어로, 저지독일어에서 고지독일어권으로 갈수록 '한나'나 '임마누엘'처럼 들리는건 절대 잘못 들리는게 아니다. # 0:25 혹은 0:26 경에 들리는 것은 이마누엘이라기보다 확실히 임마누엘처럼 들린다. # 0:26 경에서도 하나라기보다는 한나에 가깝게 들린다.[2] 한국의 초등학교에 해당. 쾨니히스베르크에 있다.[3] 독일에서 '여자들이 가는 김나지움'을 라이지움(Lyzeum, Lyceum)이라고 부른다. 샤르로텐부르크 라이지움은 베를린에 있다. 당시 세계 1차 대전 때문에 쾨니히스베르크가 러시아의 공격을 받았고, 아렌트의 가족은 베를린으로 잠시 피난왔다.[4] 쾨니히스베르크에 있는 사립 여자 학교. 쾨니긴-루이제 학교라고도 한다. 한국의 중고등학교에 해당. 아렌트는 15세(1921년)에 선생님에게 모욕을 당하자 대들었고 친구들과 함께 수업을 보이콧하다가 퇴학당했다. 이후 아렌트는 1924년 고등학교 졸업 시험(Abitur)을 쳐서 통과했다. 그래서 정상적인 교육 과정을 통한 졸업보다 1년 더 빨리 졸업했었고, 아렌트는 이 사실을 뿌듯해 했다.[5] 1년간 하이데거의 수업을 들었다. 이때부터 아렌트는 유부남 하이데거와 연애를 시작하여 1927년까지 지속했다. 그 후로도 몇번 편지를 주고 받았으나 1933년 하이데거가 히틀러를 지지한다는 얘기를 듣고 실망하여 보낸 편지를 끝으로 17년간 소식이 끊긴다.[6] 한 학기 동안 후설의 강의를 들었다.[7] 야스퍼스의 지도 하에 박사 학위 논문 『사랑과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썼다.[8] 남편 귄터 앤더스가 프랑크푸르트사회연구소에서 논문 승인을 받지 못하자 부부는 1931년 베를린으로 돌아왔고 아렌트는 베를린 정치학대학교를 다니면서 마르크스트로츠키를 접했다. 하지만 1933년, 나치가 집권하자 박해를 피해 프랑스로 망명한다.[9] The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 #[10] 한나는 무신론자였다. (사만다 로즈 힐 『한나 아렌트 평전』 전혜란 옮김, 혜다, 2022, p.24)[11] 1924년에 썼지만, 출간하지 않았다.[12] 아렌트의 박사학위논문을 책으로 펴낸 것으로, 1933년 프랑스 망명길에 오르며 한 권을 챙겼으나, 프랑스 파리에서 욕조에 빠뜨리고 말았다. 다행히 게르솜 숄렘에게 사본을 보낸 사실을 기억해냈다. 숄렘은 한나의 부탁을 받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책을 돌려주었다.[13] 원래 교수자격논문으로 1930년에 쓰기 시작했지만 나치의 박해로 글쓰기를 멈췄다가 프랑스로 망명한 후 1938년에 원고를 완성했다. 하지만 프랑스마저 나치에 의해 위태로워지자 1941년 급하게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원고를 잃어버리게 된다. 하지만 사촌 에른스트의 아내 케테 퓌르스트가 전쟁 발발 전 팔레스타인으로 갈 때 한 부를 챙겨둔 덕분에 1945년 이 원고를 다시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본을 가지고 1957년에야 드디어 책으로 출간한다. 따라서 이 책은 연대기적으로 봤을 때 『전체주의의 기원』보다 13년이나 앞선 책이다.[14] 세편의 에세이로 구성되어 있다. 1 정치에서의 거짓말 2 시민불복종 3 폭력론[15] 책을 마무리하기 직전에 아렌트가 사망해서, 사후에 출간되었다. '사유', '의지', '판단'의 3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판단'편은 『칸트 정치철학 강의』에 해당한다.[16] 원문은 "It was as though in those last minutes he was summing up the lesson that this long course in human wickedness had taught us - the lesson of the fearsome, word-and-thought-defying banality of evil."[17] 원문은 "When the impossible was made possible it became the unpunishable, unforgivable absolute evil." 『전체주의의 기원 (1951)』의 결말 부분에 나오는 말이다. 전체주의가 '개인의 자발성(individuality)'을 제거하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듬으로써 절대적인 악이 된다는 의미다.[18] 원문은 "Ich will verstehen." 1964년 귄터 가우스와의 텔레비전 대담에서 아렌트가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간단히 표현하면서 한 말이다.[19] 원문은 "For politics is not like the nursery."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에필로그에 나온다. 거대한 범죄를 수행한 것에 대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변명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면서 한 말이다.[20] 원문은 "What remains? The language remains." 귄터 가우스가 2차 대전 이전의 유럽을 그리워 하냐? 전쟁 이후에 무엇이 남았냐? 고 물어보자, 한나 아렌트가 대답하면서 한 말이다. 전쟁 이전을 그리워 하지도 않으며, 남은 것은 모국어(독일어)밖에 없다는 얘기.[21] 원문은 "Er war der typische Funktionär. Und ein Funktionär, wenn er wirklich nichts anderes ist als ein Funktionär, ist wirklich ein sehr gefährlicher Herr." 요아힘 페스트와의 라디오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타인에 대한 생각 없이) 공무원의 업무에만 충실하다보면 위험한 범죄를 저지르는 업무를 맡아도 죄의식 없이 그것을 행하게 된다는 의미다.[22] 원문은 "I have no exact political philosophy which I could summon up with one ism." 1973년 로저 에레라와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에레라가 자유주의(Liberalism)에 관해 물어보자, 아렌트는 자신은 어떤 신조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리버럴(liberal)인지 확신할 수 없다고(리버럴이 아니라고는 안함, 확신할 수 없다고만 함) 말하면서 한 말.[23] 귄터 앤더스과 결혼. 하지만 아렌트는 훗날 그 결혼에 사랑이 없었다고 밝혔다.[24] 실제로 아렌트는 담배로 인해 말년에 가면 뇌경색과 심장병을 심하게 앓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담배를 계속 피워댄터라 결국 심장병이 악화되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