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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8 00:13:23

천주교 평양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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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천주교 상징.svg 한국천주교 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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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대교구
※ 위 첨자: 침묵의 교회
천주교 평양교구
Diocese of Pyeongyang
Dioecesis Pyeongyangensis
파일:external/py.catholic.or.kr/py-logo.png
형태 <colbgcolor=#FFFFFF,#191919>가톨릭 교구
국가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명목상)

[[북한|]][[틀:국기|]][[틀:국기|]] (실질적)
특이사항 침묵의 교회
관구 서울관구
교구장 (서리) 정순택 베드로
교구장 (서리대리) 장긍선 (예로니모) 신부
주교좌 관후리주교좌성당
(평안남도 평양시 관후리 251번지)
교구청 소재 서포성당
(평안남도 대동군 임원면)
홈페이지 천주교 평양교구
파일:external/www.catholicnews.co.kr/11270_27348_475.jpg
{{{#FFFFFF 평양의 [[장충성당|장충성당]]}}}[1]

1. 개요2. 관할 본당3. 역사
3.1. 역대 교구장3.2. 약사 (略史)
4. 기타

[clearfix]

1. 개요

평양교구는 평안남도평안북도를 관할하는 한국 가톨릭 교구이다. 그러나 현재 북한은 실질적으로 종교의 자유가 없는 땅이기에 침묵의 교회로 존재하며, 평양교구장은 대한민국서울대교구장이 겸직한다.

현실적으로 유효한 교구가 아니기에 교구장이 아닌 교구장 서리로 불리는데, 행정부로 치면 권한대행을 말한다. 예전에는 행정부에서도 서리라는 표현을 쓰다가 권한대행 혹은 직무대행으로 바뀐 것.

2022년 기준 평양교구장 서리는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이다. 2022년 9월 14일자로 평양교구 후원회 담당 겸 교구장 서리 대리로 장긍선 예로니모 신부를 임명했다.

2. 관할 본당

3. 역사

3.1. 역대 교구장

이름 임기 비고
1대 패트릭 제임스 번(파트리치오, Patrick James Byrne)[2] 주교 1927년 1월 ~ 1929년 8월 초대 지목구장[3]
2대 존 에드워드 모리스(요한, John Edward Morris)[4] 몬시뇰 1930년 4월 ~ 1936년 7월 2대 지목구장
3대 윌리엄 부스(굴리엘모, William R. Booth)[5] 1936년 9월 ~ 1938년 10월 지목구장서리
4대 윌리엄 오셰이(굴리엘모, William O'Shea) 주교[6] 1938년 10월 ~ 1942년 1월 초대 대목구장
5대 노기남 바오로 주교 1942년 1월 ~ 1943년 3월 대목구장 서리
6대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 1943년 3월 ~ 1950년 10월 2대 대목구장[7]
7대 조지 캐롤(제오르지오, George M. Carroll) 몬시뇰 1950년 11월 ~ 1975년 6월 교구장 서리
8대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1975년 6월 10일 ~ 1998년 4월 3일
9대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 1998년 4월 3일 ~ 2012년 6월 25일
10대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 2012년 6월 25일 ~ 2021년 12월 8일
11대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2021년 12월 8일 ~ 현재

3.2. 약사 (略史)

교황 비오 11세는 1927년 3월 서울대목구로부터 평안남북도 일원을 관할하는 하는 평양지목구를 분리·설정하였다. 1944년 한국천주교회 교세통계에 따르면, 당시 평양교구는 본당 19개, 공소 106개, 교육기관 22개, 복지기관 17개를 운영하였으며 신자 수는 2만 6400명에 달했다. 1931년에는 서포성당에 교구청을 새로 지어 특이하게 주교좌본당과 교구청이 분리되었다.

메리놀 외방전교회 미국인 선교사들이 교구의 기초를 닦았으나 1942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에 의해 추방되었다. 그 후 1943년 홍용호 주교가 노기남 주교에 이어 2번째 한국인 주교로서 평양교구장에 임명되었다.
해방 당시 북한지역에는 주교 3명, 성직자 80여 명, 수도자 180여 명이 본당 사목뿐 아니라 유치원과 학교, 병원, 양로원과 고아원을 운영하는 등 교육ㆍ의료ㆍ복지 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1944년 한국교회 교세통계에 따르면 당시 북한 지역 신자수는 모두 5만 7천여 명으로, 당시 한국 천주교 전체신자 수 17만 9114명 중 31.8%에 해당했다.
그러나 1948년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서 교회가 운영하던 시설들을 몰수하는 등 조치를 취하자 북한교회는 환난을 겪었다. 1949년 5월 평양교구장 홍용호 주교가 납치되었고, 이후 다른 많은 성직자들과 수도자들도 체포되거나 행방불명되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는 사제가 1명도 없었고 교회 재산은 모두 몰수되었다.

관후리주교좌본당 자리에는 현재 평양학생소년궁전이 들어서 있다. 현재 평양과 함흥 교구 관할 지역은 로동당 통일전선부에서 각 종교 마다 조직한 어용 종교 단체 중에서 조선 톨릭교협회에서 담당한다고는 하는데, 대외활동조차 없어서 실체가 존재하긴 하는지 의심되는 단체이다.

4. 기타

월남한 평양교구 사제 및 신학생들은 1970년까지는 명목상 평양교구에 속하였고 평양교구 명의로 서품식도 있었지만[8], 1970년 이후에는 모두 서울대교구로 편입하였다.

2009년부터 평양교구 명의로 신학생을 다시 선발하기 시작했다. 평양교구 소속 신학생은 서울대교구장이 선발하며 학부는 인천가톨릭대학교[9], 석사는 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에서 수학한다. 이 신학생들이 사제가 되면 서울대교구에서 임시로 사목활동을 하다 북한 지역에서 사목활동이 가능해지면 평양교구로 가장 먼저 파견된다. 이후 2009년서부터 후일 평양교구에 지원할 신학생들을 선발하였고, 2016년에 이르러서 김용찬 사도 요한 신부가 서품되었다.


[1] 그러나 교황청에서 장충성당을 천주교 성당으로 인정한 적이 없으며, 한국 천주교에서도 역시 한국인 사제의 미사 집전을 불허하고 있다.[2] 한국어명 '방일은(方溢恩)'.[3] 1888년 10월 26일 미국 워싱턴 D.C. 출생. 4대 광주대교구 지목구장이었으며, 1949년 6월 14일 주교로 수품하였다. 한국 전쟁조선인민군에 의해 피랍된 후 피살된 것으로 추정된다.[4] 한국어명 '목이세(睦怡世)'.[5] 또 다른 표기는 '윌리엄 부드'. 한국어명 '부문화(夫文化)'.[6] 또 다른 표기는 '윌리엄 오셰아'.[7] 북한이 공산화된 후 1949년 5월 평양노동교화소에 수감되었다. 그후 1950년 10월 한국전쟁 중 국군이 평양을 수복하기 전에 북방으로 이송되었고 그 후 생사여부는 알 수 없다.[8] 교적이 평양교구에 있던 월남자만 가능했던 것인지, 현 체제처럼 서울대교구 안의 지원제였는지는 불명이다.[9] 서울시내 대학 정원 제한에 막혀서 성신캠퍼스의 정원을 늘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