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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23세 | 바오로 6세 | 요한 바오로 1세 | 요한 바오로 2세 | 베네딕토 16세 | ||||||
제266대 | ||||||||||
프란치스코 | }}}}}}}}}}}} |
가톨릭 교회의 교황 | ||||
제249대 클레멘스 14세 | → | 제250대 비오 6세 | → | 제251대 비오 7세 |
<colbgcolor=#ffe100><colcolor=#670000> | |
교황명 | <colbgcolor=#FFFFFF,#1F2023>비오 6세 (Pius VI) |
본명 | 조반니 안젤로 브라스키 (Giovanni Angelo Braschi) |
출생 | 1717년 12월 25일 |
교황령 체세나 | |
사망 | 1799년 8월 29일 (향년 81세) |
프랑스 제1공화국 발랑스 | |
재위기간 | 1775년 2월 15일 ~ 1799년 8월 29일 (24년 167일) |
문장 | |
서명 |
[clearfix]
1. 개요
가톨릭의 제250대 교황. 그의 치세는 프랑스 혁명기와 겹친다.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군대에 납치되어 그곳에서 사망했다. 비오 6세의 사망 당시를 기준으로 베드로를 제외한 역대 교황들 가운데서 가장 오래 재위한 교황이었다. 또한 전임 교황 클레멘스 14세와 더불어 바티칸 미술관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이기도 하다.2. 교황 선출
비오 6세는 법학을 전공해 교회법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교황청에서 공직을 맡아 재정을 담당했다. 1771년 교황 클레멘스 14세에 의해 추기경이 된 후, 4년 뒤에 열린 콘클라베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비오라는 이름은 성 비오 5세 이후 203년만에 사용된 이름으로, 비오 6세 다음 교황부터 비오 12세까지 183년간(연속으로는 130년간) 10명의 교황 중 6명의 교황이 '비오'를 교황명으로 채택하였다. 흥미롭게도 대다수가 장수 교황이었으며, 전통을 수호하는 보수적인 성향이 강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까지 200년 동안의 시대, 곧, 비오 교황으로 상징되는 보수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3. 프랑스 유배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교황은 혁명이 기존의 사회질서를 무너뜨리고 혼란을 초래할 것이라 생각해 혁명으로 추방된 귀족과 성직자들을 받아들이는 등 혁명에 대해 비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분열을 우려하여 공식적으로 혁명 정부를 비난하지는 못하고 있었다.프랑스의 성직자들 입장에서 혁명 공화국을 받아들이는 것은 꽤 복잡한 문제였는데, 일반 백성들의 삶에 가까웠던 지방의 성직자들은 혁명의 초기 과정에 참여하기까지 했으나, 고위 성직자들은 그런 입장이 아니었다.[1] 여기에 정교분리를 추구한 프랑스 혁명정부가 교회법을 정면으로 무시한 각종 법령을 시행해 성직자를 교황청이 아닌 프랑스 국가에 종속시켜 관계는 더욱 경색되었다.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비오 6세는 빠른 결정을 내려 프랑스의 성직자들을 단합시켜야 했으나 그 판단이 늦었다. 결국 교황은 1791년에서야 공화국 헌법을 비난하고 이에 선서한 성직자들을 파문했지만, 이미 대부분의 성직자[2]들이 선서한 뒤였고, 프랑스 교회는 분열되어 버린다. 이 와중에 프랑스 국내에 남아 있던 신자들과 성직자들, 수도자들 중에서 교황의 뜻을 따라 신앙을 지켰던 사람들은 혁명 정부의 공포정치에 의해 단두대로 처형당하기도 했다. 훗날 1900년대 초반 교황청에선 이들 중 일부를 순교자로 인정해서 시복하기도 했다.
결국 1796년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3]이 교황령을 공격해 이탈리아 북부의 교황령을 상실했고, 급기야 1799년에는 교황이 나폴레옹의 군대에 납치되기에 이른다. 포로가 된 비오 6세는 프랑스 여러 곳으로 끌려다녔고 1799년 8월 29일 감금당한 발랑스에서 최후를 마쳤다.
4. 한국 천주교와의 인연
프랑스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시절, 비오 6세는 단 한 사람의 선교사도 들어간 적이 없는 조선 땅에서 가톨릭 교회가 스스로 자라났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그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비상금 얼마를 털어 카펠라리 추기경, 곧, 훗날의 그레고리오 16세에게 전해주었다. 그리고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한국 가톨릭의 기적[4]을 떠올리며 마음을 추스렸다고 한다.[5] 다만 제사를 금지하는 바람에 막대한 사회적 갈등과 대탄압의 불씨가 되었다.이 인연 때문인지 후대의 교황들은 조선에 꾸준히 선교사제를 파견시켜 가혹한 탄압 속에서도 교회 공동체를 유지하게 했으며, 탄압에서 해방된 뒤에도 지속적으로 한반도에 관심을 가졌다.
5. 사망 후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 묘지에 있는 비오 6세의 석관 |
시신은 방부 처리되었지만 교황의 매장을 놓고 교황청과의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나폴레옹 때문에 매장되지 못하다가 사망한 지 3년 만에야 로마로 귀환해 교황 비오 7세의 집전으로 1802년 2월 19일에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 묘지에 안장되었다. 이후 1949년 교황 비오 12세가 비오 6세의 시신을 지하 묘지 내의 석관으로 이장했다.
[1] 거기다 고위 성직자들은 혁명으로 타도해야 할 대상인 고위 귀족들과 연이 깊었다.[2] 여기에는 그 탈레랑도 포함되어 있었다.[3] 정확히 말하면 총재정부의 명령을 받은 루이 알렉상드르 베르티에가 로마를 점령하고 로마공화국을 세웠다.[4] 과장이 아니라 당시 교황청 입장에서 보기엔 정말로 기적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도 모르던 사람들이 갑자기 '공부'해 본다고 성경을 읽고, 사제직이 정확히 뭔지도 모른 채 자기들끼리 신부를 뽑고 전례를 거행하며 신앙 공동체를 만든다니, 그야말로 "예수님이 극동에 재림하셨다"고 여기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물론 신자들의 공동체에서 임의로 사제를 뽑는다는 것은 교회법상으로 파문에 해당되는 일이었지만 애초에 조선인들은 예수가 누군지도 몰랐다. 이후 신자들도 이러한 사실을 알아차린 뒤 부랴부랴 베이징 교구에 신부의 파견을 요청하여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입국하는 조치가 취해졌다는 것 등을 감안하여 경고 조치에 그쳤다고 한다.[5] 비오 6세의 교황 재위 시기는 아비뇽 유수를 시작으로 수백년 동안 헨리 8세의 성공회 설립을 인정하는 수장령,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으로 시작된 개신교 분파, 카를 5세의 샤코 디 로마 등 교황권이 완전히 무너지다가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개인의 종교 자유를 인정하며 바티칸과 가톨릭의 안정을 도모하던 시기였으나 프랑스 혁명으로 인하여 등장한 나폴레옹의 공격으로 교황인 본인이 프랑스로 유배되는 등 비오 6세에게는 개인의 능력만으로는 저항할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이 몰아치며 고통받던 시기였다. 그러던 와중에 조선의 자생적인 가톨릭 공동체 이야기는 성서에서 나오는 기적과도 같았고 비오 6세에게는 고단한 교황 생활에서 자신을 지탱해주는 신앙의 증거와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