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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40000><colcolor=#ffffff> 정의의 곤팔로니에레 • 느무르 공작 줄리아노 디 로렌초 데 메디치 Giuliano di Lorenzo de' Medici | |
출생 | 1479년 3월 12일 |
피렌체 공화국 피렌체 | |
사망 | 1516년 3월 17일 (향년 37세) |
피렌체 공화국 피렌체 | |
재임 | 정의의 곤팔로니에레 |
1513년 3월 9일 ~ 1516년 3월 17일 | |
배우자 | 사보이아의 필리베르타 (1515년 결혼) |
자녀 | 이폴리토 |
아버지 | 로렌초 데 메디치 |
어머니 | 클라리체 오르시니 |
형제 | 루크레치아, 피에로, 마달레나, 콘테시나 베아트리체, 조반니, 루이사, 콘테시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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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의 귀족이자 느무르 공작.2. 생애
큰형인 피에로 디 로렌초 데 메디치의 무능한 통치로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에서 쫓겨나면서 1512년까지 유럽을 떠돌아다녔으며, 피렌체에서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처형되는 등의 사건이 일어난 이후에 형인 교황 레오 10세가 스페인의 신성동맹을 등에 업으면서 스위스 용병으로 메디치 가문의 복권과 피에로 소데리니의 사임을 요구해 그 조건이 성사되자 1512년 9월 1일에 피렌체에 돌아왔다.피렌체로 와서 겸손하게 처신해 피렌체의 보통 시민이 되고 싶다면서 정치에 관심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궁이 아닌 안톤프란체스코 델리 알비찌의 집을 방문했다고 하며, 프랑스 왕국의 프랑수아 1세가 10만명에 가까운 군사로 알프스를 건너 피에몬테로 행군해 교황 레오 10세가 동맹을 맺은 스페인, 스위스의 군대를 격파한 후 협상을 통해 파르마, 피아첸차의 항복을 받자 그 보답으로 느무르 공작이 되었으며, 1515년에 사보이아 공국 공작 카를로 2세의 누이 필리베르타와 결혼했다.
메디치 궁에서 결핵을 앓다가 피에졸레로 이송되었다가 교황 레오 10세가 자신이 망명할 때 언제나 친절했던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라 로베레를 축출하려는 것을 알아 그 뜻을 거두어달라고 요청했지만 무시되었다고 하며, 1516년 3월 17일에 사망했다.
3. 여담
고아원을 운영하고 예술가를 지원하였기 때문에 토스카나 지방에서는 그의 선행을 기반으로한 민담이 많이 전승되고 있다. 그러나 부인인 필리베르타와의 사이에서는 불화가 심했다고 하며 필리베르타는 폴라니 대공을 비롯한 의상사인 죠쉐, 폴바 등과 공공연히 불륜 관계를 맻었다고 전해진다. 이를 풍자한 민속극이 그 유명한 페라구이정원의 정원사(Giardiniere presso il Giardino Peragui)이다.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그에게 헌정해 자신을 공직에 발탁해줄 것을 청하려고 했는데 이후 마음을 바꾸어 로렌초 2세 데 메디치 에게 헌정했다.[1]
줄리아노의 묘에 있는 그의 조각상 | 줄리아노 조각상의 석고 복제본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