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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ime I de Aragón | ||
Jaume el Conqueridor | ||
가문 | 바르셀로나 왕조 | |
출생 | 1208년 2월 2일 | |
몽펠리에 | ||
사망 | 1276년 7월 27일 (향년 68세) | |
아라곤 왕국 발렌시아 | ||
재위 기간 | 아라곤 왕국 국왕 | 1213년 ~ 1276년 |
아버지 | 페로 2세 | |
어머니 | 몽펠리에의 마리 | |
배우자 | 카스티야의 레오노르 (1221년 결혼/1230년 무효화) | |
헝가리의 욜란 (1235년 결혼/1251년 사망) | ||
비두레의 테레사 | ||
자녀 | 알폰소, 욜란다, 콘스탄사, 페로 3세,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 페르난도, 산차, 이사벨라, 마리아, 산초, 레오노르, 하이메, 페드로, 페드로 산체스(사생아), 페드로 페르난데스(사생아), 하이메 사로카(사생아) | |
종교 | 기독교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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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라곤 왕국 제9대 국왕.왕호는 스페인어로는 '하이메 1세', 아라곤어로는 '차이메 1세'이다.
2. 생애
1208년 2월 2일 몽펠리에에서 아라곤 국왕 페드로 2세와 몽펠리에 백작 기욤 8세의 딸 마리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그의 이름은 12사도 중 한 사람인 대 야고보를 본떠 지어졌다. 페드로 2세와 마리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를 아들의 후견인으로 삼았다. 1213년 아버지 페드로 2세가 뮤레 전투에서 시몽 4세 드 몽포르[1]의 군대에 참패하여 목숨을 잃었다. 이때 하이메는 아버지의 군영에 머물렀다가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이 소식을 접한 어머니 마리는 아라곤 왕국의 궁재 시메노 코르넬 1세, 아라곤 왕국에 있는 성전 기사단의 기사단장 기욤 드 몽트레돈 등으로 구성된 사절단을 로마에 보내 시몽이 아들을 돌려주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인노첸시오 3세는 피에트로 디 베네벤토를 파견해 시몽에게 아이를 몽펠리에로 돌려보내라고 요구했다. 시몽은 즉각 동의했고, 1214년 4월 18일에서 25일 사이에 어린 하이메를 특사에게 넘겼다. 이후 교황 특사단은 하이메와 함께 아라곤 왕국으로 가서 아라곤과 카탈루냐 귀족들의 영접을 받았다. 1214년 8월 중순 레리다에서 열린 귀족 회의에서, 팜플로나 주교인 아스파레그 데 라 바르카는 모두를 대표하여 하이메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그러나 세르다냐의 산초 1세와 전 아라곤 국왕 알폰소 2세의 셋째 아들 페르난도는 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하이메의 어머니 마리는 아들과 재회하지도 못한 채 1213년 4월 21일 사망했다. 그녀는 죽기 전에 성전 기사단장 기욤 드 몽트레돈을 아이의 가정교사로 삼고 교황 특사에게 섭정을 맡기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에 따라 아라곤 왕국의 섭정으로서 국정을 도맡게 된 피에트로 디 베네벤토는 먼저 유대인 아이작에게 아라곤 왕국과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들과의 평화 협약을 맡겼다. 이것이 성사된 후, 피에트로는 정식으로 아라곤 왕국의 섭정을 맡을 이를 모집했다. 그 결과 1214년 11월 로셀로, 프로방스, 세르다냐 백작 산초 1세가 섭정에 선임되었다. 하이메의 삼촌이며 몬테아라곤 성의 수도원장이었던 페르난도는 자신이 왕의 가장 가까운 혈육이니 마땅히 섭정이 되어야 한다며 이의를 제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216년 1월 23일,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어린 왕을 보좌할 위원회를 조직했다. 이 위원회에는 타라고나 대주교 가르시아 프론틴 1세, 세메노 코르넬 1세, 팜플로나 주교를 맡다가 타라고나 대주교로 승진한 바르카의 에스파라고스, 카르도나 자작 기욤, 기욤 드 몽트레돈 등 아라곤과 카탈루냐의 유력 귀족들이 참가했다. 이들은 섭정을 맡은 산초 1세에게 조언을 해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산초 1세는 뮤레 전투의 패배를 복수하고 피레네 산맥 북부의 옥시타니 지역에 대한 아라곤 왕국의 지배력을 강화하고자 군대를 그곳으로 파견해 시몽에 맞서는 툴루즈 백작 레몽 6세를 도왔다. 그러나 시몽 4세 드 몽포르에게 연이어 패해 오히려 많은 영역을 상실한 데다 새 교황 호노리오 3세가 카타리파 십자군을 자처한 시몽을 지지해 교황청과 아라곤 왕국의 사이가 나빠졌다. 몬테아라곤 성의 수도원장 페르난도는 이 때를 틈타 교황과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기를 원하는 귀족들을 자기 편으로 끌여들어 산초 1세에 대적했다.
1217년 12월 28일과 29일, 호노리오 3세는 두 개의 교령을 반포해 아라곤 국왕 하이메 1세와 섭정 산초 1세를 각각 파문하며, 그들이 카타리파의 수괴로 규탄받는 레몽 6세를 계속 돕는다면 그들의 영역에 대한 십자군을 승인하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대내외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산초 1세는 1218년 9월 섭정에서 물러난 뒤 프로방스 백국으로 이동했다. 이후 1219년 타라고나 대주교 가르시아 프론틴 1세가 이끄는 새로운 왕립 평의회가 수립되어 하이메 1세 대신 국정을 돌봤다.
1220년, 소몬타노의 영주 로드리고 데 리카나가 사소한 실수를 저지른 기사 로페 달베로를 체포해 리카나 성에 가둬버린 뒤 로페가 다스리던 알베로 성을 약탈했다. 로페의 사위인 펠레그린 다트로실로는 아라곤 왕국의 수도 우에스카에 이 사실을 고발했고, 가르시아 프론틴 1세가 이끄는 왕립 평의회는 로드리고 데 리카나에게 로페를 즉시 석방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로드리고는 이를 따르기를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1220년 5월 토벌대가 리카나 성을 포위해 수 개월간 맹공을 퍼부은 끝에 공략에 성공하고 로데 달베로를 석방시켰다. 이후 토벌대는 로드리고 데 리카나가 피신한 알바라시 영주령으로 향했다. 이후 2달간 공방전이 이어졌지만, 토벌전에 참여했던 귀족들이 중앙 정부의 권력이 지나치게 강해질 것을 우려해 로드리고와 내통하는 바람에 공략에 실패했다. 그 후 왕립 평의회는 알바라시 영주 페로 페르난데즈와 로드리고가 왕에게 사죄하고 왕은 두 사람을 용서하는 형식으로 마무리하기로 했다.
1221년 2월 6일, 하이메 1세는 13세의 나이에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의 딸 레오노르와 결혼했다. 이로써 하이메 1세의 입지가 다져지는 듯했지만, 1222년 중반 몽카다 백작 기욤 2세가 하이메 1세의 사촌이자 아라곤 왕국의 전 섭정 산초 1세의 아들인 누누 산체스의 영지 일부를 침탈하고 1223년 양자간의 전쟁이 벌어지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하이메 1세는 누누 산체스를 돕기 위해 귀족들을 소집했다. 그러나 왕을 따라 프로방스로 향한 귀족들은 몽카다 백작 기욤 2세와 내통하여 왕을 배신하기로 마음먹었다. 심지어 누누 산체스 마저 그들에게 회유되어 왕을 배신하기로 했다.
하이메 1세는 긴밀히 아뢸 이야기가 있으니 알라곤(Alagón)에서 만나자는 누누 산체스의 요청을 별 의심없이 받아들이고 그곳으로 향했다. 그는 귀족들에게 대다수 병력을 알라곤 인근 마을에 머물게 하고 4~5명의 기사만 거느리고 알라곤에 들어오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그날 밤 누누 산체스는 400명의 기사와 함께 알라곤에 몰려든 귀족들을 들여보냈고, 하이메 1세는 순식간에 레오노르 왕비와 함께 체포되었다. 귀족들은 왕의 눈과 귀를 흐리게 하는 질나쁜 조언자들로부터 왕을 분리시키기 위해 취한 조치라면서, 왕과 왕비를 사라고사 인근의 수다 성으로 이송시켰다. 그 후 1년간 연금되던 그는 20,000 모라베틴(morabetin)을 몸값으로 지불하고 나서야 풀려났다. 타라고나 대주교 가르시아 프론틴 1세는 이 일로 실각했고, 오랫동안 권력에 눈독을 들였던 몬테아라곤 성의 수도원장 페르난도가 실권을 잡았다.
1225년, 당시 17세였던 하이메 1세는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무슬림들이 지배하고 있던 페니스콜라 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귀족들이 소집령에 응하지 않는 바람에 병력이 충분하지 않아 공략에 실패했다. 1226년 다시 발렌시아 원정을 계획했지만 귀족들이 이번에도 소집 명령에 응하지 않자 원정을 취소했다. 하지만 아라곤 국왕의 위협적인 행동에 부담을 느낀 발렌시아 타이파 자이드 아부 자이드는 아라곤 왕국과 휴전을 맺는 대가로 발렌시아와 무르시아에서 얻은 수입의 1/5를 매년 지불하겠다는 협약을 제시했고, 하이메 1세는 이를 받아들였다.
1227년 초, 실권자 페르난도가 왕이 자이드 아부 자이드와 맺었던 휴전 협약을 파기하고 공세를 벌이려 하는 것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번에는 많은 귀족들이 전횡을 일삼은 페르난도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기에, 하이메는 병력을 원활하게 확보한 뒤 페르난도를 몰아붙였다. 그러던 중 교황 호노리오 3세가 파견한 사절의 중재에 따라, 양자는 1227년 3월 22일 알칼라 협약을 체결했다. 페르난도를 비롯한 반란 귀족들은 왕에게 용서를 구해 사면을 받고 앞으로는 왕을 위해 싸우기로 맹세했으며, 교황청은 무슬림과의 전쟁에 앞장서겠다고 서약한 하이메 1세의 권위를 인정했다.
1228년 우르헬 백작 에르멘골 8세가 딸 아우렘비아이스(Aurembiaix)를 남긴 채 사망했다. 그러자 카브레라 백작 게라우 4세가 "여자는 영지를 상속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우르헬로 쳐들어가서 그녀를 축출했다. 아우렘비아이스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은 하이메 1세는 "충직했던 가신의 자녀를 보호하고 군주의 허락없이 영지를 빼앗은 부덕한 신하를 정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게라우 4세를 공격했다. 게라우 4세는 바르셀로나 백작과 손을 잡고 대항했지만 패배한 뒤 다시는 이웃 영지를 무단으로 침략하지 않고 왕에게 복종하겠다는 서약서를 작성해야 했다. 이후 아우렘비아이스는 레리다를 아라곤 왕국에 넘기는 대가로 우르헬 여백작이 되었다.
1229년 9월 5일, 하이메 1세는 155척의 전선과 1,500명의 기병, 15,000명의 보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마요르카 공략에 착수했다. 이 작전에 참여한 병사 대부분은 카탈루냐인이었다. 원정군은 9월 7일 마요르카 섬의 해안지대인 팔로메라와 드래고네라에 상륙한 뒤 9월 10일 산타 폰사 전투와 9월 12일 포르토피 전투에서 무슬림군을 격파했다. 이후 마요르카 섬의 주도인 마드나 마요르카를 석달간 포위 공격한 끝에 12월 31일에 함락시켰다. 이후 카탈루냐에 살던 주민들을 마요르카 섬에 이주시키고 가톨릭 주교구를 설립해 마요르카 섬을 단시일에 기독교화시키고자 노력했다.
1231년 6월 17일, 하이메 1세는 메노르카 섬의 지도자 아부 아브드 알라 무함마드와 카프데페라 협약을 체결했다. 그는 이 협약에서 무함마드가 섬을 계속 점유하는 것을 허용하되 자신에게 공물을 바치게 했다. 이후 1235년 야비차와 포르멘테라를 정복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이 소식에 기뻐하며 두 도시를 정복한 카탈루냐 원정대에게 십자군 칭호를 수여했다. 또한 1232년부터 발렌시아 토후국을 상대로 공세를 펼친 끝에 1238년 9월 28일 마침내 발렌시아 공략에 성공하고 수도를 우에스카에서 발렌시아로 이전했다. 다만 발렌시아 공방전 도중 아라곤 사령관이며 하이메 1세의 사촌인 베르나트 굴렘 1세 엔텐사가 전사하는 등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아라곤 왕국의 지배에 놓이게 된 발렌시아 무슬림들은 자신들을 차별대우하고 개종을 강요하는 것에 반감을 품었다. 1244년, 그들은 알 아즈라크의 지휘 아래 반란을 일으켰다. 알 아즈라크는 반란을 일으킨 직후 암브라 성, 알칼라 성 등을 공략했고, 이듬해에는 사티바, 데니아, 알리칸데 성을 공략했다. 여기에 아라곤 왕국이 지나치게 강성해지는 것을 우려한 그라나다 술탄국이 반란을 지원했고,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0세 역시 이베리아 반도의 경쟁자인 아라곤 왕국의 약화를 노려 반란을 지원했다.
게다가 하이메 1세가 "십일조를 면제해줄 테니 무슬림을 추방하라"는 교황 클레멘스 4세의 압력에 굴복해 아라곤 왕국의 모든 영토에서 무슬림을 추방하는 칙령을 내린 뒤 추방된 이들 상당수가 반군에 합류하면서, 반란 진압은 더욱 힘들어졌다. 하이메 1세는 반란 진압을 위해 루첸테 성을 포위 공격하다가 적의 매복에 걸려 죽을 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했다. 그동안 알 아즈라크는 베니카델 성을 공격했으나 수비대의 결사적인 항전을 뚫지 못하고 철수했다. 이후 양자는 잠정적으로 휴전 협약을 맺기로 합의했다.
1248년 하이메 1세가 세비야를 포위하고 있던 카스티야 왕국을 돕기 위해 일부 병력을 파견하자, 알 아즈라크는 이때를 노려 아라곤 왕국과의 전쟁을 재개했다. 전쟁 초기에는 알 아즈라크가 아라곤 왕국의 정복지를 모조리 탈환할 기세로 몰아붙였지만, 전열을 재정비한 아라곤 왕국군의 거센 반격으로 차츰 밀렸다. 1251년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0세의 중재에 따라 휴전을 맞고 수년간 불안한 평화를 이어갔다. 그러던 1258년 알 아즈라크의 고문이 성에 저장되어 있는 곡물들을 하이메 1세에게 모조리 팔고 황금을 잔뜩 챙기는 사건이 벌어졌고, 하이메 1세는 적이 식량 궁핍에 빠진 틈을 타 공세를 개시했다. 그 결과 알리칸테의 플레인, 페고, 카스텔 드 카스텔스를 공략했다. 그 후 알 아즈라크는 항복했고, 알칼라, 임브라, 데니아, 알리칸데 등 나머지 요새들을 넘긴 뒤 추방되었다. 이후 하이메 1세는 그곳에 사는 무슬림들을 모조리 몰아내라는 교황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그들을 개종시키는 데 힘을 기울였다.
한편, 하이메 1세는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와 코르베유 조약을 체결해 피레네 산맥 이북의 옥시타니아 영지를 몽펠리에, 칼라데스, 오멜리스를 제외하고 프랑스 왕국에 양도하기로 했다. 그는 아라곤 왕국이 그 지역에서 통치력을 행사하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라고 여겼고, 프랑스 왕국과 공연히 전쟁을 벌이는 것을 피하고 무슬림과의 전쟁에 집중하고 싶었기에 이 조약을 맺었다. 그러면서도 프랑스 왕국이 카탈루냐에 대한 어떠한 주권을 행사하는 것을 포기하게 했다.
1264년, 카스티야 왕국의 속국이었던 무르시아의 무슬림들이 그라나다 술탄국의 지원을 받아 카스티야 왕국에 반란을 일으켰다. 카스티야 왁국의 지원 요청을 받은 하이메 1세는 귀족들을 소집했다. 아라곤 귀족들은 어떤 종류의 보상도 없이 카스티야를 돕기 위한 군사 작전에 참여하기를 거부했지만, 카탈루냐 귀족들은 잠시 주저한 끝에 왕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이메 1세의 아들 페드로가 이끄는 카탈루냐군은 무르시아로 진격해 반란군 지도자 무함마드 이븐 후드 비하 알 다울라를 격파하고 그라나다군을 물리쳤다. 그 후 카탈루냐 수비대와 민간인들이 무르시아에 대거 정착했고, 하이메 1세는 이 영토를 카스티야 왕국에 그대로 양도했다.
1267년, 하이메 1세와 교황 클레멘스 4세는 하이메 알라리크 데 페르피냥을 일 칸국의 아바카 칸에게 파견해 무슬림을 대상으로 십자군 원정을 단행하라고 촉구하는 서신을 전달하게 했다. 1269년 아바카 칸의 답신을 가지고 돌아온 하이메 알라리크는 칸이 십자군을 지원할 의사가 있다고 알렸다. 이에 흥분한 하이메 1세는 그해 9월 바르셀로나에서 조직된 함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향한 원정에 착수했다. 그러나 도중에 폭풍을 만나 많은 배가 흩어졌고, 그는 몽펠리에 인근의 에그모르트 항으로 피신했다. 다만 하이메 1세의 사생아 페드로 산체스가 11척의 배는 시리아의 기독교 항구도시인 아크레에 도착했다. 이후 아크레를 포위 공격한 바이바르스에 맞서 싸워 아크레를 지켜내는 데 일조한 뒤 시칠리아를 거쳐 본국으로 돌아갔다.
하이메 1세는 1274년 5월 7일부터 7월 17일까지 프랑스 리옹 대성당 에서 열린 제2차 리옹 공의회에 참석했다. 공의회가 6년 동안 기독교계의 모든 이익의 10분의 1을 십자군에 사용하는 안건을 내걸자, 그는 즉시 시행하자며 찬성 의사를 표명했지만, 다른 참석자들이 머뭇거리면서 결론이 나지 않자 아래의 말을 남긴 뒤 교황과 작별인사한 후 자리를 떴다.
"Barons, anar nos ne podem que huy es honrada alle España"
"남작들이여, 우리는 스페인에서 명예롭게 도망칠 수 없다."
"남작들이여, 우리는 스페인에서 명예롭게 도망칠 수 없다."
1275년, 카르도나의 라몬 폴크 5세, 로카베르티의 조프레 3세, 팔라르소비라의 아르나우 로제 1세, 에스푸리의 위그 5세 등 카탈루냐 귀족들이 아르탈 데 루나, 페리즈 데 리차나, 페레 코르넬, 시메노 도레아 등 아라곤 귀족들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하이메 1세의 사생아인 카스트로 남작 페르난도 산체스를 지도자로 받들었다. 페르난도 산체스는 아크레에서 바이바르스를 상대로 상당한 용맹을 떨쳤으나, 하이메 1세에게 반항하는 귀족들 편을 자주 들었고, 만프레디를 제압하고 시칠리아를 장악한 카를루 1세와 접촉해 병력과 자금을 지원받았다.
그러다가 하이메 1세의 장자인 페드로가 자신과 귀족들이 반역을 도모했다고 고발하면서 하이메 1세로부터 출두 명령이 내려지자, 이대로 끌려가서 죽음을 맞이하느니 저항하기로 마음먹고 자신을 따르는 귀족들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켰다. 페드로는 즉시 토벌군을 이끌고 산치스를 격파한 뒤 1275년 6월에 포마르 드 싱카( Pomar de Cinca) 성에 가둬놓고 공성전을 벌였다. 성이 곧 함락되려 하자, 산치스는 양치기로 변장한 뒤 탈출을 시도했지만 싱카 강을 건너려던 중 체포되었다. 페드로는 이복 형제를 강에 던져 익사시키라고 명령했다.
1276년, 발렌시아 사라센들이 알 아즈라크의 지휘하에 아라곤 왕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발렌시아 전역을 초토화했다. 사라센들은 여세를 이어가 루첸트(Llutxent)를 파괴한 뒤 알바이다 계곡을 통과하여 바르셀로나로 진격했다. 이렇듯 상황이 위급해지자, 하이메 1세가 이를 토벌하고자 출진했지만 알지라에서 병으로 쓰러졌다. 그는 국왕에서 물러난 뒤 포블레 수도원으로 은퇴하려 했으나 그해 7월 27일에 사망했다. 이후 아라곤 본토와 발렌시아, 카탈루냐는 1276년 11월 사라고사에서 페드로 3세로 즉위한 페드로에게 돌아갔고, 마요르카와 피레네 산맥 너머의 카탈루냐 영역은 페드로 3세의 친동생인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에게 돌아갔다.
3. 가족 관계
- 카스티야의 레오노르(1200 ~ 1244):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의 딸. 1221년 결혼했으나 1230년에 결혼 무효화됨.
- 알폰소(1229 ~ 1260): 마르산 여자작 콩스탕스와 결혼.
- 욜란(1215 ~ 1251): 헝가리 국왕 언드라시 2세의 딸.
- 욜란다(1236 ~ 1301):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0세의 왕비.
- 콘스탄사(1239 ~ 1269): 카스티야 국왕 페르난도 3세의 아들인 마누엘 드 카스티야와 결혼,
- 페드로 3세(1240 ~ 1285): 아라곤 국왕
- 하이메 2세(1243 ~ 1311): 마요르카 국왕
- 산차(1246 ~ 1262년): 수녀[2]
- 이사벨(1248 ~ 1271): 프랑스 국왕 필리프 3세의 왕비.
- 마리아(1248 ~ 1267): 수녀[3]
- 페르난도(1248 ~ 1251): 요절
- 산초(1250 ~ 1275): 톨레도 대주교
- 레오노르(1251): 요절
- 테레사 데 길 드 비두레(? ~ 1285): 나바라 귀족 후안 드 비두레의 딸. 1251년 욜란이 사망한 뒤 비공식적으로 결혼했지만 나중에 나병에 걸려 남편에게 버림 받자 수도원에서 은둔했다.
- 하이메(1255 ~ 1285): 제리카 영주
- 페드로(1259 ~ 1318): 아예르베의 영주
- 사생아
- 페르난도 산체스(1240 ~ 1275): 카스트로 남작.
- 페드로 페르난데스(1245/1249 ~ 1299): 히하르 남작, 성묘 기사단장.
- 하이메 사로카(1248 ~ ?): 우에스카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