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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0 19:05:51

루이 드 뤽상부르생폴

파일:루이 드 뤽상부르생폴.jpg
이름 루이 드 뤽상부르생폴
Louis de Luxembourg-Saint-Pol
출생 1418년
프랑스 왕국 보부아르
사망 1475년 12월 19일
프랑스 왕국 파리
아버지 피에르 1세 드 뤽상부르생폴
어머니 마르그리트 드 보
형제 자클린, 티보, 카트린, 필리프, 자크, 이자벨
아내 잔 드 바르, 마리 드 사보이아
자녀 장, 피에르 2세, 앙투안, 자클린, 엘린, 필리프, 루이, 잔, 샤를
직위 생폴 백작, 리니 백작, 기즈 백작, 수아송 백작, 브리엔 백작, 릴 영주, 프랑스 무관장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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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생폴 백작, 브리엔 백작, 프랑스 무관장. 백년전쟁 시기 프랑스군에서 활약했으며, 루이 11세의 신임을 받아 프랑스 무관장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루이 11세를 음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되어 반역 혐의로 처형되었다.

2. 생애

1418년경 프랑스 왕국 보부아르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생폴 백작 피에르 1세 드 뤽상부르생폴이고, 어머니는 안드리아 공작 프랑수아 1세 드 보의 딸인 마르그리트 드 보이다. 형제로 자클린[1], 티보[2], 카트린[3], 필리프[4], 자크[5], 이자벨[6]이 있었다.

1433년 아버지 피에르 1세가 사망한 뒤 생폴 백작에 선임되었다. 이후 삼촌이자 리니 백작 겸 기즈 백작 장 2세 드 뤽상부르리니의 후견을 받았다. 1441년 장 2세가 사망한 뒤, 당시 장 2세의 영지를 몰수했던 샤를 7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리니와 기즈 백작령 및 작위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메인 백작 샤를 4세[7]가 자신이 기즈 영지를 상속받아야 한다며 그와 대립했다. 두 사람의 갈등은 장기간 이어지다가, 1444년 5월 샤를 4세가 루이의 자매인 이자벨과 결혼하고 기즈를 지참금으로 받는 조건으로 해결되었다.

루이는 라페르 마을을 요새화하여 성벽으로 둘러쌌고, 정사각형 성채가 있는 오래된 요새화된 성터에 새로운 성곽을 지었다. 또한 함 성을 재건하고, 1441년 높이 33m, 직경 33m의 강력한 성채를 세웠다. 이 성채의 벽 두께는 11m에 달해 포병대의 공세에 저항할 수 있었다. 그는 함성에 설치된 '코네타블의 탑' 입구 문 위에 아래의 모토를 새겨넣게 했다.
Mô Myeux
최선을 다하라

1443년 8월 디에프 공방전에 참전해 공적을 세웠으며, 그 과정에서 도팽 루이와 가까워졌고 그로부터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다. 1443년 12월 24일 아르플뢰르 탈환에 기여했으며, 1449년 프랑스의 노르망디 공세에 참여해 구르네 앙 브레이를 공략하고 1450년 캉을 공략했다. 한편, 그는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에게도 도움을 제공했다. 1452년 쾰른 대주교와 겐트가 선량공 필리프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필리프를 도와 반란을 진압하는 데 기여했다.

1465년 프랑스의 대귀족들이 루이 11세를 상대로 공익 연맹을 결성하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개인적으로 루이 11세와 가까운 사이였지만 공익 연맹에 참여했고, 용담공 샤를의 군대를 지휘했다. 1465년 7월 16일, 루이는 선봉대를 이끌고 몽레리 전투의 첫번째 교전을 지휘해 피에르 드 브레제가 이끄는 왕실군 선봉대를 격파한 뒤 용담공 샤를에게 전령을 보내 승리를 알렸다. 이후 생폴 백작의 기병들은 전리품을 확보하거나 몸값을 받을 수 있는 포로를 잡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말에서 내려 이리저리 흩어졌다. 이때 피에르 드 브레제가 병사들을 수습한 뒤 반격에 착수했고, 생폴 백작의 기병대는 순식간에 압도되어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용담공 샤를이 후속군을 이끌고 분전한 끝에 몽레리 전투에서 승리했다.

1465년 콩플랑 조약으로 루이 11세와 공익 연맹이 화해한 뒤, 그는 루이 11세로부터 프랑슨 무관장에 선임되었다. 1466년 프랑스 왕비 사보이아의 샤를로테의 누이인 마리 드 소보이아와 결혼했고, 기즈와 누비옹앙티에라슈의 영주권을 받았다. 또한 1469년 8월 1일 루이 11세가 창설한 생 미셸 기사단의 첫번째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 국왕을 섬기는 와중에도 용담공 샤를 및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4세와 은밀히 서신을 주고받았다. 에드워드 4세는 루이의 조카인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남편이기도 했다. 1474년, 용담공 샤를은 에드워드 4세와 비밀 협정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두 사람은 루이 11세를 처단한 뒤 프랑스를 생폴 백작, 부르고뉴 공작, 브르타뉴 공작, 부르봉 공작, 느무르 공작, 메인 백작, 에드워드 4세의 주도하에 분할하기로 했다. 루이는 이 음모에 적극적으로 가담했고, 에드워드 4세에게 피카르디를 침공한다면 생캉탱을 넘겨주겠다고 제안했으며, 프랑스의 여러 거물을 음모에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1475년 6월 프랑스 해안에 11,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상륙한 에드워드 4세는 정작 용담공 샤를과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로부터 거의 지원을 받지 못하자, 전쟁을 이어가봐야 소용없겠다고 판단하고 루이 11세와 회담을 가진 끝에 1475년 8월 29일 파퀴니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두 왕은 7년간 휴전을 맺고 자유 무역을 하기로 했으며, 루이 11세는 에드워드 4세에게 선불로 75,000 크라운을 지불하고 연간 50,000 크라운을 분할 납부하며, 에드워드 4세에게 구금된 폐위된 잉글랜드 왕비 앙주의 마르그리트의 몸값 50,000 크라운을 지불하기로 했다. 여기에 두 왕 중 한 왕이 반란에 직면하면 다른 왕이 이를 물리치기 위해 군사 지원을 제공하기로 했고, 에드워드 4세의 딸 요크의 엘리자베스가 성년이 되면 도팽 샤를과 결혼시키기로 했다.

이 소식을 접한 루이는 격분한 나머지 경솔하게도 에드워드 4세에게 "비겁하고 불명예스럽고 거지같은 왕"이라고 비난하는 서신을 보냈다. 에드워드 4세는 즉각 이 서신을 루이 11세에게 전달했다. 이에 루이 11세는 루이를 체포하기 위해 생캉탱으로 진군했고, 루이는 급히 몽스로 피신해 용담공 샤를의 보호를 받으려 했다. 그러나 용담공 샤를은 그를 체포한 뒤 루이 11세에게 인도하기로 했다. 그렇게 파리로 보내진 루이는 바스티유 감옥에 갇혔고, 1475년 11월 26일부터 3주간 재판을 받았다. 그는 삼부회에서 자신이 영주로서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라고 호소했지만, 루이 11세는 프랑스의 적대국인 잉글랜드의 국왕과 손잡은 건 명백한 반역이라고 규탄했다. 결국 루이는 1475년 11월 27일 사형을 선고받았고, 12월 19일 파리 그레브 광장에서 참수되었다. 그의 유해는 생클레어 교회에 안장되었다. 용담공 샤를은 그를 넘긴 대가로 생캉탱, 함, 보앵을 루이 11세로부터 넘겨받았고, 로렌 공국을 정복하는 사업을 단행하는 것 역시 암묵적인 동의를 받아냈다.

3. 가족



[1] 1416/1417 ~ 1472, 베드퍼드 공작 랭커스터의 존과 초혼, 초대 리버스 남작 리처드 우드빌과 재혼[2] ? ~ 1477, 브리엔 백작, 피엔느의 영주.[3] ? ~ 1492, 프랑스 무관장, 브르타뉴 공작 아르튀르 드 리슈몽의 아내.[4] 생메상의 수녀원장.[5] 1426 ~ 1487, 리슈부르의 영주.[6] ? ~ 1472, 메인 백작과 기즈 백작 샤를 4세 드 앙주의 부인.[7] 앙주 공작 루이 2세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