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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3 09:10:28

아폰수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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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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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098><colcolor=#fff> 포르투갈 왕국 보르고냐 왕조 제3대 국왕
아폰수 2세
Afonso II
파일:Afonso_II_of_Portugal_–_Juan_Caramuel's_'Philippus_Prudens'.jpg
출생 1185년 4월 23일
포르투갈 왕국 코임브라
사망 1223년 3월 25일 (향년 37세)
포르투갈 왕국 코임브라
재위 포르투갈 왕국의 국왕
1211년 3월 26일 ~ 1223년 3월 25일
배우자 카스티야의 우라카 (1206년 결혼 / 1220년 사망)
자녀 산슈 2세, 아폰수 3세, 레오노르, 페르난두
아버지 산슈 1세
어머니 아라곤의 둘세
형제 테레사, 산샤, 페드루, 페르난두, 마팔다, 블랑카, 베렝가리아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
2.1. 치세
3.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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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투갈 왕국 보르고냐 왕조 3대 국왕.

2. 생애

1185년 4월 23일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 코임브라에서 포르투갈 2대 국왕 산슈 1세아라곤 왕국의 여왕 페이로넬라의 딸 둘세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자매로 테레사, 산샤, 페드루, 페르난두, 마팔다, 블랑카, 베렝가리아가 있었다. 1211년 3월 26일 아버지가 사망한 뒤 장남으로서 포르투갈 왕위에 올랐다.

산슈 1세는 사망하기 전에 마팔다, 테레사, 산샤가 여왕의 칭호를 받고 몽테모로벨호, 세이아 알렌케르 등 포르투갈 왕국 중심부의 일부 성과 마을들을 다스릴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아폰수 2세는 그렇게 하면 왕권이 제약받을 것을 우려해 아버지의 유언을 따르지 않으려 했다. 이에 누이들과 그녀들을 따르는 귀족들이 반발하면서 1211년부터 1216년까지 포르투갈 각지에서 무력 충돌이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아폰수 2세의 남동생인 페드루와 페르난두, 산슈 1세의 사생아인 마르팀 산체스, 로드리고 산체스는 형의 숙청을 피해 해외로 망명해야 했다.

1216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개입해 양자의 갈등을 중재하고 나서야 포르투갈의 내란이 수그러들었다. 아폰수 2세는 누이들에게 많은 돈을 지불하는 대가로 그녀들이 물려받은 성과 마을들을 회수했으며, 성의 수비는 기사단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기사단은 왕의 통제에 제대로 따르지 않았고,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 때 왕의 허락 없이 전투에 뛰어들었다. 결국 그가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는 정예병은 얼마 되지 않았다.

2.1. 치세

아폰수 2세는 조부와 부친과는 달리 확장 정책을 추진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갈리시아 국경을 놓고 레온 왕국과 분쟁을 벌인 데 비해, 그는 레온 왕국에 별다른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또한 레온 왕국의 알폰수 9세카스티야 왕국알폰소 8세, 페르난도 3세레콩키스타를 적극적으로 단행한 데 비해, 그는 무슬림의 영역을 탈취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귀족과 기사들이 자발적으로 무슬림들의 거점을 공략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국가의 경제와 사회 구조를 개편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1211년 성직자와 귀족 대표로 구성된 코르테스에서 포르투갈 최초의 성문법을 반포했다. 이 법률은 주로 사유 재산, 민법 및 주화와 같은 주제를 다루었다. 1220년에는 재산의 법적 지위와 소유자의 특권 및 면제가 무엇에 근거하는지를 결정하기 위한 조사가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이는 할아버지 아폰수 1세와 아버지 산슈 1세가 귀족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기부금과 특권을 부여받아서 왕권이 제약받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내린 조치였다. 그리고 여러 유럽 국가에 대사를 파견해 무역 조약을 체결했다.

아폰수 1세는 생전에 교황청이 포르투갈 왕국이 레온 왕국에서 독립하는 것을 인정하게 하기 위해 포르투갈 전체를 봉헌한다고 맹세하고 교회를 위한 다양한 특권을 입법화했다. 이로 인해 교회가 사실상 '국가 안의 국가'가 되어버려서 왕의 통제를 제대로 따르지 않았고 상당수의 세수입이 교회에 넘어가서 국가 운영을 원활히 하기 힘들어졌다. 아폰수 2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직자들의 권한을 악화시키고 교회 수입 일부를 국가 공익 목적에 사용하려 했다. 이에 따라 교회가 누리던 여러 특권이 폐지되고 수도원에 들어가던 재원 일부가 국고로 넘어가자, 성직자들은 강한 불만을 품고 교황청에 이 사실을 알렸다.

교황 호노리오 3세는 아폰수 2세에게 조부가 교황청에 맹세한 대로 따르라고 권고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그에게 파문을 선고했다. 그는 교황청에 사절을 파견해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을 테니 파문을 풀어달라고 요청했지만, 실제로는 정책을 바꾸려는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다 1223년 파문당한 채 사망했고, 한동안 가매장되었다가 후계자인 산슈 2세가 교회와의 갈등을 해결한 후에야 알코비사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3. 가족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