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5B799><colcolor=#000000> 포르투갈 왕국 페르난두 1세의 왕비 레오노르 텔레스 Leonor Tele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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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레오노르 텔레스 드 메네제스 (Leonor Teles de Menezes) |
출생 | 1350년 |
포르투갈 왕국 트라스오스몬테스[1] | |
사망 | 1405년 (향년 54~55세) |
카스티야 연합 왕국 바야돌리드 | |
배우자 | 폼베이루의 영주 주앙 로렌소 다 쿠냐 |
페르난두 1세 (1372년 결혼 / 1383년 사망) | |
자녀 | 알바로, 베아트리스 |
아버지 | 마르팀 아폰수 텔레스 드 메네제스 |
어머니 | 알돈사 아녜스 드 바르콘셀로스 |
형제 | 주앙, 곤살로, 마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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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투갈 왕국의 국왕 페르난두 1세의 왕비.2. 생애
1350년 포르투갈의 대귀족 마르팀 아폰수 텔레스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레오노르는 어린 나이에 폼베이루의 영주 주앙 로렌소 다 쿠냐에게 시집을 가 아이를 낳고 살았다. 페르난두 1세는 그런 레오노르를 보고 첫눈에 반했는데, 원래는 레오노르의 동생 마리아를 만나려다가 레오노르에게 빠졌다고 한다. 페르난두 1세는 레오노르와 결혼하기 위해 그녀의 첫 결혼을 무효화시키고 자신이 카스티야 왕국과 맺었던 약혼도 파기했다.이 결정은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종교계에서는 레오노르 텔레스의 어머니 알돈사 아녜스가 보르고냐 왕조의 일원이었기에 근친혼이라고 반발했고, 시민들은 귀족의 딸이 왕비가 되면 귀족들의 횡포가 심해질 것을 두려워해 반란을 일으켰다. 페르난두 1세는 반란군을 방심시키고 리스본에서 빠져나가 레사 두 발로 수도원에서 레오노르와 몰래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군을 이끌고 반란을 제압한 뒤 주모자들을 전부 처형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레오노르는 세차례 임신했으나 두 아이는 유아기에 숨을 거두고 딸 베아트리스만이 살아남았다.[2] 베아트리스는 카스티야 국왕 후안 1세와 결혼했다. 결혼 협상에서 페르난두 1세 사후 포르투갈의 왕위는 베아트리스에게 넘어가고 그녀의 남편은 포르투갈의 왕을 칭할 수 있지만 실제로 통치를 하지는 않으며, 레오노르가 섭정을 맡는 것으로 결정됐다. 또한 베아트리스가 낳은 자식이 포르투갈 왕국을 물려받지만 자식이 태어나지 않는다면 왕위는 후안 1세에게 돌아가며, 그 다음엔 후안 1세가 전처와의 사이에서 낳은 엔리케 왕자에게 왕위가 돌아가는 것으로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이 체결된 데에는 레오노르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고 여겨진다.
1383년 10월 22일에 페르난두 1세가 숨을 거두었다. 딸 베아트리스가 여왕으로 등극하고 레오노르는 섭정을 맡았다. 레오노르는 연인 주앙 페르난데스 안데이루 백작을 재상으로 선임했다.
레오노르의 통치는 귀족과 평민 모두의 반발을 샀다. 먼저 레오노르가 왕비가 되는 과정에서 벌어진 대학살로 인해 레오노르는 일찍이 인망을 잃은 상태였다. 한편 페르난두 1세가 사망하고 후안 1세는 자신의 사람을 포르투갈에 파견한 뒤 포르투갈의 내정에 깊숙히 간섭하기 시작했다. 이는 평민, 특히 상인 계층의 반발로 이어졌다. 포르투갈은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바탕으로 상인 중심의 부르주아 계층이 형성되어있었다. 이들은 자국이 카스티야 왕국에 합병되어 상업으로 얻은 이익의 일부를 카스티야에 세금으로 바쳐야 하는 상황을 두려워했다. 그리고 귀족들은 왕가에 다른 남성 구성원이 있음에도 10살 남짓의 여왕이 왕위에 올라 카스티야의 간섭을 받는 상황에 불만을 표시했다. 이 와중에 레오노르는 애인에게 빠져있으니, 사람들의 불만은 점점 쌓여갔다.
1383년 11월, 귀족들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귀족들은 페르난두 1세의 이복동생 아비즈의 영주 주앙 왕자를 내세워 안데이루 백작을 암살하고 레오노르의 통치권을 뺏은 뒤, 주앙을 통치자로 옹립했다. 반란의 주모자 중 한명인 알바로 파리스는 레오노르에게 주앙과 재혼할 것을 제안했다. 레오노르는 이를 거부하고 산타렝으로 도주한 뒤 사위 후안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후안 1세는 포르투갈의 왕을 자칭하며 레오노르에게 섭정직에서 손을 뗄 것을 요구했다. 레오노르는 사임한다는 각서를 썼지만 이후 사위와 의견 충돌을 겪으면서 갈등을 빚었다. 1384년 3월, 레오노르가 후안 1세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레오노르는 바야돌리드에 위치한 한 수도원으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조용히 살다가 숨을 거두었다.
[1] 또는 카스티야 연합 왕국[2] 죽은 아이 중 한명은 페르난두 1세의 자식이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