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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카스티야 왕국 아스투리아스 여공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 Juana la Beltraneja | |
<colbgcolor=#AA0044> 출생 | 1462년 2월 28일 |
카스티야 연합 왕국 마드리드 로열 알카사르 | |
사망 | 1530년 4월 12일 (향년 68세) |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 |
배우자 | 아폰수 5세 (1475년 결혼 / 1481년 사망) |
아버지 | 엔리케 4세 (논란) |
어머니 | 포르투갈의 후아나 공주 |
종교 | 가톨릭 (세례명:요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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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스티야 연합 왕국 트라스타마라 왕조 제5대 국왕 엔리케 4세의 왕녀이자 카스티야의 왕위 요구자로 포르투갈 국왕 아폰수 5세의 왕비이기도 하다. 이복고모 이사벨 1세를 상대로 왕위 계승 전쟁을 일으켰으나 끝내 패배하고 포르투갈에서 말년을 보냈다.2. 생애
1462년 2월 28일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엔리케 4세와 포르투갈 국왕 두아르트 1세의 딸 후아나 공주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엔리케 4세는 오래도록 고대했던 적출자를 낳은 것에 기뻐했고, 1462년 5월 9일 마드리드의 산 페드로 엘 비에호 성당에서 코르테스를 소집한 뒤 후아나를 아스투리아스 여공이자 왕국의 상속자로 선포했다. 그러나 엔리케 4세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귀족들은 왕이 성적 불구자라서 자식을 낳을 수 없으며, 후아나 왕비가 왕의 총신 벨트란 데 라 쿠에바와 간통해서 낳은 사생아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들은 후아나에게 벨트란의 딸이라는 의미인 '라 벨트라네하(la Beltraneja)'라는 모욕적인 별명을 붙였다.1464년, 엔리케 4세 집권 이래 정국을 이끌었던 후안 파체코가 벨트란 데 라 쿠에바와의 정쟁에서 패해 형제 페드로 히론과 함께 실각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후안 파체코는 귀족들을 선동해 1464년 5월 알칼라 데 에나레스에서 귀족 연합을 결성하고 "벨트란의 사생아인 후아나를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엔리케 4세의 아버지 후안 2세가 2번째 왕비 이사벨[1]에게서 본 아들인 알폰소만이 정당한 후계자이니 그를 왕위 계승자로 지명하라고 요구했다. 반란에 가담한 귀족이 워낙 많아서 무력으로 진압하기 곤란해지자, 엔리케 4세는 어쩔 수 없이 그들과 협상하기로 했다. 그 결과 알폰소는 일전에 엔리케에 의해 궁정에 유폐되었을 때 빼앗겼던 산티아고 영지를 돌려받고 후계자로 인정받았으며, 벨트란 데 라 쿠에바는 추방되고 후안 파체코가 권좌에 복귀했다. 다만 알폰소와 결혼하는 조건으로 왕의 적출자로 인정되었다.
1465년 1월 16일, 후안 파체코의 주관하에 메디나 델 캄포에서 열린 코르테스에서 귀족들에게 부과된 세금을 대부분 면제하고 무슬림과 유대인의 권리 상당수를 박탈하며, 왕권을 통제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이 체택되었다. 엔리케 4세가 이를 수용하기를 거부하자, 후안 파체코 등은 4월 27일 반기를 들고 알폰소 왕자를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2세'로 옹립했다. 이후 전세가 갈수록 불리하게 돌아가자, 엔리케 4세는 왕실 재무부의 소재지인 세고비야를 알폰소에게 내주고 아내 후아나를 인질로 내줘야 했다. 후아나는 알라에호스 성에 감금되었고 세비야 대주교 알론소 데 폰세카의 감시를 받았는데, 나중에 대주교의 조카인 페드로 폰세카를 애인으로 삼아 그와의 사이에서 1468년 11월 30일에 2명의 쌍둥이 자녀 페드로와 안드레스를 낳았다. 아내의 사생아 출산 소식을 접한 엔리케는 배신감에 사무쳐 후아나와의 결혼이 무효라고 선언했다.
1468년 7월 5일 알폰소가 사망했고 그 해 9월 18일 또는 19일에 엔리케 4세와 알폰소의 누나 이사벨이 로스 토로스 데 구이산도에서 만나서 협상한 끝에 이사벨이 엔리케 4세의 후계자로 지명되고 귀족들은 엔리케 4세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내용의 협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1469년 이사벨이 포르투갈 국왕 아폰수 5세와 결혼시키려는 엔리케 4세의 뜻을 거스르고 바야돌리드로 달아나서 아라곤 왕자 페란도와 결혼하자, 엔리케 4세는 이사벨이 협약을 위반했다고 주장하고 후아나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에 이사벨을 지지하는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카스티야 왕국은 수년 간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1474년 12월 11일, 엔리케 4세가 마드리드에서 병사했다. 카스티야의 대다수 귀족들은 이사벨과 페란도를 받들기로 했지만, 톨레도에서 무르시아까지 이르는 카스티야 남부 일대의 방대한 영지를 보유한 비에나 후작 디에고 로페스 파체코와 톨레도 대주교 알폰소 카리요 데 아쿠냐 등 일부 귀족과 성직자들은 후아나를 지지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력이 이사벨의 지지자들보다 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포르투갈 국왕 아폰수 5세에게 조카 후아나가 카스티야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지원해달라고 요청하면서, 그녀와 결혼하고 카스티야의 공동 국왕이 되라고 제안했다. 아폰수 5세는 이를 받아들여 1,600명의 보병과 5,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국경을 넘어 엑스트레마두라를 거쳐 팔렌시아에 도착해 후아나의 지지자들과 합세한 뒤 1475년 5월 25일 결혼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은 포르투갈에 이어 프랑스 왕국이 후아나를 지원하고 아라곤 왕국이 이사벨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국제전의 양상으로 흘러갔다.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토로에 조성된 궁정에 머물었지만 별다른 실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삼촌이자 남편인 아폰수 5세에게 의존했다. 그러다 1476년 3월 1일에 벌어진 토로 전투에서 아폰수 5세가 패주하면서 전세가 기울자, 아레발로 공작, 우레냐 백작 등 후아나 측에 가담했던 귀족들이 대거 이사벨과 페란도에게 귀순했다. 아폰수 5세는 1476년 6월 13일까지 카스티야 왕국과의 전쟁을 이어갔지만, 전세를 뒤집을 가망이 없자 후아나를 데리고 포르투갈로 철수했다. 그 후 1478년 교황 식스토 4세는 삼촌과 조카의 결혼은 교회법상 위법이라며 아폰수 5세와 후아나의 결혼을 무효로 간주했다.
그 후 3년간 국경지대와 해상에서의 간혈적인 전투가 이어지다가 1479년 9월 4일 양국이 알카조바스 협약을 맺으면서 전쟁이 종결되었다. 포르투갈 왕국은 이사벨 1세와 페란도 2세가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공동 국왕이 된 것을 인정하는 대가로 마데이라와 아조레스의 소유권, 와타스 왕조와 기니에 대한 독점적 무역권, 그리고 카나리아 제도를 제외한 대서양 섬들의 소유권을 인정받았다.[2] 또한 이사벨의 아들 후안이 성년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결혼하거나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 중 하나를 6개월 안에 선택할 기회를 부여받았다.
그녀는 자신이 심한 모욕을 당했다고 여기고 즉시 산타 클라라 데 코임브라 수도원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수녀 서약을 했다. 그 후 평생 코임브라 수도원에서 수녀로 살아갔다. 1482년 삼촌이자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는 나바라 국왕 프란치스코 1세 페부스를 후아나와 결혼시키자고 제안했지만, 프란치스코 1세가 1483년 1월 7일에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다른 나라가 또 다시 후아나에게 혼담을 제안할 것을 우려한 이사벨 1세가 자신의 아들 후안 왕자와의 결혼을 이행하자고 제안했지만 끝내 거부했다.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는 이후 서신에 "La Reina"(여왕)이라고 서명하면서 조용히 지내다 1530년 4월 12일에 68세의 나이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