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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01:04:55

카네이션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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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olução de 25 de abril de 1974, Revolução dos Cravos

1. 개요2. 혁명 과정
2.1. 혁명 전야2.2. 쿠데타2.3. 구국군정 (Junta de Salvação Nacional)2.4. 계속된 혁명 (Processo Revolucionário Em Curso)
3. 기타

1. 개요

A 25 de Abril de 1974, o Movimento das Forças Armadas, coroando a longa resistência do povo português e interpretando os seus sentimentos profundos, derrubou o regime fascista.

1974년 4월 25일, 오랜 세월에 걸친 포르투갈인들의 저항을 보며, 그들의 열망을 확인한 군사운동(MFA)은 파시스트 정권을 전복시켰다.
포르투갈 헌법 전문의 첫 문장
1974년 포르투갈 제2공화국에서 발생한 사건. 당시 독재를 일삼던 포르투갈 제2공화국 정부를 무너뜨리고 포르투갈이 민주화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현지에서는 4월 25일 혁명(25 de Abril)이라고 부르며 '리스본의 봄'이라는 별명이 있다.

포르투갈 제2공화국에서 30년 이상 독재하던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가 퇴임한 뒤 카에타누 정권이 집권했지만 경기 침체와 식민지들의 독립을 틀어막는 지지부진한 전쟁이 계속되면서 불만이 쌓이던 중 마침 닥쳐온 오일쇼크로 경제가 낙후되어가자 이스타두 노부(제2공화국) 정권에 비판적인 포르투갈군좌파 청년 장교[1]이 주도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카네이션 혁명이란 이름은 쿠데타 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독재 정권을 몰아내겠다는 명분을 내세운 쿠데타를 혁명으로 인식하고 지지한다는 의미로 거리의 군인들에게 카네이션을 달아 준 것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그 군인들은 총구에 카네이션을 꽂음으로써 화답했다.

또 이 혁명의 결과로 포르투갈 제2공화국 정부가 붕괴되었고 앙골라, 기니비사우, 모잠비크아프리카의 포르투갈령 식민지들의 독립도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혁명 직후 각 식민지에서 포르투갈군과 식민지 독립군들과의 전투가 중단되었고 곧 포르투갈령 기니(현재의 기니비사우)를 시작으로 1999년까지의 포르투갈령 마카오를 제외한 모든 식민지가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하였다.

2. 혁명 과정

2.1. 혁명 전야

포르투갈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의 독재 하에서 사회 분위기가 억압적이었다. 더불어 영국, 프랑스 등과는 달리 식민지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 붙들고 있는 바람에 식민지 현지에서도 불만이 누적되었고 오랫동안 식민지와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살라자르는 1968년에 실각했지만 그의 뒤를 이은 카에타누도 근본적으로 살라자르의 정책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살라자르 독재 치하의 포르투갈은 줄을 잘 타서 제2차 세계 대전의 화마를 피해갈 수 있었고 냉전 구도 하에서 철저한 반공주의 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에 NATO에 가입하는 등 국제적 고립은 피할 수 있었다. NATO에는 많은 포르투갈의 소장파 장교들이 교류 목적으로 파견되었고 이들은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의 탈식민화, 자유화를 보고 자국의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에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1961년에는 이미 독재정권을 뒤엎으려는 쿠데타가 발생했지만 실패했다.

더불어 오랜 식민지 전쟁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아프리카 등에 파견되고 희생되면서 전쟁에 대한 회의감도 확산되었다. 1970년대에는 상황수첩(Cadernos Circunstância), 시간과 방법(Tempo e Modo), 논란(Polémica) 같은 유인물들이 대학가에서 돌기 시작했다. 반전운동이 대학가에서 확산되었고 이스타두 노부 체제를 비방하는 선전물이 곳곳에 붙었다. 무장혁명행동(Acção Revolucionária Armada)이나 혁명여단(Brigadas Revolucionárias) 같은 좌파 무장 테러 단체가 조직되어 군 시설에 대한 테러사보타주를 감행했다. 오에이라스에 있는 NATO 사령부가 이들에 의해 공격당했고 탕쿠스(Tancos) 공군기지가 공격받아 군용 헬리콥터 수 대가 파괴되기도 했다. 카에타누 정부는 여론을 돌리기 위해 재정 정상화를 위한 군 예산의 삭감과 함께 여러 개혁 조치를 발표했다. 이 조치는 많은 장교들에게 불만을 샀는데 특히 출신환경이 좋지 않았던 젊은 장교단이 크게 반발했다. 동시기에 소련의 영향을 받은 포르투갈 국내 좌익 세력이 군부 내부까지 침투했고 이스타두 노부 체제에 불만이 많은 청년 장교들이 중심이 되어 군부 쿠데타를 통한 카에타누 정부 전복과 마르크스주의를 기반으로 한 신체제 건설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소장파 장교들뿐만 아니라 소수의 고위 장교들마저 포르투갈의 식민지 정책에 불만을 품었다. 일례로 장군이었던 안토니우 히베이루 드 스피놀라(António Sebastião Ribeiro de Spínola)는 자신의 저서 '포르투갈과 미래'(Portugal e o Futuro)에서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의 당사자인 기니비사우PAIGC 게릴라와 협상을 개시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카에타누는 깜짝 놀라 그를 해임했지만 스피놀라는 이미 식민지 전장에서 여러 공적을 세운 전쟁영웅이었으므로 카에타누 총리의 이 결정은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전쟁이 싫었던 청년 장교들은 분노했다.

2.2. 쿠데타

스피놀라 장군의 해임에 분노한 청년 장교들은 비토르 알베스(Vitor Alves), 오텔루 사라이바 드카르발류(Otelo Saraiva de Carvalho), 바스쿠 로렌수(Vasco Lourenço)를 중심으로 MFA(Movimento das Forças Armadas; 군사운동)을 조직하였는데 이들은 제2공화국 정부를 무너뜨리기로 결의했다.

쿠데타는 1974년 4월 25일 10시 55분에 방영된 파울루 드 카르발류의 노래 "그리고 안녕의 뒤로"(E Depois do Adeus)와 12시 20분에 당대 금지곡이었던 주제 아폰수의 "그란돌라여, 거무스름한 마을이여"(Grândola, Vila Morena)를 방영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쿠데타 세력은 이 신호를 시작으로 포르투갈의 주요 전략 거점을 장악했다.[2]

MFA는 쿠데타를 알리면서 국민들에게 외출을 삼갈 것을 요구했지만 오랜 독재에 질린 국민들은 거리로 나와 쿠데타 세력을 지원했다. 리스본의 화훼 시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은 그 곳에서 팔리던 카네이션(당시가 카네이션의 개화 시기)을 사와서는 쿠데타 군인들에게 달아 줬고 군인들은 이를 총구에 매달아 화답했다.

18시가 되자 카에타누 정권은 완전히 무너졌고 카에타누 등 정부 요인들은 브라질망명했다. 전반적으로 무혈 쿠데타로 평가되지만 시민들과 비밀경찰 사이 충돌로 4명 가량의 사망자가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

2.3. 구국군정 (Junta de Salvação Nacional)

카에타누를 몰아낸 쿠데타 세력은 제2공화국 정권에 의해 해임된 스피놀라 장군을 대통령으로 옹립하고 구국군정(Junta de Salvação Nacional)을 세웠는데 구국군정은 일단 포르투갈군 고위 장교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스피놀라 장군과 쿠데타 주동 세력의 생각은 달랐다. 스피놀라 장군 등은 식민지와의 연방제 구성과 군부 체제의 지속을 희망한 반면 쿠데타 주동 세력은 독재 자체에 질려 민주화 및 식민지 독립을 추진하고자 했다.

한편 제2공화국이 붕괴한지 얼마 되지 않아 수도 리스본을 중심으로 총파업 수준의 대규모 파업이 몇 번이나 일어났는데 이는 40여년 동안 정치적, 사회적으로 무권리 상태에 처해 있었던 노동자들의 불만이 폭발하면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공기업, 사기업을 가리지 않고 일정 규모 이상 기업에 속해 있는 거의 모든 포르투갈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여했다. 결국 1974년 당해 일정 규모 이상 모든 포르투갈 기업에서 대폭 임금 인상이 이루어졌고 새로운 노동조합총연맹이 결성되었으며 동시에 옛 독재 체제에 적극적으로 부역했다고 지목된 많은 고위 공무원과 기업 임원이 해임되었다. 노동조합 합법화와 함께 과거 금지되었던 사회당·공산당 등 좌파 세력이 합법화됐고 이에 군부 지도 세력은 강한 불만을 내비쳤다.

포르투갈 북부 농촌 지역에서는 우파 전통주의 성향 사제들을 중심으로 카네이션 혁명을 무위로 돌리고 다시 옛 이스타두 노부 독재 체제로 돌아가고자 시도하는 운동이 횡행했는데 실제로 가톨릭 사제들의 부추김을 받아서 북부 지역 자영농을 중심으로 좌파 장교 세력에 반대하는 시위가 몇 번이나 일어나기도 했다.

9월 28일에는 MFA에 반대하는 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실패했고 이를 계기로 스피놀라는 9월 30일에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스피놀라 장군의 대통령 사임으로 MFA는 구국군정에서 확고한 주도권을 쥐고 민주화를 추진했다. 이후 스피놀라는 "침묵하는 다수(maioria silenciosa)는 포르투갈의 좌경화에 반대한다"는 논리에 근거해 MFA 반대 투쟁에 나섰고 1975년 3월 11일에 다시 쿠데타를 일으키지만 실패하고 스페인, 브라질망명을 떠났다.

2.4. 계속된 혁명 (Processo Revolucionário Em Curso)

3월 11일의 쿠데타를 계기로 구국군정은 3월 15일에 폐지되었으며 이를 대신하여 MFA가 주도해 혁명평의회(Conselho da Revolução)가 구성되었다.

좌우파 간 정치투쟁은 더욱 격렬해졌다. 4월 25일에는 40여 년만에 자유총선을 치러 제헌의회를 구성했는데 이 제헌의회에서 좌파 정당인 포르투갈 사회당(Partido Socialista)이 38%, 중도좌파 정당인 포르투갈 민주인민당(Partido Popular Democrata)이 26%, 극좌 정당인 포르투갈 공산당(Partido Comunista Português)이 13%를 득표했다. 우파인 포르투갈 중도사회민주당(Partido do Centro Democrático e Social)의 득표율은 8%에 지나지 않았다.

1975년에는 이른바 '뜨거운 여름'이라고 불린 좌우파 간 정치투쟁 과정 초기에 공산 세력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NATO 창설국 출신 쿠바가 거의 탄생할 뻔하기도 했다.[3] 2공화국 기간 동안 강력한 탄압을 받던 공산주의가 허용되면서 포르투갈 전체에 '공산혁명'이 일어날 법한 분위기가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포르투갈 남부에 있던 수많은 농장들은 노동자들이 점거해 협동농장을 차리기도 했고 자영농이 많았던 북부에서는 이러한 협동농장화 움직임에 집단 반발하기도 했다. 이들은 협동농장화에 대한 반발뿐만 아니라 극우 가톨릭 성향 사제들의 부추김을 받아 혁명 그 자체에 반대하는 운동에도 적극 동참했다. 다른 한편으로 원내에 진출한 좌파 정당보다도 더 극단적인 좌파 세력들은 아예 무력 혁명을 일으키고자 했다.

1975년 11월 25일에는 구국군정의 주요 인물이었던 오텔루 사라이바 드 카르발류(Otelo Saraiva de Carvalho)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 쿠데타는 앞서 일어난 스피놀라의 쿠데타와는 달리 극좌세력이 일으킨 쿠데타였다. 그러나 실패했고 이는 포르투갈의 좌경화에 브레이크를 거는 계기가 되었다. 더불어 쿠데타를 계기로 원내정당들은 '뜨거운 여름'이라고 불리던 극렬한 정치투쟁을 마무리하고 타협을 모색했다. 그 결과 1976년 4월 2일에 새로운 헌법이 공포되었다. 이에 따라 4월 25일에 자유총선이 치러졌는데 이 총선에서 포르투갈 사회당이 36.7%, 포르투갈 민주인민당이 26%, 포르투갈 중도사회민주당이 16.7%, 포르투갈 공산당이 15.2%의 득표율을 올렸다. 그리고 6월 27일에는 보통 선거에 기반한 대통령 선거가 치러져, 1975년 11월 25일극좌 쿠데타를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안토니우 하말류 이아느스(António Ramalho Eanes)가 사회당, 민주인민당, 중도사회민주당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본인은 무소속) 이아느즈는 사회당의 마리우 소아르스(Mário Soares)를 총리로 임명했고 이에 따라 사회당 단독 정권이 꾸려졌다.

한편 이 기간에 포르투갈은 국외 식민지들을 모두 포기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따라 국외 식민지들은 독립국가로 독립하였고 이때까지 인정하지 않았던 인도고아, 다만, 디우, 다드라, 나가르하벨리 병합을 인정하였다. 포르투갈이 해외 식민지들을 모두 포기했으므로 남은 것은 마카오밖에 없었는데 그 마카오도 카네이션 혁명 이후 지속적으로 중국에 반환하겠다고 했지만 중국이 홍콩 반환 문제로 인해 거부해서 포기하지 못했을 뿐이며 양국은 마카오에 대해 '중국 땅이지만 포르투갈 정부가 행정권을 행사하는 곳'으로 해석하는 데 합의하였다. 그리고 그 마카오1999년반환이 이뤄졌다. 마카오까지 중국에 반환되면서 포르투갈 식민제국도 막을 내렸다.

포르투갈 군대와 관료들이 제일 먼저 식민지를 포기하고 떠났으며 국외에 나가 있던 수십만의 포르투갈 노동자들, 소상공인들, 그리고 농부들도 포르투갈로 귀국했는데 포르투갈 본토 사람들은 이들을 '귀환자'(Retornados)라고 불렀다.

3. 기타


[1] 대부분 위관급 초급장교들이었다.[2] 두 노래는 포르투갈의 통속적 노래 장르인 "파두" 노래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파두는 축구 그리고 파티마와 함께 포르투갈 독재정권의 유명한 우민화 정책인 "3F 정책"을 구성하는 요소였다.[3] 혁명의 시발탄이었던 노래 《그란돌라, 빌라 모레나》의 배경이 되는 그란돌라에서 멀지 않은 곳에 쿠바라는 이름의 동네가 있는 걸 생각하면 뭔가 묘하다.[4] 당연한 말(...)이지만 주제 아폰수의 곡은 당시 금지곡이었다. 역시 당연한 말이지만(...) 지금은 해제되었다.[5] morena의 뉘앙스가 혼혈이거나 햇빛에 그을린 피부를 말하는데 그란돌라가 위치한 남부 알렌테주 지방은 뜨거운 햇빛과 무더위로 알려진 곳이다.[6] 지독한 훈련에 고시가 용병 출신이라는 점과 겹쳐져서 병사들에게 또라이라고까지 불린다.[7] 이때 고시는 이 병사들과 먼저 발견하기 시합을 하는데 마지막에 은근슬쩍 져 준다.[8] 그 당시에는 힘든 훈련 탓에 고시를 원망했지만 세월이 지난 후에는 그의 속뜻을 알게 되었다.[9] 다만 다리에 이름이 붙은 것과 별개로, 살라자르 본인은 다리가 필요한 점은 인정하면서도, 포르투갈의 만성적인 방만 재정을 해결해 권력을 휘어잡은 배경에서 보듯이 긴축을 중시하는 성향이라 이런 대규모 공공투자로 다리를 놓는데애 썩 내켜하진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다리 건설에 본인이 직접 관여하지 않고, 수하 장관 주도로 이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