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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8:16:52

암바가이 칸


1. 개요2. 생애3. 사후4. 가족관계5. 미디어 믹스

 Амбагай / 俺巴孩(엄파해) (1091 ~ 1156)

1. 개요

암바가이 칸(Ambaγai Qan)은[1] 보르지긴 오복 타이치우트 씨족의 추장이자 카마그 몽골의 제2대 칸이었다. 몽골 제국을 세운 칭기스 칸의 증조부였던 카불 칸의 6촌 동생이자 칸위 계승자로 예수게이 바아투르의 재종조부였다. 암바가이 칸의 손자가 어린 테무진을 괴롭혔던 '타르고타이' 키릴투크였다.

타타르부와 혼인동맹을 하고 오던 길에 타타르의 배신으로 납치되어 금나라로 송환되었으며, 희대의 폭군이었던 해릉양왕에 의해 고문을 당한 후 처형되었다.[2]원조비사》에는 '암바가이 카간'(俺巴孩合罕)으로 나온다.

2. 생애

암바가이는 보르지긴 오복 출신으로, 현재의 중국령인 소르각투쿠에서 태어났다. 그는 카마그 몽골의 보르지긴 오복 족장 카이두의 증손이었으며, 카이두의 차남 차라카이 링쿠[3]의 손자였고, 셍굼 빌게의 아들이었다. 《원조비사》와 일 칸국의 역사서인 《집사》 등에는 암바가이를 칸으로 칭하고 있다. 카불 칸은 슬하의 아들 7명[4] 대신 6촌 동생이었던 암바가이를 후계자로 지명했고, 그가 카마그 몽골 울루스의 제2대 칸위를 계승했다. 라시드 웃 딘에 의하면 그가 보르지긴 오복의 집안 중 가장 연장자였기 때문에 카불 칸의 뒤를 이었다고 한다. 《원조비사》와 《집사》에 의하면 암바가이는 '카간'(合罕)의 칭호를 사용했다.

카불 칸이 병으로 죽어갈 때, 암바가이와 카마그 몽골인들은 타타르족 주술사를 초청했으나, 그는 죽어가는 칸을 살릴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카불 칸의 친척들은 칸이 죽자마자 타타르족 주술사를 살해했다. 이 때문에 타타르인들은 카마그 몽골에 대해 앙심을 품게 되었다. 한편 금나라의 통치자들은 카불 칸의 죽음을 북방 유목민들 사이의 대립 및 갈등을 부추길 수 있는 기회로 보았다.

타타르족과의 오랜 갈등 끝에 암바가이 칸은 자신의 아들인 카다안 타이시를 타타르족 족장의 딸과 약혼시키기로 했다. 그는 선대 카불 칸의 장남이자 카마그 몽골 제일의 용사였던 오킨-바르칵[5] 그리고 투두엔 옷치긴[6]과 함께 타타르부를 방문하고 돌아오던 길에 타타르의 배신으로 코를렌 호수와 부이르 호수 사이에서 포박되어 납치되었다. 칸을 호위하던 오킨 바르칵과 투두엔 옷치긴도 암바가이와 함께 금나라로 송환되었다. 다른 설에는 암바가이 칸의 딸을 타타르족 족장에게 시집보내던 중 타타르족의 배신으로 습격당해, 일행은 모두 살해되고 암바가이 칸과 투두엔 옷치긴 등이 포박되어 금나라로 끌려갔다고 한다.

1156년 암바가이 칸은 금나라의 수도인 중도 대흥부(지금의 베이징)로 끌려가 수레 혹은 나무로 만든 당나귀 혹은 말에 매달려 손발에 못이 박히는 가혹한 형을 받으며 죽었다. 일설에는 금나라에서 보낸 자객에 의해 참수된 뒤 그 수급이 금나라로 보내졌다고 한다. 《원조비사》에 의하면 암바가이 칸은 몽골의 베수드 씨족 사람인 발라가치를 통해, 아들 카다안 타이시와 쿠툴라 등에게
"내가 일국의 군주가 되었으나 딸아이를 사랑하여 차마 참지 못하고 이런 일을 겪으니, 후손들은 마땅히 나를 거울로 삼거라. 너희들은 다섯 손가락의 손톱이 다 빠져 달아나도록, 너희들의 열 손가락이 다 닳아 없어지도록 나의 원수를 갚아다오."
라는 처절한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또한《원조비사》에 따르면 암바가이 칸이 금나라의 폭군인 해릉양왕에게
"네가 남의 손을 빌려 술수로 나를 붙잡아 나에게 부당한 형벌을 가했다. 내가 죽으면 나의 백부, 숙부, 형제들이 보복을 할 것이다."
라고 저주하자, 해릉양왕은
"그 말은 너희 부족 무리한테나 고하는게 옳도다! 짐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라고 응대했다.[7] 《원조비사》, 《원사》 등에는 암바가이 칸의 정확한 사망 날짜가 적혀 있지 않다.

3. 사후

암바가이 칸의 카툰(황후)들 중 오르바이와 소카타이는 훗날 테무진(후일의 칭기즈 칸)이 태어나고, 예수게이가 독살된 후에도 생존해 있었다. 오르바이와 소카타이가 테무진의 숙적들 중 한 명이었던 타이치우드 족장 타르고타이 키릴투크의 친할머니였는지의 여부는 불확실하다.

카마그 몽골의 쿠릴타이는 억울하게 살해당한 암바가이 칸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카불 칸의 4남인 쿠툴라를 지명하고 그를 제3대 대칸으로 선출했다. 쿠툴라 칸은 선대 암바가이 칸의 원수를 갚기 위해 13회에 걸쳐 타타르족과 교전했으나 복수는 실패했다.

암바가이 칸의 아들 카다안 타이시는 훗날 타이치우드 씨족의 족장이 되었으나[8] 어느 시점엔가 독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훗날 칭기즈 칸은 타타르족과 교전하던 중, 일부 타타르족 전사들을 마차로 치어 죽이며 타타르족이 이런 방식으로 우리 조상을 죽였다고 말했다.

암바가이 칸 사후 40년 뒤, 칭기즈 칸이 몽골 초원을 통일하고, 선조인 암바가이 칸의 원한을 갚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당시 무능력한 위소왕이 다스리고 있었던 금나라를 침공했는데, 이 일로 금나라의 수도였던 중도 대흥부[9]까지 포위당했으며 이 과정에서 위소왕이 피살되고 금선종이 즉위했다. 결국 새로 즉위한 금선종은 암바가이 칸의 유물과 전쟁 배상금을 몽골에게 지불하는 것으로 피비린내나는 전쟁을 겨우 끝마쳤다. 물론 21년 후인 태종 오고타이 칸의 시절에 몽골 제국은 아예 금나라 자체를 멸망시켰다.(1234년)[10]

참고로 해릉양왕은 암바가이 칸이 죽은지 5년 뒤, 폭정만 펼치던 끝에 군영에서 반란이 일어나 주살되었고, 명군인 세종이 즉위했다.

4. 가족관계

암바가이 칸에게는 여러 명의 아내가 있었으나 칭기즈 칸이 태어난 후에도 생존해 있었던[11] 2명의 부인들의 이름만 정확하게 전해지고 있다. 암바가이 칸에게는 10명의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

5. 미디어 믹스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만화 《칭기즈칸》에서는 제베가 칭기즈 칸에게 금나라 정벌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암바카이 칸의 비참한 죽음을 언급할 때 등장한다. 그리고 암바카이 칸이 금나라로 끌려가 나무로 만든 말에 손발이 못이 박힌 상태로 조리돌림을 당하는 장면과, 살이 찢기는 잔혹한 형벌 장면, 그리고 암바카이 칸이 몽골족에게 금나라를 정벌하여 자신의 원수를 갚아줄 것을 외치며 절규하는 장면은 짧지만, 상당히 강렬하다.

네이버 웹툰 《사신소년》에서 능사코어로 등장한다. 수식어는 '카마그 몽골의 제2대 칸'.


[1] '암바카이 칸'(Ambaqai Qan)이라고도 한다. 《원사》에는 '함바카이 칸'(咸補海汗) 또는 '함바카이'(咸补海)로 기록되어 있다.[2] 훗날 칭기즈 칸이 단행한 금나라 원정 이유들의 하나가 되었다.[3] 치르카 린후아[4] 카불 칸의 일곱 아들은 카마그 몽골 울루스에서 모두 키얀(乞顔)이라고 불렸는데, 그 뜻은 급류(急流)였다. 7명의 형제들은 빠른 물살처럼 거침이 없었고, 싸우면 파죽지세였다. 나중에 사람들은 그들의 자손을 '키얀'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즉 보르지긴 오복 중에서 이름을 날리게 되는 키야트 가문으로 형성되었다.[5] 주르킨 씨족의 조상[6] 제1대 카불 칸의 7남[7] 실제로 카마그 몽골은 암바가이 칸의 사후에 세력이 줄어서 그 5년 뒤, 쿠툴라 칸마저 금나라와 타타르의 연합군에 의해 죽어 수십년 동안 카마그 몽골에는 칸이 없게 되었다.[8] 쿠툴라 칸 시기에 벌어진 부이르 호수 전투에서 참패한 카마그 몽골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암바가이 칸의 후예인 타이치우드 계열과 카불 칸의 후예인 키야트 계열로 분열되었다. 카마그 몽골의 역사를 보면 쿠툴라 칸 이후 칭기즈 칸 이전까지 칸위가 비어있는데 그 원인은 이것 때문이었다. 예수게이 바아투르조차 키야트 씨족의 우두머리까지만 되었지, 몽골을 통일하지는 못했다.[9] 中都 大興府, 지금의 베이징[10] 참고로 철천지원수인 타타르는 더 잔혹하게 당했는데 사실 타타르는 암바가이 칸의 일로 당한 건 아니었고, 그보다는 예수게이 독살 사건이 더 컸다.[11] 테무진이 몽골 고원을 통일하고, 대칸에 오른 것이 1206년이기는 하지만 태어난 해는 1162년으로 암바가이 칸이 살해된 지 6년 후, 쿠툴라 칸이 전사하고 1년 후였다. 암바가이 칸과 칭기즈 칸 두 사람의 관계는 거의 증조부와 증손자뻘이었지만 시간대상으로는 아주 멀지만은 않았다. 물론 칭기즈 칸이 태어났을 때까지 암바가이 칸이 살아있었다면 거의 70대 가까운 노인이었을 테지만...[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