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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後大借款 事件 |
Reconstruction Loan Scandal |
1. 개요
1913년 4월 26일 위안스카이가 5개국 은행으로부터 선후대차관(善後大借款)이라 불리는 2500만 파운드[1] 거액의 차관을 국회의 동의 없이 무단으로 빌린 사건을 말한다. 차관 도입 과정에서 의회가 무시당한 것에 격분한 중국국민당은 계축전쟁을 일으켜 북양정부에 맞서기로 결정한다.大자를 빼고 그냥 선후차관(善後借款)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사태 정비용 차관'이라는 뜻이다.
2. 배경
1913년 3월 20일 쑹자오런 암살 사건의 배후가 국무총리 자오빙쥔과 내무부 비서 홍술조라는 것은 3월 24일 범인 무사영이 체포되면서 빠르게 드러났다. 4월 26일 자오빙쥔이 암살을 사주했다는 각종 증거가 공개되었고 위안스카이는 상황 타개를 위해서 대규모 차관 도입을 강행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대해서 위안스카이가 국민당 토벌을 위해 군사자금을 외국으로부터 들여온 것이라는 해석이 팽배하고 사실상 위안스카이가 차관을 군사자금으로 활용하여 국민당 세력에 대한 매수, 토벌에 사용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중화민국의 당시 경제상황 자체는 파탄지경이라서 차관 자체가 필요했던 것 역시 사실이다.1912년 기점으로 중앙정부의 세입은 1억 8973만원이었는데 이중에서 지방으로부터의 송금이 92%에 달하는 1억 7490만원이었다. 하지만 나라가 혼란해지면서 1913년에는 지방에서의 수입이 고작 3242만원으로 격감했다. 여기에 1913년에만 발행한 공채가 2억 2337만원이었고 1914년에도 2508만원의 공채가 발행되었다. 여기에 막대한 양의 외채도 역시 상환해야 했다. 1914년에는 각 성의 송금이 더욱 줄어 2975만원에 불과했고 위안스카이는 군대를 통해 장악한 염세, 해관세 등에 대부분의 수입을 의존했다. 이런 경제적 난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외국의 차관을 도입하는 것 자체가 불필요한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위안스카이가 개인적 권력욕을 위해 약법까지 무시하고 이를 졸속으로 처리해서 그렇지.
3. 전개
3.1. 은행단의 무리한 요구
1909년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4개국이 중국 내부의 이익을 보호받기 위해 4개국 은행단을 결성했다. 이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청나라에 많은 압력을 가했다.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붕괴된 이후 출범한 탕사오이 내각은 4개국 은행단의 압력을 피해 벨기에로부터 차관을 들여오려 했으나 4개국 은행단의 방해로 실패했고 위안스카이는 난징 임시정부를 견제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4개국 은행단에 700만냥의 긴급융자를 요청했다. 4개국 은행단은 이에 응했다. 이후 위안스카이는 염세를 담보로 6천만 파운드의 차관을 추가적으로 요청하면서 전도금을 요구했다. 이에 4개국 은행단은 4개국 은행단에게 중국이 필요로 하는 대부금을 우선적으로 공급할 권리를 요구하면서 다른 나라에서 더 유리한 조건으로 차관을 빌리지 말 것을 요구했다. 심지어 중화민국 매월 예산에 외국 고문관이 주재하며 그것을 검사, 승인하고 군대 해산에 외국 무관의 입회, 병사로부터 무기를 회수할 때마다 그것을 수표로 바꾸어 은행에서 현금과 교환할 것 등 매우 무리한 조건을 강요했다. 그런데 위안스카이는 권력욕을 위해서 이런 매국적 조건을 승인했다.4개국 은행단은 외국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견제할 것을 우려하여 일본 제국과 러시아 제국에게 4개국 은행단에 가입할 것을 제안했다. 일본과 러시아는 만몽에서 일본과 러시아의 특수권익을 존중한다는 조건으로 참가하여 4개국 은행단은 6개국 은행단으로 거듭났다. 6개국 은행단은 연리 5%의 총 7400만 파운드의 차관을 지불기간 5년, 염세 담보로 하여 빌려줄 것을 제안했다. 그렇다면 세관이나 기타 기관이 모두 6개국 열강의 손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하여 위안스카이조차 이 조건이 지나치다는 입장을 보였으나 6개국 은행단은 차관의 담보보전이라는 명목으로 엽업에 대한 검사 및 회계심사권한을 요구했다.
3.2. 차관의 조인
그러던 중 상황의 진전이 있었다. 1913년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미국이 불간섭주의를 표방, 기존 6개국 은행단이 중국에 강요하는 조건이 중국의 행정적 독립성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6개국 은행단에서 탈퇴한 것이었다. 6개국 은행단은 5개국 은행단이 되었고 이에 상당한 충격을 받은 5개국 은행단은 조건을 완화하여 중화민국의 염세수입을 담보로 2500만 파운드를 차관해주겠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 역시 가혹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이 2500만 파운드 중에서 중국이 받을 수 있는 것은 2100만 파운드에 불과했으며 1960년까지 6800만 파운드를 상환해야 했고 2100만 파운드 중에서도 상당한 양은 외채에 대한 상환이란 명목으로 받지도 못하는 것이었다. 쑨원은 영국과 프랑스 외교공관을 방문하여 차관에 조인한다면 각국 은행에 대한 보이콧 운동이 일어날 것을 경고하고 차관 조인 반대 운동을 벌였다. 국민당 참의원 의장 장쥐와 부의장 왕정팅이 위안스카이를 만나 반대를 표명하기 위해 면담을 요청했으나 무시당했다. 국민당 의원들은 은행단에 접촉했으나 역시 소득이 없었다.쑹자오런 암살의 결정적 증거가 발표되었던 1913년 4월 26일 심야, 위안스카이는 국무총리 자오빙쥔, 재정총장 주학희, 외교총장 루정샹 등을 파견하여 회풍은행에서 5개국 은행단과 <선후차관(善後借款)>이라 불리는 차관 교섭에 조인하게 했다. 이에 국민당 의원들과 조인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회풍은행 출입구를 봉쇄하여 조인을 저지하려 했으나 4월 27일 새벽 2시 30분, 협정이 체결되었고 자오빙쥔과 주학희는 항의하는 의원과 시위대를 피해 뒷문으로 달아났다. 격렬한 항의를 예상한 5개국 은행단은 국민당의 세력이 강한 중국 남부에서 자신들에 대한 보이콧 운동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여 4월 27일 일단 차관의 지불을 잠정유예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5월 2일 쑨원은 런던의 친지 컨트리로 <외국 정부와 인민에게 고하는 글>을 발표하여 의회정치를 파괴하는 위안스카이의 자금원을 봉쇄하여 위안스카이가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3.3. 반원세력의 격앙
이후 강서도독 리례쥔, 안휘도독 백문울, 광동도독 후한민 등이 격렬히 차관을 성토했고 중의원에서 대차관이 위법임을 결의, 국민당이 위안스카이에 대한 탄핵안을 제출했다. 참의원에서는 진보당이 차관을 얻기 어려운 상황에서 용케 구한 차관이니 차관을 잘못 사용되었을 때에 내각이 책임을 진다는 조건으로 상황을 중재하려 했으나 위안스카이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350만 파운드를 추가로 몰래 차관한 사실이 폭로되자 위안스카이에게 우호적인 진보당도 격노하여 위안스카이를 성토하게 되었다. 위안스카이는 자오빙쥔을 경질하여 직예총독으로 좌천시키고 주학희 역시 경질하여 국회를 달래려 했으나 이미 여론은 너무도 격앙된 후였다.쑨원은 쑹자오런 암살 사건과 이 사건 때문에 위안스카이를 토벌하자는 군사적 궐기를 요구하고 호남도독 탄옌카이와 광동도독 후한민에게 연락하여 거병을 주문하였으나 두 도독 모두 시기상조라고 반대하고 황싱 역시 법에 의한 타도를 주장하면서 무력궐기는 흐지부지되었다. 안휘도독 백문울은 "정부의 차관이 의원의 결의를 거치지 않고 조인되었음은 입헌국가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다."라고 타전하며 격렬히 항의한 후 쑨원에게 안휘성에서 거병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쑨원이 위안스카이의 세력과 인접한 안휘성에서의 궐기는 무리라고 판단하여 이 역시 무산되었다. 그 사이 위안스카이는 국민당의 기반이 될 안휘, 광동, 호남의 도독들을 해임하고 국민당에 대한 외국의 지원을 차단하는 한편 국민당에 대한 무력진압을 준비하고 있었다. 국민당이 궐기하지 않자 5개국 은행단의 차관도 결국 위안스카이에게 제공되어 그의 군자금이 되었다.
4. 결과
결국 1913년 7월 12일, 리례쥔이 호구포대에서 독립을 선포하면서 계축전쟁, 즉 제2차 혁명의 포문을 열었지만 위안스카이에게 2달 만에 진압당하고 만다. 위안스카이는 1913년 10월 10일 부정선거를 통해 정식 대총통에 취임했고 신약법을 통과시켜 '초급총통제'로 불리는 황제적 총통제를 실시했으며 1914년 1월 10일 중화민국 국회 해산을 단행했다. 여기에도 만족못한 위안스카이는 1915년 12월 12일 홍헌제제를 선포함으로 아예 황제에 오르려 하지만 호국전쟁이라는 전국적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5. 참고문헌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원세개 평전, 허우이제, 지호.
- 손문평전, 해롤드 시프린, 지식산업사.
- 아편전쟁에서 5.4운동까지, 호승, 인간사랑.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1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중국 근현대사 2권 근대국가의 모색(1894~1925), 가와시마 신, 삼천리.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6. 관련문서
- 신해혁명(1911.10.10~1912.2.12)
- 장전우 사법살인 사건(1912.8.16)
- 쑨원-위안스카이 회담(1912.8.24)
- 쑹자오런 암살 사건(1913.3.20)
- 계축전쟁(1913.7.12~1913.9.21)
- 중화민국 국회 해산(1914.1.10)
- 홍헌제제(1915.12.12)
- 호국전쟁(1915.12.25~1916.7.14)
- 부원지쟁(1916~1917)
- 장훈복벽(1917.7.1~1917.7.12)
- 1차 호법운동(1917.7.17~1918.5.21)
- 호법전쟁(1917.9.19~1918.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