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 북양정부 국무총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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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24대 국무총리 | ||
정체 | 孫寶琦 | |
간체 | 孙宝琦 | |
한국식 독음 | 손보기 | |
영문 | Sun Baoqi | |
자 | 막한(幕韓) | |
호 | 맹진노인(孟晉老人) | |
출생 | 1867년 4월 26일 청나라 절강성 항주 | |
사망 | 1931년 2월 3일 중화민국 상하이시 |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
학력 | 가정교육 | |
직업 | 외교관, 정치가 | |
국무총리 재임 기간 | 대행 1914년 2월 12일 ~ 1914년 5월 1일 24대 1924년 1월 12일 ~ 1924년 7월 2일 |
1. 개요
청나라 말기의 관료이자, 중화민국의 제24대 국무총리이자, 외교관.2. 생애
2.1. 초기 이력
청나라 대신 시절의 쑨바오치 |
1867년, 절강성 항주에서 함풍제의 스승을 맡았던 손이경의 아들로 태어났다. 1886년 관직에 들어 1895년까지 형부에서 일하다가 1898년 외교부로 인사이동되었으나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는 바람에 해외 파견이 미루어졌다. 1900년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 8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자 광서제를 모시고 서안으로 피신했다. 1901년 독일,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공사관의 직원으로 일했으며 1902년 7월 출사대신에 임명되어 프랑스 공사의 자격을 갖게 되었다. 1904년, 러시아공사 후웨이더, 영국공사 왕대섭, 미국공사 양성과 함께 서태후에게 정치개혁을 요구하였고 1906년 귀국하여 자의국 의장에 임명, 국가행정조직을 점검하였다.
1907년에 독일 공사가 되었다. 1908년 귀국하여 천포철로대신에 임명되었고 1911년 산동순무가 되었다. 산동순무 재직 시절 정치에서 물러나 위안스카이의 일곱번째 아들 원극제와 자신의 다섯번째 딸을 약혼시킴으로 위안스카이 파벌에 들어갔다. 이후 위안스카이가 긴밀히 통하며 서신을 주고받았고 조정에서 위안스카이의 세력을 키워 신해혁명 발발 이후 위안스카이가 복직하는 데에 일조했다.
2.2. 신해혁명 시기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하여 우창과 상하이가 혁명군의 손에 들어가자 1911년 11월 5일, 산동성의 신사, 상인, 학생 천여명이 자의국 앞에 모여 청 정부가 독일 제국으로부터 차관을 얻기 위해 산동의 토지를 담보로 하겠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항의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시위의 방향이 바뀌더니 군중은 쑨바오치에게 자의국 의원 왕무곤, 일본유학생이며 자의국 비서장인 정세택을 대표로 보내 8가지 요구를 전달했다.- 1. 청 정부는 외국차관을 얻어 군비로 사용하여 동표를 살육할 수 없다.
- 2. 정부는 속히 휴전서를 발표하여 남방측의 어떤 요구든 받아들여라.
- 3. 산동성 안에 있는 신군을 산동성 밖에 파견해서는 안된다.
- 4. 다른 성으로 보내게 되어 있는 조세를 사용하지 말고 산동성의 군비와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라.
- 5. 헌법에 중국이 연방정체라는 것을 명백히 규정하라.
- 6. 외관제, 지방세는 모두 산동성에서 만든 규정에 따른다.
- 7. 자의국장장을 곧 산동성의 헌법으로 삼되 산동성에서 독자적으로 개정할 수 있다.
- 8. 산동성은 지방을 보위할 군대를 가질 수 있다.
이들은 중앙정부가 이 중 한가지라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즉각 독립을 할 것이니 3일 안으로 회답할 것을 요구했다. 11월 7일, 산동전성각계연합회가 결성되어 하제천을 회장으로 추대, 산동성의 순경도로 임명되어 경찰권을 장악했다. 11월 8일, 쑨바오치는 이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임시정부 수립, 각계연합회를 바탕으로 한 임시의회 수립을 선포하였으며 중앙정부가 완전무결하게 조건을 받아들이면 원상회복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11월 9일, 산동 신군 5사단 10여단장 가빈경이 연합회에 완전 독립을 요구하자 11월 12일, 연합회 총회는 쑨바오치를 대도독으로 추대하고 가빈경을 부도독으로 삼아 11월 13일 쑨바오치의 승낙을 받아냈다. 쑨바오치는 동맹회의 독립 선언 요청에 "산동성 전체 인민은 지금부터 청 왕조와의 일체의 관계를 단절하며 (...) 산동성은 중화민국 군정부에 가입한다."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베이징에서 위안스카이가 복직하여 권좌에 앉고 신군 5사단의 다른 부대들이 독립 취소를 요구하는 무력시위를 벌이자 독립선언 직후 베이징에 전보를 보내 독립선언이 진심이 아니라고 밝혔던 쑨바오치는 11월 24일, 독립을 취소하고 위안스카이와 결탁하였다.
2.3. 민국 시대의 공직생활
1912년 선통제가 퇴위하고 청나라가 멸망하자 쑨바오치는 위안스카이의 측근으로 활동하였다. 1913년, 쑨원의 국민당이 위안스카이에 맞서 계축전쟁을 일으키려 하자 쑨바오치는 이성탁 등과 함께 위안스카이를 위하여 일본에 파견, 일본이 쑨원을 원조하지 못하도록 로비하였다. 계축전쟁이 끝난 후 쑨바오치는 1913년 쑹자오런 암살 사건과 선후대차관 사건으로 사퇴한 자오빙쥔에 이어 임명된 4대 국무총리 슝시링 밑에서 외교총장에 임명되었다. 이는 슝시링의 의지가 아니라 위안스카이의 강요에 의한 것으로 슝시링은 이에 불만을 품고 쑨바오치의 외교총장 임명 발표를 연기해달라고 요청했다. 허나 정부를 장악하려는 위안스카이의 의지가 막강하였으므로 9월 11일 성립된 슝시링 내각에서 쑨바오치는 끝내 외교총장에 임명되었다. 외교총장 시절 루정샹의 외교부 개혁 정책을 이어받아 외교부의 전문화, 직업 외교관 양성에 노력을 기울였다. 융유태후가 죽자 자금성에 조문을 갔는데, 국무총리 이하 문무백관들이 모두 청조 시절의 대례복으로 갈아입었는데 혼자서만 양복을 입고 들어왔다가 노내선을 비롯한 청나라 유신들이 네놈은 어느 나라 사람이냐, 너는 누구의 아들이냐 라고 마구 욕설을 퍼부으며 그를 조리돌렸고 이에 자기는 인간도 아니라고 자아비판해야 했다고 한다.이어 중화민국 국회 해산으로 중화민국의 정당 정치가 무너지고 슝시링이 사직하자 위안스카이는 쑨바오치를 국무총리 대행으로 임명하였다. 이후 5월에 쉬스창이 국무총리에 임명됨에 따라 대행에서 물러났다. 1915년까지 외교총장으로 재임하다가 일본이 21개조 요구를 강요하자 항의의 표시로 사임하고 루정샹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이후 심계원 원장을 하다 1916년 돤치루이 내각에서 재정총장에 임명되었고 6월 한야평공국(汉冶萍公司) 이사장을 겸했다. 이후 재정총장직을 진금도에게 내주었으나 세무독판 량스이가 홍헌제제에 책임을 지고 하야하자 6월 23일 신임 세무독판에 임명되었다.
1919년 초상국 이사장이 되었으며 1920년 봄에 경제조사국 총재, 1922년 1월에 장강수도토론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22년 4월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선후위원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2.4. 중화민국 24대 국무총리 재임과 사망
1924년 차오쿤 대총통에 의해 24대 국무총리이자 차오쿤 정부의 첫 국무총리로 임명되었으나 재정총장 왕커민과의 불화로 6개월만에 물러나고 구웨이쥔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1925년 돤치루이 임시 집정에 의해 송호상부독판에 임명되었고 8월에 소련 공사로도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926년 중법대학 이사장이 되었으며 1927년 구웨이쥔 내각이 정식으로 출범하자 외교 토론회 회장에 임명되었다.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로 인하여 베이징이 국민혁명군의 위협을 받자 공직에서 사퇴하여 관동주로 피신했고 1929년 장폐색을 치료받기 위해 영국령 홍콩으로 이주했다. 1930년 상하이와 항저우를 여행했으나 병환이 악화되어 1931년 상하이에서 사망했다.3. 기타
본처이외에 첩이 4명 있었다. 8남 16녀를 두었다. 사위중에는 위안스카이, 아이신기오로 이쾅의 아들도 있었다.4. 주요 경력
중화민국 역대 외교총장 | |||||||
대행 | → | 4대 | → | 5대 | |||
차오루린 | → | 쑨바오치 (1913년 9월 11일 ~ 1915년 1월 27일) | → | 루정샹 |
5. 참고문헌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원세개 평전, 허우이제, 지호.
- 중국의 공화혁명, 민두기, 지식산업사.
- 신해혁명사, 민두기, 민음사.
- 아편전쟁에서 5.4운동까지, 호승, 인간사랑.
- 만주사변 이후 남경국민정부 직업 외교관의 역할 연구 : 1931-1936, 석미자,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