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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3 17:54:23

죽서기년



1. 개요2. 고본 죽서기년
2.1. 오제기(五帝紀)2.2. 하기(夏紀)2.3. 은기(殷紀)2.4. 주기(周紀)2.5. 진기(晉紀)2.6. 위기(魏紀)
3. 금본 죽서기년
3.1. 오제기(五帝紀)3.2. 하기(夏紀)3.3. 은기(殷紀)3.4. 주기(周紀)3.5. 진기(晉紀)3.6. 위기(魏紀)
4. 같이보기

1. 개요

중국편년체 역사서. 대나무에 기록된 편년체 역사라는 의미에서 《죽서기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혹은 《급총기년》(汲冡紀年), 《급총서》(汲冡書)로 불리기도 한다.

전설적인 삼황오제의 시대부터 전국시대 삼진(三晉) 분립 후의 위나라(魏) 양왕(襄王)까지의 연대기가 기록된 책으로, 전한대 무렵에는 책이 이미 소실되었다.

위·촉·오 삼국 통일후의 서진대인 279년 또는 281년, 농부 부준(不准)이 위나라 양왕[1]무덤도굴했는데 그 안에서 대나무편이 대량으로 나왔다. 그것들을 서진의 관리 속석이 종이에 옮겨 적었는데 그중에 《죽서기년》이 있었던 것이다. 죽서기년에는 《사기》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도 다수 수록된 덕분에 선진시대의 또다른 이면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받는다. 《사기》의 연대 오류를 《죽서기년》에 맞춰서 수정하기도 한다.[2]

안타깝게도 북송시대에 다시 책이 사라져버렸다. 명나라대에 《죽서기년》이 다시 등장했지만 위작이었고, 1917년 왕국유(王國維)[3]가 각종 고대 문헌에 인용된 내용들을 모아서 《죽서기년》을 복원하는 작업을 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참고로 명대 위작본을 《금본 죽서기년》(今本竹書紀年), 왕국유가 복원한 죽서기년을 《고본 죽서기년》(古本竹書紀年)이라고 부른다.

일부 내용은 다른 사서에서 보이는 미화를 걷어내고 서술한 점이 특징이다. 예를 들면 제요 도당씨가 자신의 왕위를 제순 유우씨에게 선양했다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얘기와 달리, 《죽서기년》에는 순이 요의 덕이 쇠하자 왕위를 빼앗고 감금했다고 기록되어 있다.[4] 또 상나라 건국 초 명재상 이윤이 황음무도한 태갑을 대신해 섭정했다는 얘기와 달리 《죽서기년》에는 이윤이 태갑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가 세력을 기른 태갑에게 살해당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 외 하나라 초 인물 백익이나 주나라 공화시대 관련 이야기도 주요 사서엔 없는 내용이 있다. 그래서 후대의 특정 세력이 기록을 의도적으로 윤색했을 가능성도 일각에선 제기된다. 물론 원본이 사라졌을 뿐더러 《죽서기년》 내용이 무조건 다 맞다고 볼 수도 없기 때문에 여러 가설이 나올 수는 있다.

현대 중국에서는 《금본죽서기년》은 몇몇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인정하지 않고 《고본죽서기년》만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 아무래도 《고본죽서기년》의 편집자 왕국유갑골문의 대가였던지라 《고본죽서기년》의 내용이 갑골문과 일치하는 것이 많아서이다.

2. 고본 죽서기년

2.1. 오제기(五帝紀)

《竹書》云:昌意降居若水,產帝乾荒。
《죽서[5](竹書)에 이르기를 창의(昌意)[6]가 약수(若水)에 내려와 살다가, 건황(乾荒) 임금[7]을 낳았다.
산해경》 <해내경(海內經)> 주(注)

《汲冢書》云:黃帝仙去,其臣有左徹者,削木作黃帝之像,帥諸侯奉之。
《급총서》에서 이르기를, 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그 신하 중 좌철(左徹)이라는 사람이 나무를 깎아 황제의 목상을 만들고, 거느리는 제후들로 하여금 받들어 모시도록 했다.
《의림(意林)》 <포박자(抱朴子)>

《抱朴子》又曰:《汲郡冢中竹書》言:黃帝既仙去,其臣有左徹者,削木為黃帝之像,帥諸侯朝奉之。
또《포박자》에서 이르기를, 《급군총중죽서》에서 말하기를 '황제가 신선이 되어 떠나자, 그 신하들 중 좌철이라는 사람이 나무를 깎아 황제의 목상을 만들고, 거느리는 제후들로 하여금 조회에서 받들어 모시도록 하였다'고 했다.
《태평어람(太平御覽)》 권79 <황왕부(皇王部)>

《抱朴子》曰:張華《博物誌》曰:黃帝仙去,其臣左徹者削木為黃帝像,帥諸侯奉之。亦見《汲冢書》。
《포박자》에서 이르기를, 장화(張華)의 《박물지》에서 말하기를 '황제가 신선이 되어 떠나자, 그 신하들 중 좌철이라는 사람이 나무를 깎아 황제의 목상을 만들고, 거느리는 제후들로 하여금 조회에서 받들어 모시도록 하였다'고 했다. 이 대목은 《급총서》에도 보인다.
《태평어람》 권396 <인사부(人事部)>

《竹書》曰:顓頊產伯鯀,是維若陽,居天穆之陽。
《죽서》에서 이르기를:전욱이 백곤[8]를 낳아, 이가 곧 약양인데, 천목[9]의 남쪽에서 살았다.
《산해경》 · <대황서경(大荒西經)> 주(注)

《竹書紀年》曰:堯元年景[10]子。
《죽서기년》에서 이르기를:요 원년은 경자년이다.
《수서(隋書)》 · <율력지(律歷志)>

《括地誌》云:……《竹書》云:昔堯德衰,為舜所囚也。
《괄지지》에서 이르기를, '《죽서》에서 말하기를 옛날 요임금의 덕이 쇠해지자, 순임금이 그를 가두었다'고 한다.
《사기(史記)》<오제본기(五帝本紀)> 정의(正義)

《汲冢竹書》云:舜囚堯於平陽,取之帝位。
《급총죽서》에서 이르기를, 순임금이 평양에서 요임금을 사로잡고 임금의 자리를 빼앗았다.
《광홍명집(廣弘明集)》권11 법림(法琳)의《대부혁폐불승사(對傅奕廢佛僧事)》.

《汲冢書》云:舜放堯於平陽。
《급총서》에서 이르기를, 순임금이 평양에서 요임금을 풀어주었다.
《사통》<의고>

《括地誌》云:……《竹書》云:舜囚堯,復偃塞丹朱,使不與父相見也。
《괄지지》에서 이르기를...(내용 누락) 《죽서》에서 말하기를, 순임금이 요임금을 사로잡고, 요임금의 아들 단주를 가두고서 아비와 아들이 서로 만나볼 수 없도록 하였다.
사기》 <오제본기> 정의

《括地誌》云:……《汲冢紀年》云:后稷放帝子丹朱於丹水。
《괄지지》에서 이르기를...(내용 누락) 《급총기년》에서 말하기를, 후직(后稷)이 단주를 단수 땅에 방면해주었다.
사기》 <고조본기(高祖本紀)> 정의(正義)

《竹書》亦曰:后稷放帝朱於丹水。
《죽서》에서 또 이르기를, 후직이 주임금(단주를 말한다)을 단수 땅에 방면했다.
산해경(山海經)》<해내남경(海內南經)>

《汲冢紀年》云:后稷放帝子丹朱。
《급총기년》에서 이르기를, 후직이 요임금의 아들 단주를 풀어주었다.
《사기》<오제본기> 정의

命咎陶作刑。《紀年》云。
구도(咎陶)[11]에게 명하여 형벌을 만들게 했다. 이는 《기년》에서 이른 말이다.
《북당서초(北堂書鈔)》 권17 <제왕부(帝王部)>

《汲冢紀年》曰:三苗將亡,天雨血,夏有冰,地坼及泉,青龍生於廟,日夜出,晝日不出。
《급총기년》에서 이르기를, 삼묘(三苗)[12]가 장차 망하려 하자, 하늘에서 피가 비처럼 내리고, 여름에 얼음이 얼었으며, 땅이 갈라져 샘이 솟아났으며, 푸른 용이 사당에 나타나고, 해가 밤에 떴으며, 낮이 되어도 해가 뜨지 않았다.
《통감외기(通鑑外紀)》권1

2.2. 하기(夏紀)

2.3. 은기(殷紀)

2.4. 주기(周紀)

2.5. 진기(晉紀)

2.6. 위기(魏紀)

3. 금본 죽서기년

3.1. 오제기(五帝紀)

3.2. 하기(夏紀)

3.3. 은기(殷紀)

3.4. 주기(周紀)

3.5. 진기(晉紀)

3.6. 위기(魏紀)

4. 같이보기



[1] 혹은 안희왕(安僖王).[2] 사실 사기도 이미 한나라 때부터 원본이 훼손되어 저소손이 내용을 복원한 것도 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3] 갑골문을 대대적으로 연구해 기초를 세운 인물이다. 신해혁명 후에도 혼란스러운 중국의 현실에 비관해 1927년 물에 스스로 뛰어들어 사망했다.[4] 다만 후술되어있듯 풀어주긴 했다.[5] 죽간이라고 함. 대나무로 묶은 책.[6] 황제 헌원씨의 둘째 아들이다.[7] 오제 중 하나인 전욱 고양씨. 전욱은 황제 헌원씨의 손자다.[8] 하(夏)나라 우(禹)왕의 아버지.[9]텐진시에 위치.[10] 병(丙)의 기휘이다. 즉, 요 원년은 병자년이다.[11] 고요로도 읽는다. 요순시대의 신하로 황제의 장남 소호의 후손이다.[12] 중국 남부에 살던 이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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