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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11:11:36

산해경

산 해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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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판본
2.1. 전한시대 유흠의 《산해경》2.2. 동진시대 곽박의 판본인 《주산해경서》와 관련도서2.3. 왕숭경의 《산해경석의》(山海經釋義)2.4. 양신의 《산해경보주》2.5. 오임신의 산해경광주2.6. 서지사항
3. 산해경의 기원에 대한 견해들4. 정체불명의 책5. 기타6. 외부 링크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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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본기>에 의하면 하수곤륜산에서 흘러나온다고 했다.[1] 그 산은 높이가 2,500리이며, 해와 달이 서로 피해 숨으며 빛을 발한다. 산의 정상에는 단물이 솟아나는 예천(醴泉)과 신선이 사는 요지(瑤池)가 있다고 한다. 장건대하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 황하의 근원을 알아냈으니, 어찌 곤륜산을 본 사람이 있었겠는가? 9주(九州)의 산천에 관한 기록은 《상서》의 기록이 사실과 가깝다. <우 본기>나 《산해경》에 기록되어 있는 기이한 사물에 대해서는 나는 감히 말할 수 없노라.
전한시대 사마천
낯선 지방의 생산물 및 강과 육지의 풀, 나무, 새, 짐승, 곤충, 기린, 봉황이 사는 곳과 상서로운 조짐이 보이는 곳 및 이 세상 바깥으로 떨어진 나라나 색다른 종류의 사람들을 기록했습니다. 백익께서는 토지에 따라 공물을 정하고, 사물의 좋고 나쁨을 구별하여 이 책을 지으셨습니다.
<상산해경표> 中 전한시대 유흠(劉歆)

《산해경》을 읽는 세상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 책이 황당무계하여 기피하고, 유별난 말이 많기 때문에 의혹을 품지 않는 이가 없다.
천하에서 지극한 식견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 《산해경》의 의미를 말하기 아렵다. 아! 통달하고 박식한 사람이 이를 거울로 삼을 것이다.
《주산해경서》 中 동진시대 곽박(郭璞)

산과 내의 줄기를 탐색하여 아득한 경지를 두루 살피고 그 가운데에 괴변을 서술하여 백성이 현혹되지 않도록 했으니, 아름답도다! 우의 공덕이여! 그 밝은 덕은 무궁하구나! 본래 신성한 존재가 아니고서야 누가 이 책을 지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후세의 독자들은 이 책을 괴이한 견문을 적은 기록과 비교하고 《제해》[2]같은 책에 견주었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리오?
《산해경소서》 中 청대 학의행(郝懿行)



중국 선진시대에 기록된 신화집 및 지리서. 저자가 누군지에 대한 전통적인 대답은 하나라의 초대 군주인 (禹)왕과 계포 혹은 백익[3]이라는 사람이 지었다는 설인데 이는 전한시대의 유흠이 주장한 이래 다른 중세의 학자들이 그대로 이어받아 계속 주장한 설이다.

하지만 후세로 내려가면 갈수록 이러한 의견들은 여러 번 지적을 받게 되었고 드디어 현대에 오면서 하나라의 우나 백익 같은 태고시대에 살았던 전설적인 가상의 인물이 저술했을 수는 없을 것이라는 기본적인 인식이 형성된 뒤 근대와 현대의 여러 학자들은 대체로 춘추전국시대쯤에 작성되었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지만 이 견해조차 여러 갈래로 나뉘게 된다.

《산해경》의 최초 교정본은 유흠이 쓴 <상산해경표>로 당시 《산해경》의 기존 32편을 18편으로 정리했으며 현재의 《산해경》은 동진시대의 곽박(郭璞)이 《주산해경서》라는 교정본을 내서 정리한 것으로 시작하여 청나라의 학의행이 《산해경소서》를 써서 다시금 교역한 것이다.

이외에도 명나라~청나라 시기의 《산해경》 교정본으로 《산해경보주》, 《산해경석의》, 《산해경광주》, 《산해경교본》 등이 있다.

2. 판본

《산해경》의 원문은 미지의 영역에 있지만 오랫동안 거론되어 온 책인 만큼 판본은 다양하다.

《산해경》의 여러 주석가와 판본들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2.1. 전한시대 유흠의 《산해경》

기록상으로는 최초로 《산해경》이라는 책을 정리해 놓은 판본이지만 그가 쓴 판본 전체는 현재 완전히 복구할 수 없다. 그래서 그가 쓴 《산해경》의 서문인 "<상산해경표>"만 후대의 여러 《산해경》 판본에 수록되어 있을 뿐이다. <상산해경표>는 《산해경》을 정리한 계기 등을 보고하듯이 써내린, 일종의 서론이다.

2.2. 동진시대 곽박의 판본인 《주산해경서》와 관련도서

현재까지 복원에 성공한 판본 중 가장 오래된 판본은 바로 동진시대 곽박[4]의 《산해경》 판본이다. 《산해경》은 명나라~청나라 시기때 후대 학자들에 의해 활발히 연구되고 개편되었는데 《산해경》 개편본의 대부분은 이 곽박의 판본을 기본으로 하여 그 위에 각 학자가 자신의 주석을 덧붙인 것이 대부분이다. 한국에 출간된 정재서 교수의 《산해경》에서도 당연히 곽박의 주석을 인용하고 있다.

이 곽박의 《산해경》은 아래 소개될 《도장》(道藏), 《사부총간》(四部叢刊), 《고금일사》(古今逸史)라는 총서에 수록되어 출판되어 왔으며, 이 가운데 가장 대중적인 것은 《고금일사》에 수록된 것이라고 한다.

곽박이 주석을 붙인 《산해경》의 원문을 살펴보면 동진시대 당시로서 얻을 수 있는 방대한 지식을 기반으로 다채롭게 주석을 붙여 놓았다. 옛 사람들에게도 미지의 존재나 다름없었던 《산해경》이라는 책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기 위해 주석을 붙여 놓은 것이다. 곽박이 주석을 붙여 놓은 문장과 그 주석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동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에 조선과 천독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 사람들은 물가에 산다.[곽박주1]

이곳의 어떤 짐승은 생김새가 여우 같은데 9개의 꼬리가 있다[곽박주2]

곤민국이 있는데 성은 구씨이고, (기장을)먹고 산다. 왕해라는 사람이 있어 두 손에 새를 잡고 지금 그 머리를 먹고 있다.[7] 왕해가 유역과 하백에게 기른 소를 맡겼는데 유영이 왕해를 죽이고 소를 차지했다.[곽박주3]

첫 번째 예문에서처럼 본문에서 강이나 산의 이름을 언급할 때마다 그 지명에 대한 고증을 제시하기도 하고, 두 번째 예문에서처럼 《산해경》에 나오는 기이한 동•식물을 부르는 명칭을 정립하거나 추가적인 설명을 붙이기도 했다. 그 유명한 구미호의 명칭을 문헌에 최초로 기록한 것이 곽박이다. 세 번째 예문에서처럼 《산해경》 본문에 등장하는 역사적인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고증을 시도한 흔적도 있다. 그리고 자세히 알지 못하는 내용이 나오면 솔직하게 모르겠다는 식의 주석까지 달아 놓았다.

2.3. 왕숭경의 《산해경석의》(山海經釋義)

이 판본은 청나라 시대인 1690년에 판각된 목판본으로 중각(重刻)본이고, 총 18권 6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판식의 크기는 반곽이 세로 22.2, 가로 13.8이고 사주단변을 이루고 있으며, 반 페이지에 9행마다 19글자로 구성되어 있다. 계선이 있고, 백구에 상혹어미가 있으며 주는 쌍행으로 쓰여 있다.
파일:도상산해경1.png
<도상(圖象)산해경>의 일부

당연히 위에 언급된 곽박의 <산해경서>를 첫머리에 놓고, 그 뒤에 왕숭경 자신이 그 위에 주석과 자신의 의견을 덧붙인[26] <서산해경석의>를 실어 놓았다. 한유[27]들의 <중각산해경석의서>와 유흠(劉歆)의 <상산해경표>,그리고 <산해경총목>을 순서대로 수록해 놓았으며, 그 뒤를 이어 조유원[28]이 쓴 <산해경석의발>(山海經釋義跋)을 실어 놓았다.
파일:도상산해경2.png파일:도상산해경3.png파일:도상산해경4.png
<도상산해경>에 추가된 삽화들

그 뒤에는 <도상산해경>(圖像山海經)을 수록해 놓았는데 여기서 《산해경》의 삽화 75폭이 추가되었고, 당시까지의 《산해경》 삽화집이 하나의 캐릭터에 대해 특징만을 잡아내어 간결하게 그려냈던 것과는 달리 여기서 추가된 75폭의 그림은 캐릭터를 좀더 정밀하게 묘사하고 배경까지 그려넣고 있다.

그리고 이 <도상산해경>의 뒤를 이어 《산해경석의》 18권이 실려 있다. 왕숭경 저 《산해경석의》의 구성은 원문/곽박 주/왕숭경 주 식으로 역시 다른 《산해경》 판본과 다름없이 원문과 곽박의 주석을 기본으로 하여 그 위에 자신의 주석을 달아놓았고, 왕숭경의 주석 및 그 주석이 달린 문장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남산경>의 첫머리는 작산이라는 곳이다. 작산의 첫머리는 소요산이라는 곳인데 서해변에 임해 있으며, 계수나무가 많이 자라고 금과 옥이 많이 난다.(중략) 이곳의 어떤 나무는 생김새가 닥나무 같은데 겉이 검다.[29]
(중략) 여궤수가 여기에서 나와 서쪽으로 바다에 흘러드는데 그 속에는 육패가 많고, 이것을 몸에 차면 기생충 병이 없어진다.[30] [31]

왕숭경은 정통적인 유학관을 지녔던 인물이었던지라 《산해경》에 등장하는 상상의 동•식물이나 문화 등에 관해서는 대부분 그런 것이 실제로 있을 턱이 없다는 태도를 취했고, 《산해경》의 비현실적인 내용에 대해 나름의 실증적이면서 현실적인 해석을 제시한 것이 유의해 볼 만한 점이다. 더 예를 들면,
다시 동쪽으로 500리를 가면 녹오산이라는 곳이 있는데 산 위에는 초목이 자라지 않고 금과 돌이 많다. 이곳에 이름을 고조(蠱雕)라고 하는 짐승이 있는데, 생김새가 수리 같고 뿔이 있다. 그 소리가 어린애의 음성과 같으며 사람을 잡아먹는다.[32]

그러니까 《산해경》에 있는 상상의 동물에 대해 실제로 그런 동물이 존재할 리 없고, 사람들이 실제 있는 동물을 보며 착각했다는 식으로 주석했다. 유교적인 논리하에 합리적인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 맞지 않은 내용에 대해서는 이런 비판적이고 합리적인 해석을 한 것이다.

이런 해석이 담긴 주석은 너무 딱딱하며 오히려 왕숭경 본인의 편향적이고 주관적인 서술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단점으로 지적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왕숭경의 《산해경석의》는 동진시대 곽박의 판본인 《주산해경서》이후 1,000여 년의 공백기를 깨고 두 번째로 나온 《산해경》 판본이라는 데 큰 의의를 지닌다.

따라서 왕숭격의 《산해경석의》는 명나라 때 유행한 수많은 《산해경》 판본 출시의 스타트를 끊었다고 볼 수 있다.

2.4. 양신의 《산해경보주》

양신 역시 곽박의 《주산해경서》를 기본으로 하여 자신의 주석을 붙인 《산해경보주》(山海經補注)라는 판본을 만들었다. 이 《산해경보주》와 관련된 판본으로는 숭문서국[33]에서 판각한 《백자전서》(百子全書)본, 《승암외집》(升庵外集)본, 《함해》(函海)본, 《심기도설》(藝海珠塵)본, 그리고 일본 마에가와 대학교의 《영당 산해경》이라는 제목 그대로 판각한 판본 등이 있다.

양신의 판본은 주석의 방식이 당시로서는 특이했는데, 기존의 주석가인 곽박이나 왕숭경이 원문 아래에 주석을 덧붙이는 행태를 취한 것과는 달리, 원문을 통째로 따로 수록해놓고 자신이 쓴 <산해경보주>에다가 [원문에서 주석할 일부 문장 발췌/곽박의 주석/양신 자신의 주석] 이 형식으로 글을 써 본문과 분리된 책 한 권을 따로 더 써낸 것. 그리고 양신이 주석한 산해경의 문장과 그 주석의 예시는 다음과 같다.
천지산의 어떤 짐승은 생김새가 토끼 같은데 쥐의 머리를 하고 그 등으로 날며 비서(飛鼠)라고 한다.[곽박주5][양신주1]

곤륜허는 처제의 하계의 도읍이다. 여덟 구석의 바위굴과 적수의 물가가 있는데 동이[36]의 예[37] 같은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이 구름의 바위에 오를 수 없다.[곽박주6][양신주]

필원[40]은 양신의 주석본에 대해 충분히 실증하지 않은 채로 서술했다고 비판했다. 곽박은 당시에 구할 수 있었던 서적자료를 충분히 활용하여 당시로서는 비교적 신뢰감 있고 객관적으로 주석을 달았던 반면, 양신은 믿을 만한 서적에서 정보를 인용하거나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닌데 자신의 개인적인 추측을 기반으로 한 주관적인 독자연구를 나열해 산해경을 주석하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이런 내용적인 한계도 있지만, 주석의 형태나 구조 면에서 새로운 시도를 했다는 점은 높이 살 만하며 서문에서 하나라 우임금의 구정[41]에 새겨진 그림을 보고 문장으로 정리한 것이 <산해경>이라는 견해에 반박하면서 산해경의 성립 시기 및 성립 방식에 대한 논의를 제기하여 이후 <산해경>의 정확한 유래를 연구하는 데에 하나의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2.5. 오임신의 산해경광주

이상의 편목을 살펴보면 먼저 시소병[59]이 쓴 <산해경광주서>와 오임신 본인이 쓴 또다른 <산해경광주서>를 순서대로 실어 놓았으며,그 뒤어 <산해경도총목[60]> 영기[61],이역[62] 등의 다섯가지로 분류하여 수록해놓았다. 다음에는 <산해경> 본문의 내용을 토대로 각 차경[63]의 지리적 범주를 정리해 놓고,차경(次經)의 순서가 정해지게된 원인 및 산/광물 등 경문과 관련된 내용을 정리,검토해 놓은 <독산해경어[64]>와 고대 전적들에 기록된 <산해경> 관련 내용들을 정리해 놓은 <산해경잡술[65]>이 실려 있다. 이어서 <산해경도>가 위의 편목에서 볼 수 있듯 영기/이역/수족/우금/인개[66] 의 다섯 가지로 분류되어 수록되어 있고,<산해경광주> 18권이 그 뒤에 있다. 그리고 <산해경도>에 대한 발문이 가장 뒷부분에 자리하고 있다.

오임신의 <산해경광주>는 곽박이 주석을 붙인 <산해경>을 바탕으로 하여 작자의 방대한 지식을 동원하여 그 주석을 보충/보완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그 구조는 [원문/곽박 주/오임신 주]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남산경>에 있는 그의 주석과 그 문장을 확인해 보면 다음과 같다.
다시 동쪽으로 300리를 가면 靑邱山이라는 곳이다.[곽박주7][오임신주]

<사고전서(四庫全書)>에서는 이 주석본에 대해 "사물의 이름과 형상, 훈과, 산과 내, 길과 거리를 모두 바로 잡았다"고 극찬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오임신이 기이하고 박식한 것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구구절절이 나열한 인용문들이 조금 번잡하다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산해경광주의 장점이자 단점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풍부한 인용문을 주석으로 덫붙여 놓은 것이며, 다른 명나라 시대의 주석본들과는 달리 개인의 주관적인 사상을 담은 게 아니라 고대의 서적들을 두루 인용하여 주석을 덧붙여 놓았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쉽게 말해 주석이 설명충스러운 게 단점이자 장점. 이렇게 주관적인 의견이 아닌 기존의 서적을 이용한 주석 방식은 명나라 때는 드문 방식이었으며, 앞으로 등장할 청나라 시대 <산해경> 주석서들의 기본적인 주석 방식이 된다.

2.6. 서지사항

번호판본명판본사항주석가권수수록사항소장처
1<도장(道藏)>본민국 14년
함분루(涵芬樓)
영인본/필사본
곽박18권상산해경표
산해경도찬
산해경목록
산해경서(序)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2<사부총간(四部叢刊)>본민국 18년
함분루(涵芬樓)
영인명대본/필사본
곽박18권상상해경표
산해경목
산해경서(序)
산해경교감기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3<고금일사(古今逸史)>본함분루(涵芬樓)영인명
방각판/목판본
곽박18권산해경서
산해경목록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4<산해경석의(釋義)>본강희(康熙) 28년
옥당
중무본(重梓本)/목판본
왕숭경18권산해경석의
도상산해경
산해경서
상산해경표
산해경총목
산해경석의발
중판산해경석의
장서각(藏書閣)
5<승암외집(升庵外集)>본만력 44년
각본(刻本)/목판본
양신 산해경보주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6<함해(函海)>본도광(道光) 5년
만권루(萬卷樓)
각본(刻本)/목판본
양신 산해경보주
산해경보주서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7<백자전서(百子全書)>본광서(光緖) 원년
숭문서국(崇文書局)
각본(刻本)/목판본
양신18권상산해경표
산해경보주
산해경도찬
산해경목록
산해경서
산해경후존(後存)
규장각
일본 교토대
인문과학연구소
8<예해주진(藝海珠塵)>본청이당(聽彛堂)
소장각본(所長刻本)/목판본
양신 산해경보주
산해공도찬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9<산해경>본일본 마에가와대학교 영당(前川大 榮堂)
각본/목판본
양신18권산해경도서
산해경표
산해경목
산해경서
국립중앙도서관
일본교토대
인문과학연구소
10<증보회상산해경광주(增補繪像山海經廣註)>본금창서업당(金閶書業堂)
각본/목판본
오임신18권산해경광주
산해경도총목
산해경도
산해경광주일총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11<이십자전서(二十子全書)>본광서 3년 
제강서국(淛江書局)
각본/목판본
필원 - 산해경신교정서
곽박주산해경서
산해경목록
산해경고금편목고
상산해경표
산해경신교정후서
규장각
12<경훈당총서(經訓堂叢書)>본광서 13년
대동서국(大同書局)
각본/석인본
필원 - 산해경신교정서
곽박주산해경서
산해경목록
산해경고금편목고
상산해경표
산해경신교정후서
규장각
13<왕쌍지총서(汪雙池叢書)>본동치 12년~ 광서 31년 
각본/석인본
왕불9권양신주산해경서발일본연구소
14<산해경전소(山海經笺疏)>본도광
해환독루(海還讀樓)
학위행-각산해경전소서
산해경전소서
교간산해경전소서
교금산해경전소서
중각산해경전소후서
산해경서록
산해경전소심정교
감작리성씨
산해경도찬
산해경정궤
규장각
15<격정산해경전소(欫定山海經箋疏)>본도광 20년
상해서국(上海書局)
목판본
학위행-각산해경전소서
산해경전소서
교간산해경전소서
교금산해경전소서
중각산해경전소후서
산해경서록
산해경전소심정교
감작리성씨
산해경도목록
산해경도
산해경도찬
산해경정궤
산해경목록
규장각
16산해경휘설도광25년
백화형(柏華型)
각본/목판본
학위행4권序 序-
17<구서재총서(求恕齋叢書)>본민국 구서제
간본/목간본
오승지6권산해경지리금석서-
18<산해경교주(山海經校注)>본민국 구서제
간본/목간본
오승지6권산해경지리금석서-
19<고본산해경도설(古本山海經圖說)>본2001年 제남:
산동화보출판사
(山東畵報出版社)
마창의18권序言 凡例
索引
-
20산해경1985년 서울:민음사/
1993년
서울:민음사
개정판발간
정재서-개정판 서문 초판 서문
일러두기
해제
상산해경표
주산해경서
산해경소서
주석가에대한소개
차고문헌
원문색인
-

곽박이 쓴 산해경 최초의 판본인 도장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대황동경부터 해인경까지는 후대에 쓰여 산해경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산해경목록총 18권
본문총 30,919자
주석총 20,350자
제목본문주석
남산경 1권 3,547 자 2,107 자
서산경 2권 5,672 자 3,202 자
북산경 3권 5,746 자 2,382 자
동산경 4권 2,240 자 375 자
중산경 5권 4,718 자 3,485 자
해외남경 6권 511 자 622 자
해외서경 7권 537 자 452 자
해외북경 8권 584 자 493 자
해외동경 9권 442 자 595 자
해내남경 10권 364 자 709 자
해내서경 11권 439 자 695 자
해내북경 12권 594 자 495 자
해내동경 13권 624 자 1,495 자
대황동경 14권 864 자 813 자
대황남경 15권 972 자 598 자
대황서경 16권 1,282 자 1,203 자
대황북경 17권 1,056 자 767 자
해인경 18권 1,211 자 967 자

3. 산해경의 기원에 대한 견해들

편목산경해경언급문헌
시기연구자남산경북산경동산경서산경중산경해내경해외경대황경
전한유수백익이 지었다고 기록함상산해경표
후한조엽백익이 지었다고 기록함오월춘추
후한왕충백익이 지었다고 기록함논형
서진장화나라의 우왕이 지었다고 기록함박물지
북위역도원하나라의 우왕이 지었다고 기록함수경주
북제안지추우익이 지었다고 기록함안씨가훈
당나라유지기하나라의 우왕이 지었다고 기록함사통
송나라나필백익이 지었다고 기록함노사
청나라필원우익이 지었다고 기록함주~진시대 때로 비정함유흠이 만듦산해경교정
청나라학의행우하(주 나라의 한 시대)시대에 지어졌다고 함산해경전소
청나라기윤주~진시대에 지어졌다고 함, 미래 세대의 이익을 위해 작성됨사고전서총목
근대노신선진시대의 무당서, 진나라와 한나라 시대에 내용이 더 붙여짐노신1925
근대위치현전국시대 진나라 시대 때 지어진 위서언급안됨위치현1934
근대장심징전국시대 진나라 시대 때 지어진 위서장심징1939
현대육간여전국시대 초나라 사람이 지음전한시대에 만들어짐후한~남북조시기에 만들어짐육간여1957
현대몽문통전국시대 초나라 사람들이 번갈아 만듦초나라 사람이 지음서주중기전~고촉국 사람이 만듦서주 초기~전국시대 파국 사람이 만듦몽문통1962
현대원가전국시대중기~전국시대 말기에 만들어짐전한 초기에 만들어짐전국시대 초기~중기에 만들어짐원가1978
현대모순춘추시대에 만들어짐춘추전국시대 쯤한대에 제작모순1981
현대종치중서주에 은나라 무당 유민들이 와서 초본을 제작, 전국시대 무당이 덧붙임, 진한시대의 문인이 또 보충함종치중1986
현대왕젠쥔전국시대에 초본을 만듦, 진한시대에 보충전국시대에 제작진한시대에 제작전국시대에 제작왕젠쥔2000
현대당세귀하상시대 때 입에서 입으로 구전됨,서주이전 촉나라 사람이 파촉 문화를 통해 전해짐, 전국 중기 초나라에서 문자로 제작됨당세귀2003
현대이풍무산해경의 원시 형태는 주 왕실 혹은 제후국의 지리관계 문서, 무당의 손을 거처 오늘날의 모습이 됐음.

4. 정체불명의 책

지은이 뿐만 아니라 그 실체 역시 오리무중이다.[69] 이런저런 설들이 나오고 있지만 산해경 자체와 산해경의 존재에 대한 언급 이외에는 산해경에 대한 자료도 거의 없으며, 현재까지 여전히 정체불명의 책이다. #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인 전한 시대부터 이미 황당무계한 판타지 소설 취급을 받았으며, 곽박 역시 이런 평가를 염두에 두는 모습을 보인다. #

이름이 산해경인 것에서 볼 수 있듯이 , 바다 등의 지형과 지리에 대한 책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제 지형과는 잘 연결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특정 위치를 설명할 때, 어디서부터 가야 하는지 출발지도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동쪽으로 500리, 서쪽으로 1천 리를 가다보면 00가 있고 그 00에는 XX한 동물이 사는데 그 동물은 @@하다.'는 식으로 설명한다. 각 지역에 대한 설명도 그 곳에 사는 상상의 동물에 대한 기이한 설명이 주류라서 많은 사람들이 산해경은 주변 세상의 풍물을 상상하여 써놓은 중국 신화서 혹은 상상의 동물 도감으로 간주한다. 당연하게도 실제 지리서로서의 가치는 거의 없으며, 그 지리적 배경에 대해서도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한 중국 중심지역인지, 장강 유역인지, 중국 남부지역인지, 중국 동북 발해만 일대인지조차 불분명해 각 지역이 원류라는 많은 설들이 공존한다. 당연히 도대체 어느 시대의 신화나 전설이 반영된 것인지 역시 알 수 없다. 일단 성립시기는 전국시대 후기로 보이지만,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의 영향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기에 일각에서는 동주-서주시대 때 편찬되지 않았냐는 주장도 있다. [70]

단순히 누군가 쓴 소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지리서의 형태인데다 내용도 뒤죽박죽이고 읽기에 쉽지 않은 형식이라 소설이라고 보기에는 대체 왜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졌는가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또한 단순히 장난 삼아 쓰인 글이나 민담의 모음집이라기엔 산해경이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춘추전국시대(선진시대)는 '글을 알고' 어떠한 지식을 '기록할 수 있는' 사람이 굉장히 희귀했던 시대[71]라는 점이 문제.

이걸 순수한 허구의 창작으로 보지 않는 결정적 이유는, 그 내용 중에는 기원전 중국과 동아시아의 역사적인 상황이 기록되어 있고 그 일부 내용이 다른 사서 등에서도 확인되기 때문이다. 정확한 역사서나 지리서로 보기는 어렵지만 또 순수한 허구도 아닌 셈. 한국에 관련된 대표적인 서술로는 조선, 숙신, 예맥, 삼한 등에 대한 언급이 나오고 청구국, 군자국, 대인국, 백민국, 삼위산, 불함산(=백두산) 등 한국 관련 지리적 언급이 나오고, 무엇보다도 고조선을 최초로 언급한 책이 산해경이다. 한반도의 무궁화나 동방예의지국이라는 개념, 백두산 천지에 산다는 뱀 같은 괴수설도 산해경에서 처음으로 제시된 것.

그리고 산해경은 상당히 오래 전부터 판본이 내려오고 내려왔기에 산해경 판본의 변천의 역사는 중국 인쇄의 역사나 서지학의 역사와 한 궤를 같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이 왕궈웨이가 산해경에 언급된 왕해(王亥)가 갑골 문자에 나오는 왕해와 동일인물임을 밝혀내었다. 왕궈웨이는 또한 산해경에 나오는 제준(帝俊)의 俊 글자가 갑골문에서도 판독된다고 보았다. 때문에, 다른 곳에서는 전해지지 않은 모종의 고대의 지식이 반영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꾸준히 전해져 내려 온 고전 서적치고는 중국이나 조선에서 과거에는 별로 연구하지 않은 결정적 이유는, 유교의 가르침으로는 이런 서적은 빼도박도 못하는 괴력난신에 해당하고 공자는 이런 환상적인 것에 마음을 쓰는 것은 군자답지 못한 짓이라고 못 박았기 때문이다.[72] 애초에 고대 전한시대때 부터 판타지 소설로 취급 받았던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내용 자체가 전근대 기준으로도 굉장히 판타지스러웠기에 진지하게 연구할 가치조차 느끼기 힘들었을 것이다.

근래에는 고대 중국인의 지리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역사적 가치나 신화집으로서의 성격이 주목받는다. 현대까지도 전해져 오는 수많은 떡밥(치우, 황제의 싸움 등)의 원전으로서 가치가 높으며 번역판도 제법 있는 편. 한국어로는 정재서 교수의 역본이 있다. 사기를 저술한 사마천은 믿을 수 없는 책이라고 했지만 여기서 인용한 이야기를 사기에 써 고대사 떡밥의 원인을 만들기도 했다.

5. 기타

오만가지 환상종들이 등장하는 책으로의 가치도 높다. 또한 신이경(神異經)이라고 하는 유사한 책이 후대에 나오기도 했다. 아마 산해경의 내용을 기반으로 중국풍의 환상적 현대적 TRPG 시스템을 만들어 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요약하면, 중국 판타지의 원류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2016년 포켓몬 GO가 전세계적으로 히트를 치자 중국에서 산해경에 등장하는 요괴들을 포획하는 짝퉁 게임 산해경 GO출시 됐다. 긴고아[73]를 이용해 요괴들을 잡는다고 한다.

박찬욱의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탕웨이가 읽고 있는 책이다.

황지우 시인은 <산경山徑>이라는 제목의 <산해경>을 패러디한 시를 쓰기도 했다. 황지우의 시 중 독보적인 길이를 자랑하며, 산해경의 형식을 빌어 당시 80년대 군사정권 하의 암울한 현실을 풍자한 것이 일품. 시집 <게 눈 속의 연꽃>에 수록.

전문 보러가기
산경山徑

무릇 경전은 여행이다. 없는 곳에 대한 지도이므로.
누가 아빠 찾으면, 집 나갔다고 해라.
이타심은 이기심이다. 그러나 이기심은 이타심은 아니다.
내가 군대에서 배운 유일한 교훈은, 위장의 사활성死活性이었다.
요즘은 종일 집구석에 있소. 어디든 갈 수 있어요.
무릇 도道는 교환과 방황을 위해 있다. 아니, 도道는 약탈이다.
방광에 가득찬 한숨ㅡ게야, 바다 한가운데를 가보았느냐!

1. 남산경南山經

(생략)

회현 마루에서 남산 꼭대기까지에는 닭머리에 살무사 꼬리를 단, 커다란 거북이가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는데, 이름을 계불가鷄拂蚵라 한다. 이 새의 염통은 욕망이다. 그것이 그것을 날게 한다.

남산 꼭대기에는 폭군 희熙를 죽이고 희의 양아들 낙지樂漬에게 죽임을 당한 희의 신하 규圭가 사지가 잘린 채 높은 고목에 걸려 있는데, 영생의 저주를 받아 죽지 않고 살아 있어, 계불가가 날마다 날아와 그의 목마른 입에 폐수의 물을 한 모금씩 떠넣어준다. 규가 목말라 소리쳐 울면 마른번개가 쳐, 부근에 풀과 나무가 없다.

다시 북쪽으로 2백 리 가면 성북산이라는 곳인데, 이곳의 어떤 짐승은 생김새가 돼지 같은데, 얼굴은 사람 같고, 눈이 네 개에다, 입이 앞뒤로 둘이고, 오리발[74]을 하고 있으며, 그 소리는 사람이 되다 만 개 짖는 소리 같다. 이름은 회장蛔丈이라 한다. 이것이 나타나면 고을에 큰 도둑이 든다.

다시 북쪽으로 3백 리 가면 상계산이 나온다. 초목은 자라지 않으나 물이 많다. 이곳의 어떤 짐승은 생김새가 긴꼬리원숭이 같은데, 앞발이 다섯이요 뒷발이 셋이다. 이름이 구청狗鯖이며, 소리는 나무를 찍는 듯하고, 이것이 나타나면 그 고을에 철거와 토목 공사가 많아진다.

(생략)

다시 북쪽으로 5백 리 가면 소요산이다. 이곳에는 바다 건너온 성성猩猩이들이 드글드글하다. 어떤 것들은 생김새가 사람 얼굴에 닭깃 같은 머리를 하고, 온몸에 노란 털이 났으며, 다리가 세 개인데 가운데 하나는 성기이다. 또 어떤 것들은 고릴라같이 새까맣다. 사람이 다가가면 잘 웃기도 하는데, 워낙 이 짐승들은 떼거리로 몰려 교미하기를 좋아하고, 난폭하다. 이것들은 고을의 젊은 여자들을 잘 잡아먹는다.

(생략)

2. 인왕산경仁旺山經

(생략)

서쪽으로 한 백 리 가면 괴불산이라는 곳이다. 이곳의 어떤 짐승은 생김새가 살무사 같은데 날개가 달려 있다. 사람의 말을 알아들어서, 그 싸우는 소리가 나면 정직한 자를 잡아먹는다. 의롭다는 말을 듣는 사람은 코를 베어 먹고, 악하고 못돼먹었다는 말을 듣는 자에게는 짐승을 잡아다 갖다 바친다. 이름을 사복이라 하며 혹은 잡새라고도 한다. 이것이 나타나면 옥獄이 넘친다.

(생략)

다시 서쪽으로 3백 리 가면 송추산이다. 소나무, 잣나무가 많다. 여기서는 송충이가 황소만하다. 또 여기서는 지렁이를 뱀이라 하고 뱀을 용이라 한다. 밤에는 쥐가 검은 우산 같은 날개를 쓰고 날아다녔다. 세상에서는 이 쥐를 비어蜚語라고도 부른다.

다시 서쪽으로 7백 리 가면 문산이라는 곳인데, 북쪽으로 임진수가 흐르고, 이 물은 서해로 들어간다. 이곳에는 이름을 기사氣蛇라 하는 큰 뱀이 있는데, 꼬리인 신촌에서 머리인 문산까지 무려 1,500리나 되는 긴 몸을 갖고 있다. 움직일 때 귀에서 푸른 안개가 나며, 숨을 내쉬면 거센 西風이 분다. 또 이곳에는 흰 성성이, 검은 성성이들이 코끼리만한 두꺼비를 타고 다니는데, 이 두꺼비가 침을 쏘면 사람이 죽고 나무가 시들었다. 성성이들이 임진수를 지키고, 기사는 임진수를 건너지 못한다.

(생략)

3. 무등산경無等山經

동쪽에서 무등산으로 들어가는 첫머리는 꼬두메이다. 본디로는 꽃두메이며 혹은 잣고개라고도 한다. 봄날 산허리에 진달래 참꽃이 만발하여 첫 햇살이 비추며, 마치 온산에 붉은 비단 치마를 펼쳐놓은 듯하다. 이 참꽃을 술 담가 먹으면 매맞아 얼든 데를 낫게 할 수 있다. 꼬두메를 넘으면 사람 없는 딴 세상이다.

십여 리 들어가면 밤실이라는 곳인데, 맑은 계곡물에 어디선가 복사꽃잎 떠내려오고, 복사꽃 음영에 꿀벌이 잉잉댄다. 또 온 골마다 밤꽃 향내 가득하다. 이곳의 어떤 풀은 생김새가 수련같은데 푸른 꽃이 핀다. 이것을 먹으면 좀체 배가 고프지 않다. 이름을 부지芙芝라 한다.

(생략)

다시 백 리를 들어가면 입석대에 닿게 된다. 이곳이 상상봉으로 올라가는 들머리이며, 거기에는 신선들이 하늘로 오르내려 다니던 계단의 첫 단이 있는데, 그러나 이름을 래이다來耳多라고 하는, 커다란 잠자리 모양의 검은 곤충이 지키고 있어, 아무도 접근할 수가 없게 되었다. 북명北冥에서 쫓겨온 마왕 미구가 상상봉을 차지한 까닭이다. 입석 아래로는 사시사철 나뭇가지에 시려운 눈꽃이 피어 있다.

입석을 동쪽으로 돌아 화순으로 5백 리 가면, 설주사에 다다른다. 수천 년 이래 적선謫仙들이 이곳에 모여 다시 세상으로 나갈 채비들을 하고 있다. 길 가는 이들은 뒤돌아보지 않는다. 돌아보면 모든 자취는 지워져 있고 추억追億은 미로이느니,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는 설주 뱃전에 풍운이 물결 되어 출렁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길 가는 이들이여
그대 비록 악惡을 이기지 못하였으나
약藥과 마음을 얻었으면,
아픈 세상으로 가서 아프자.

블루 아카이브에서 산해경의 이름을 딴 산해경 고급중학교가 등장한다.

6. 외부 링크

7. 관련 문서


[1] 지리적으로 이 말은 사실이다. 쿤룬 산맥 참조.[2] 《제해기》(齊諧記)를 말하는 것으로, 《제해기》는 위진남북조시대 유송의 동양무의가 기괴한 일들을 적은 짦은 지괴소설이다.[3] 우왕의 신하로 하나라의 사법관이었던 고요(皐陶)의 아들이다. 고요와 함께 우왕을 도와 치수사업을 같이 수행했던 인물로, 《묵자》에 따르면 우왕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었던 이유로 고요와 백익이 옆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목축과 수렵을 잘했으며 성과가 좋아 '우왕이 승하할 무렵 왕위를 넘겨주었으나 사양하고 3년상을 치른 뒤 기산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는 이야기와 '우왕의 뒤를 이었으나 우의 아들 계의 편을 든 신하들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우왕의 자리를 탐내 반란을 일으켜 제후의 자리까지 올랐으나 계에 의해 처단되었다'라는 이야기가 있다.[4] 276년 ~ 324년생의 학자 겸 점술가로, 훗날 점을 쳐서 불길하다며 왕돈의 모반 계획을 만류했다가 왕돈에게 피살당했다. 《수신기》에도 그의 행적이 실려 있다.[곽박주1] 조선은 지금의 낙랑군(樂浪郡)이고, 천독은 天竺國(천축국)이다.[곽박주2]구미호이다.(여호이구미,如狐而九尾)[7] 《산해경》에는 이런 식의 서술이 자주 등장한다. 이 때문에 예로부터 《산해경》은 원래 그림이 주였고, 글은 이를 해설한 일종의 주석이었으리라는 견해가 유력시되고 있다.[곽박주3] 왕해에 관한 설화는 다음과 같다. 죽서(대나무로 된 책)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은나라(상나라)의 왕자해라는 왕이 유역이라는 나라에 손님으로 방문했는데 유역의 임금은 그를 죽였다. 이 때문에 왕해의 뒤를 이은 새로운 왕인 갑미가 하백에게 군사를 빌어 유역을 쳐서 멸망시킨 뒤 마침내 그 유역의 임금 또한 죽였다.[9] 1897년 상하이에서 창립되어 잡지·교과서·사서류·지도와 번역물 등의 출판과 함께 중국 고문헌의 복구에 총력을 기울인 기관이었다.[10] 도교 경전을 집대성한 책으로, 당(唐)현종 개원(開元) 연간에 최초로 편찬되었다.[11] 太玄部. 도교에 대한 각종 기록을 수록해놓은 파트[12] 板式, 책의 쓰거나 인쇄한 면의 짜임새.[13] 半郭[14] 線裝本, 명대 중엽 이후에 나온 형식으로 고서의 가장 보편적인 형식이다. 종이를 접고 구멍을 뚫어 끈으로 묶은 방식이 기본적이며, 표지를 2장 준비하여 몸통과 함께 구멍을 뚫어서 장정을 하는 것이다.[15] 匡郭, 책 둘레를 둘러싸고 있는 검은 선[16] 版心, 책이 접히는 곳에 있는 좁은 행[17] 雙行, 두 줄로 쓰임.[18] 上山海經表, 전한시대의 유흠이 《산해경》을 읽고 남긴 소감.[19] 도상(圖象) 혹은 그림[20] 雙鑑樓, 중국의 도서관 건물 참고.[21] 중국 원~명~청대 최고의 교육기관.[22] 張元濟, 중국의 출판인(1867~1959)[23] 子部, 중국의 문헌 분류법 중 하나로 도교에 대해 다룬 것도 포함된다.[24] 黃丕烈, 청나라 시대 교감학자.[25] 校勘記[26] 석의(釋義):《한서》(漢書)에 주석(註釋)을 달고, 저자(著者) 자신(自身)의 의견(意見)을 덧붙인 것이다.[27] 漢儒. 중국 한나라의 유학자들을 가르키는 용어이다.[28] 趙維垣. 명대의 학자이다. 참고: https://zh.wikipedia.org/wiki/%E8%B6%99%E7%B6%AD%E5%9E%A3[29] 왕숭경 주1. '곡'(榖)은 닥나무로, 그 껍질로 종이를 만든다. 찬(璨)이란 자가 말하길 '곡'은 '구명'(構名)이라 부르기도 한다. '곡'은 그 열매가 곡식과 같다.[30] 곽박 주4. 육패: 자세히 모르겠음.[31] 왕숭경 주2. 육패: 이것을 몸에 차면 길을 잃지 않는 것은 곧 땅과 가깝기 때문이다. 이는 감각에서 터득한 것이지 꼭 이치에 의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32] 왕숭경 주3. 무릇 만물 가운데 사람을 먹는 것은 모두 사악한 무리이다. 여기에서 생김새가 수리같다고 했으니 엄연히 일종의 짐승인 것이다.[33] 崇文書局. 중국의 도서 출판사 페이스북[곽박주5] 그 등 위에 난 털을 이용해서 난다는 것이다. 난다는 것은 즉 높이 있다는 것이다.[양신주1] 이것은 바로 <문선(文選)>에서 말한 날다람쥐이다. 운남성 요안헌의 몽화 지방에 있는데 내가 직접 본 적이 있다. 그 고기는 먹을 수 있고 난산(難産, 출산을 순조롭게 못하는 것)을 치료한다.[36] 東夷, 중국이 칭하던 '동쪽의 오랑캐'. 우리나라도 예로부터 여기에 속했다.[37] 羿, 사람 이름에 쓰이는 한자로 한나라 때의 제후 가운데도 '예'라는 인물이 있었다.[곽박주6] 마음이 어진 사람이자 재능과 기예가 있었던 예(한나라의 제후) 같은 이가 아니면 오를 수 없다.[양신주] 옛날에 재능과 기예가 있었던 사람들은 다 '예'라고 불렀으며 꼭 '예'라는 단어가 한나라의 제후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40] 畢沅, 후대의 나온 또다른 산해경의 주석가[41] 九鼎,우 임금이 금을 거두어 만들어낸 큰 솥[42] 顧起元, 명(明)나라 때 관리이자 금석가(金石家), 서예가로 활동했다.[43] 雜說,쉽게 말하면 말그대로 잡소리(....)>[44] 後序[45] 도광(道光) 5년[46] 李調元, 청나라의 학자. 한국에서는 박제가에게 학문을 가르친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47] 重梓本[48] 山海經廣注[49] 局本 당시 지방정부에서 지원하여 출판된 책을 국본이라 한다.[50] 연호상으로는 광서(光緖) 원년[51] 異聞類 이문이란 기이한 이야기를 뜻함[52] 공교롭게도 현대의 관점에서는 산해경이 하나라의 우 임금이 지은 책은 아닐 것이라는 추측에 더 무게가 실리고 있다.[53] 吳省蘭, 중국의 학자. 조선에서는 심기도설에 수록된 그의 도서 예해주진(藝海珠塵)으로 유명하다.[54] 匏集[55] 革集[56] 史部/地埋類,사부란 중국의 서적 분류법중 역사에 속하는 서적을 칭한다,지매는 지리학에 관한것인 듯[57] 史部/地埋類 도찬이란 그림을 시로 감상한 문구[58] 金閶,중국 장쑤성 쑤저우에 있는 구.[59] 柴紹炳,당나라~청나라 시기의 학자[60] 山海經圖總目[61] 靈祗,(신령 령)과 (땅귀신 기)[62] 異域,동떨어진 미지의 지역[63] 次經[64] 讀山海經語[65] 山海經雜述,잡술은 말 그대로 '잡소리'[66] 靈祗/異域/獸族/羽禽/鱗介, 수족은 벌레를 포함한 짐승의 분류, 우금은 새 같은 날짐승, 그리고 인개는 바다 생물을 나타낸다.[곽박주7] 靑邱國에 있으며, 바다 바깥쪽에 있다. <水經>에 이르길,즉 <上林賦>에서 秋田이 靑邱에 있다고 하였다.[오임신주] 내가 생각하기에는 <상림부>에서 요(堯,전설의 나라 원고시대때의 왕)임금이 태풍(大風)을 청구(靑邱)의 연못에서 잡았다고 하였다. 유준(劉峻,양나라때의 사람) 이 <변명론(辯命論,고대 서적중 하나)>에서 태풍이 청구에 서 있다고 하였다. 당나라(唐)의 <소인사비(昭仁寺碑,서적)> 에 대풍이 청구를 막으니 유묘(有苗,오랑캐 종족의 이름)가 丹浦를 불렀다고 하였다.왕칙의 <九成宮頌(구성궁송,'구성'은 황금의 가치를 재는 단위)>에서 운명의 청구에 얽혀 있으니 봉숭아 들판에서 죽음의 조짐이 보인다고 하였다. 심약(沈約,중죽 남북조 시대의 학자)의 시에서 연기가 사라지니 단곡(丹谷,함경남도 지역의 옛지명)도 사라지고 달이 뜨니 청구가 보인다고 하였다. 허경종(許敬宗,당나라 시대 학자)의 시에서 차후 청구에 설투(楔偸)를 묻었다고 하였다. 조시춘(趙時春,명나라의 문학가)의 <어적론(禦敵論)>에서 청구의 신령스러운 칼을 들이대니 이경(彝庚)에서 자궁(紫宮,신선의 거처)으로 돌아왔다고 하였으니, 곧 이 땅인 것이다.<십주기(十洲記,산해경과 비슷한 부류의 책)>에서 청구산 위에 자궁이 있는데 진인(모든 이치를 깨우친자,아라한)과 선녀들이 이곳에서 많이 노닌다고 했는데, 바로 바다 바깥쪽에 있는 청구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곳은 아니다.[69] 어떤 한 해설서에선 산해도라는 지도를 설명하기 위해 제작되었지만 산해도가 소실되면서 실체가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70] 참고로 산해경이 쓰였으리라 추정하는 시기 중국은 현재 황하~앙쯔강 지역과는 기후와 지형이 완전히 달랐다. 선진 시대의 황하 문명은 황하지역이 대대적으로 개간되기 이전이기 때문에 사람이 사는 곳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숲이 가득했고, 이 때문에 메소아메리카 문명과 비슷한 모습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또한 이 당시 장강과 그 이남도 현대의 중국과는 언어적으로 이질적이었는데 이때는 중국티베트어족의 언어가 쓰이지 않고 오스트로아시아어족, 오스트로네시아어족, 몽몐어족, 타이카다이어족 등 동남아시아와 폴리네시아 일대에서 쓰이는 계통의 언어들이 널리 쓰이고 있었다.[71] 지식인의 숫자도 적었고, 지식을 기록하는 데 쓰이는 물자들도 굉장히 귀했다.[72] 공자는 사람들이 기린을 잡고서도 그게 무슨 동물인지 몰랐을 때 그게 기린인 줄 알아 보았다는 일화가 있어서 내로남불 아니냐는 의견도 있는데 실제로 존재가 확인된다면 그건 괴력난신이 아니다.[73] 서유기에서 손오공이 머리에 쓰고 있는 테.[74]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민다'라는 속담의 패러디.[75] 현재 링크에 들어가면 avst에서 위험을 감지하였다며 차단하니 이용에 주의할 것. - 2016.05.05 기준 정상적으로 나온다. 하도 기괴해서 외국 백신이 놀랐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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