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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晉[1] | ||
Jin으로 표시된 국가가 진이다. 기원전 1042년 ~ 기원전 349년 | ||
이칭 | 당(唐) | |
위치 | 중국 산서성, 하북성 | |
수도 | 당, 곡옥, 신강 | |
국성 | 희(姬) | |
국가원수 | 후작 | |
주요 군주 | 문공 희중이 | |
언어 | 상고 중국어 | |
문자 | 금문 → 전서 (대전체) | |
종교 | 중국 토속 종교[2] | |
종족 | 화하족 | |
통화 | 포폐 | |
성립 전 | 주나라 | |
멸망 후 | 위나라 조나라 한나라 | |
현재 국가 | 중국 |
[clearfix]
1. 개요
중국의 서주 시대부터 존재하던 제후국. 춘추오패의 하나다. 존속 기간은 BC 11세기 ~ BC 349년. 삼진(三晉)의 분열(서기전 403년) 전까지로 따지면 35대 598년이다. 현대 중국어 발음은 Jìn.[3]흔히 말하는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의 진(秦)나라와는 다른 나라로,[4] 비슷한 시기에 공존했던 국가지만 보다 일찍 멸망했다. 춘추전국시대의 전반기라고 할 수 있는 시기인 춘추시대에는 강대국이었으나, 말기에 조(趙), 위(魏), 한(韓)으로 분할된 나라다. 진나라가 조, 위, 한으로 갈라진 삼가분진은 춘추시대의 막을 내리는 사건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고[5], 이후 전국시대가 열렸다고 본다. 삼국이 진나라를 갈라먹은 이후로도 진나라는 명맥 자체는 남았지만, 일개 성읍국가로 전락하여 겨우 명맥만 부지하다 멸망했다.
춘추시대 천하의 패권을 차지한 춘추오패 중 가장 강력했던 나라로 인구 역시 약 5백만 명으로 추정되어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였다. 이는 같은 춘추오패의 제나라와 초나라, 오나라가 전성기 때 각각 3백만 명, 250만 명, 150만 명이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이다. #[6]
2. 역사
주나라(周) 왕실과 동성인 희(姬)성 제후로 작위는 후작이었으며 동천 이전 분봉 초기부터 이미 노나라(魯), 송(宋)나라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중원의 대제후 중 하나였다.시조는 당숙 우(唐叔 虞)로 아주 어릴 적에 주성왕이 소꿉놀이를 하면서 동생 희우에게 흙과 풀로 작위를 내린 걸 사관이 보고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장성한 후에 빼도 박도 못 하고 영지를 수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희우는 진나라의 시조로서 당숙 우라고 불린다.
서주 시대의 기록은 많이 산일했으나, 유물에 남은 명문들을 분석해 보면 서주 중후기 주왕실의 힘이 점차 쇠해가고 노나라, 제나라 등 서주 초기의 주요 제후들이 이탈하는 경향을 보일 적에도 진나라는 주나라 편에 서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진목후가 죽자 원래는 아들 후자 구[7]가 뒤를 이어야 했지만 그의 숙부 상숙이 찬탈해 버렸다. 하지만 4년 후에 상숙을 몰아내고 후작에 오른 구, 즉 진문후는 자리를 찾게 된다. 진문후는 서주가 망하고 동주가 들어서는 혼란기에 주평왕을 도와 왕실을 다시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워 진나라의 이름을 크게 떨쳤다.
그러나 진문후가 죽은 후 진나라는 본격적인 내홍을 겪고 만다. 진문후의 뒤를 이은 아들 진소후는 진문후의 동생인 숙부 성사를 곡옥(曲沃)에 봉해 환숙이라고 일컬었다. 이때의 진나라는 수도를 익(翼) 땅에 두었으므로 익나라라고 하기도 하는데[8] 점점 익보다 환숙 성사의 곡옥이 강성해졌다.
이렇게 진나라는 익과 곡옥으로 결국 분열되었다. 환숙과 장백은 여러 번 익나라를 쳐 군주를 죽이기도 하고 익에 입성하려고 했지만 익나라 백성들의 반항과 주나라의 정벌로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다 환숙의 손자이자 장백의 아들인 칭, 즉 무공 때까지 오게 되었다. 곡옥이 훨씬 강성함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익을 접수 못한 원인은 주나라의 견제[9]와 백성들의 저항이라고 생각하고 이번에는 철저히 익을 공격했다. 결국 익을 점령하고 익에 있었던 진나라의 보물을 모두 주희왕(=이왕)에게 뇌물로 바치고 정식으로 진나라 군주로 인증받았다. 결국 분가가 본가를 몰아냄으로써 혼란은 종식되었다.[10]
춘추오패 중 한 명인 진문공(文公) 중이의 할아버지인 진무공(武公)은 내전을 마무리짓고 춘추시대의 초강대국으로 성장할 기반을 닦았다. 이 사건을 곡옥대진이라고 한다. 진무공 이후로는 사망 이후에 올리는 시호에서만 작위를 '후'에서 '공'으로 바꿨다. 생전 작위는 계속 후작. 그래서 《춘추》에서 보면 진나라 군주를 생전에는 '진후'로 칭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비슷하게 시호가 후에서 공으로 바뀐 위나라에 대한 사마정의 《사기색은》의 논리를 —대개는 《사기》 <위강숙세가>의 주석으로 찾아볼 수 있다.— 그대로 적용하면 시호가 '후'에서 '공'으로 바뀐 것은 오히려 대우가 떨어진 것에 해당한다.
진무공의 아들 진헌공 때 국운이 크게 흥성하여 인접 제후국인 곽, 위, 우와 괵을 멸하는 등 기세를 올렸으나,[11] 후계자를 둘러싸고 공실과 조정이 사분오열하는 내란이 다시 발발, 둘째 공자 중이[12]와 셋째 공자 이오[13] 두 명은 지지 세력을 이끌고 국외로 망명하고, 적통 세자 신생은 강요에 의해 자살하는가 하면, 측실 소생의 어린 아들 혜제와 탁자가 연이어 후위를 계승하지만 두 명이 연달아 반대파 대신의 손에 암살당하는 등 그야말로 극심한 혼란상을 연출하였다.
이 혼란상은 결국 이웃한 진(秦)의 두 차례에 걸친 개입으로 간신히 수습되었고, 훗날의 패자가 되는 진문공, 즉 공자 중이가 최후의 승자가 되어 후작에 올랐다. 두 차례에 걸친 내전으로 진나라의 공실은 거의 초토화되다시피 했으나, 진문공은 자신의 즉위에 공훈을 세운 신하들에게 봉토와 군권을 나눠주어 그 공백을 메꾸었다. 이에 내정이 안정된 진나라는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를 바탕으로 중원의 제후국을 위협하던 남방의 초나라를 성복 전투에서 물리치고, 강성 여씨의 제나라의 뒤를 이어 중원의 패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진문공 이후로도 진은 중원의 최강국으로서 사실상의 패권을 행사했으나[14], 그 위세는 진문공 시절만 못했다. 서쪽의 이웃 진(秦)나라의 진출을 경계하느라 중원의 정세에 소홀했던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큰 문제로 봉토와 군권을 나눠받은 공신 일족들이 자신들끼리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신들의 막장 행각은 초장왕과 패권을 두고 싸웠던 필 전투에서도 볼 수 있는데, 공신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지휘 체계가 전혀 통하지 않아 각개전투를 벌인 끝에 개박살이 나고 말았다.[15]
진나라의 불행은 이렇듯 자신의 목소리를 크게 낼 공신을 컨트롤할 수 있을 만한 군주가 없었다는 점에 있었다. 진문공은 비록 자신을 수십년간 보필했음에도 불구하고 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지위를 박탈하거나 목을 베어버릴 정도의 권력이 있었고,[16] 불타죽은 개자추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 성깔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깐깐한 노인네였다. 이런 진문공 밑에서 굴러왔던 공신 1, 2세대들을 제어하는것은 애초부터 불가능이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군 통수권자이자 초나라를 패배시킨 성복 전투의 제1 대공을 세웠던 중군 원수 선진이 진문공의 친아들 진 양공의 얼굴에 침을 뱉을 정도였으니.
문공 사후 100년 동안 8명의 군주가 즉위했고, 암군이라 공신들에게 제거당하거나[17], 너무 어린 나이에 권좌에 앉아 권위는커녕 공신들이 설칠 판을 깔아주었고 그나마 뭘 좀 해볼 만한 명군이었던 진 도공은 젊어서 죽고 말았다. 어딘가 하자있는 군주가 계속 권좌에 오르고, 바지 사장격으로 앉아있는 동안 공신들은 아귀 다툼을 벌여댔다. 그래도 강국의 기본 가락은 남아있었던지 필 전투 이후로 이를 갈고 있다가 언릉 전투[18]에서는 초공왕을 애꾸눈으로 만들어 버리는 등 대굴욕을 안겨주며 마지막으로 패권을 지켜내는 듯했으나...
경쟁자가 많은 권력 투쟁이 늘상 그렇듯이 유력 씨족들은 자신들 중에서 제일 센 놈을 조지고 보는 식으로 무력 항쟁을 거듭했고, 이 와중에서 공신 출신인 호씨(狐氏)[19], 선씨(先氏)[20], 극씨(郤氏)[21], 난씨(欒氏)[22], 중항씨(中行氏)[23], 서씨(胥氏)[24], 범씨(范氏)[25] 등의 유력한 일족들이 몰살당하거나 추방당하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특히 이 권력 투쟁 초기에 망한 씨족 중 많은 수, 예를 들면 호씨, 속씨, 극씨, 난씨 등은 진 공실과 혈연적으로 비교적 가까운 집안들이었다. 그러다보니 공실의 권위도 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당연지사. 《좌전》에 보면 숙향이 진나라 공실에서 갈려나온 집안들이 대부분 다 끝장났다고 말한다. 양설씨(羊舌氏)[26] 역시 진나라 공실에서 갈려나온 집안이고, 마지막에는 진나라 공실들이 다 망해가는데 양설씨만 살아남을 도리는 없고 결국은 양설씨마저도 망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됐다. 양설씨는 지씨의 모함으로 멸족됐다.[27] 춘추시대 말기의 협객인 예양이 지씨를 섬기기 전 범씨와 중항씨도 섬겼다는 것과 그들 역시도 지씨처럼 망했다는걸 보면 말기로 갈수록 권력투쟁이 심화된 듯 하다.
결국 춘추시대 말 즈음엔 지씨(智氏)[28], 조씨(趙氏)[29], 위씨(魏氏)[30], 한씨(韓氏)[31]의 네 집안이 나라의 권세를 좌지우지하게 되었고, 그중에 No.2였던 조씨가 위씨와 한씨를 끌어들여 No.1인 지씨를 무너트리면서 이 기나긴 권력 투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32] 이들 삼가(三家)는 진나라를 셋이 사이좋게 나눠갖기로 합의하고, 각자 나라를 세워 자립한다.
이 진나라의 삼분을 역사가들은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의 경계가 되는 사건으로 간주한다. 왜냐면 명목상으로나마 종주국인 주나라의 천자가 명분을 가지고 있는 진나라의 편을 들어주면서, 다른 제후국을 동원해 세 가문을 멸문시키고 진나라를 원래 상태로 되돌리는 질서 유지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주나라의 천자가 그럴 생각도 하지 못하고 기원전 403년에 세 가문을 제후로 인정하면서 이 사건은 주나라 왕실의 권위가 이미 땅으로 추락했음을 공식적으로 인증하는 계기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 제나라에서도 강(姜)성 여씨를 내쫓아버리고 규성 전(田)씨가 제후가 되었는데, 이 역시 주 왕실에서 강씨를 복위시키는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으면서 주 왕실이 허울만 남았다는 것을 천하가 알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전국시대인 것이며, 삼가분진과 전씨대제는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가르는 기준이 되는 이유이다.[33] 사마광이 《자치통감》에서 이 사건을 시작으로 중국사를 서술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진의 삼분 이후로도 사실 진나라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 영토가 익과 곡옥의 두 고도를 다스리는 게 고작인 성읍 국가로 돌아가 버렸다.(...) 후대 사람들이 없어진 거나 다름없다고 취급해버릴 정도로 몰락했다. 진나라의 공은 오랫동안 신하였던 조, 위, 한나라의 군주들에게 문안 인사나 올리고, 성 밖으로 계집질을 하러 다니다 자객에게 암살 당하는 등 끝없는 굴욕의 연속. 그렇게 100년을 더 버티다 나중에는 그 두 마을조차도 털리고 멸망했다.
3. 역대 군주
진(晉) 국군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ece5b6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181818,#e5e5e5 | 익 翊 | |||
초대 당숙 우 | 제2대 진후 섭 | 제3대 무후 | 제4대 성후 | |
제5대 여후 | 제6대 정후 | 제7대 희후 | 제8대 헌후 | |
제9대 목후 | 제10대 상숙 | 제11대 문후 | 제12대 소후 | |
제13대 효후 | 제14대 악후 | 제15대 애후 | 제16대 소자 | |
제17대 진후 민 | 익/곡옥 분열 | 곡옥1대 환숙 | 곡옥2대 장백 | |
곡옥 曲沃 | ||||
제18대 무공 | 제19대 헌공 | 제20대 해제 | 제21대 탁자 | |
제22대 혜공 | 제23대 회공 | 제24대 문공 | 제25대 양공 | |
제26대 영공 | 제27대 성공 | 제28대 경공 | 제29대 여공 | |
제30대 도공 | 제31대 장평공 | 제32대 소공 | 제33대 경공 | |
제34대 정공 | 제35대 출공 | 제36대 애공 | 제37대 유공 | |
제38대 열공 | 삼진분립 | 제39대 환공 | 40대 정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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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진[34]
- 당숙 우(唐叔 虞) - 서기전 1042년, 무왕의 아들이자 성왕의 동생
- 진후 섭(晉侯 燮) - 당숙의 아들
- 무후 영족(武侯 寧族) - 진후의 아들
- 성후 복인(成侯 服人) - 무후의 아들
- 여후 복(厲侯 福) - ? ~ 서기전 859년, 성후의 아들
- 정후 의구(靖侯 宜臼) - 서기전 858년 ~ 서기전 841년, 여후의 아들
- 희후 사도(釐侯, 僖侯 司徒)[35] - 서기전 840년 ~ 서기전 823년, 정후의 아들
- 헌후 적/소(獻侯 籍[36]/蘇[37]=穌[38])- 서기전 822년 ~ 서기전 812년, 희후의 아들
- 목후 비왕(穆侯 費王) - 서기전 811년 ~ 서기전 785년, 헌후의 아들
- 상숙(殤叔) - 서기전 784년 ~ 서기전 781년, 목후의 동생. 찬탈 했음.
- 문후 구(文侯 仇) - 서기전 780년 ~ 서기전 746년, 목후의 아들. 상으로 몰아냄. [39]
3.2. 익[40]
- 소후 백(昭侯 伯) - 서기전 745년 ~ 서기전 740년, 문후의 아들, 환숙이 침공해오자 대신 반부에게 시해됨, 반부는 환숙을 군주로 삼으려고 했지만 익나라 백성들의 저항으로 실패하고 백성들은 그의 아들 평을 군주로 세움
- 효후 평(孝侯 平) - 서기전 739년 ~ 서기전 724년, 소후의 아들, 역적 반부를 죽였지만 나중에 다시 침공해온 장백에게 죽임을 당함, 그러나 이번에도 익의 백성들은 저항했고 그의 아들을 세웠다.
- 악후 극(鄂侯 卻) - 서기전 723년 ~ 서기전 718년, 효후의 아들
- 애후 광(哀侯 光) - 서기전 717년 ~ 서기전 709년, 악후의 아들, 장백이 다시 공격했지만 주나라 평왕의 정벌로 실패로 끝남, 그러나 다음에 또 쳐들어온 무공에게 사로잡혀 포로가 되었지만 이번에도 백성들의 저항으로 실패함. 나중에 아들 소자후가 즉위하자 곡옥에서 죽음을 당함
- 소자후(小子侯)[41] - 서기전 708년 ~ 서기전 705년, 애후의 아들, 평화 협상을 하자는 무공의 말에 속아 곡옥에 갔다가 죽음을 당함, 이 때 주나라 환왕은 곡옥을 쳤지만 실패함
- 진후 민(晉侯 緡)[42] - 서기전 704년 ~ 서기전 678년, 애후의 동생으로 소자후의 숙부, 무공에 의해 익이 점령되고 살해됨.
3.3. 곡옥[43]
- 환숙 성사(桓叔 成師) - 서기전 744년 ~ 서기전 731년, 문후의 동생으로 소후의 숙부
- 장백 선(荘伯 鱓) - 서기전 730년 ~ 서기전 716년, 환숙의 아들
- 무공 칭(武公 稱)[44] - 서기전 715년 ~ 서기전 677년, 장백의 아들. 익을 멸하고 익으로 천도, 주나라 이왕에게 뇌물을 바쳐 정식으로 제후로 인정받음.
3.4. 통일 이후[45]
- 무공 칭(武公 稱) - 위와 동일
- 헌공 궤제(獻公 詭諸) - 서기전 676년 ~ 서기전 651년, 무공의 아들
- 해제(奚薺)[46] - 서기전 651, 헌공과 여희의 아들. 이극에게 암살
- 도자(悼子) - 위와 동일, 헌공과 여희의 동생의 아들. 이극에게 암살
- 혜공 이오(恵公 夷吾) - 서기전 650년 ~ 서기전 637년, 헌공의 아들이자 문공의 이복형제. 혜공의 어머니와 문공의 어머니는 자매이다.
- 회공 어(懷公 圉) - 서기전 637년, 혜공의 아들[47]
- 문공 중이(文公 重耳) - 서기전 636년 ~ 서기전 628년, 헌공의 아들로 혜공의 이복 형이자 회공의 백부, 춘추오패 중 한 명이자 진을 사실상 춘추시대 패자로 올려놓은 인물이다.
- 양공 환(襄公 歡) - 서기전 627년 ~ 서기전 621년, 문공의 아들. 진 헌공 때 이미 태어나 있었다. 진 문공이 망명을 할 때 그의 재산을 빼돌려 달아났던 두수가 아버지를 잃은 진 양공과 그의 여동생 백희를 키웠다는 것이 후에 밝혀졌다.
- 영공 이고(靈公 夷皋) - 서기전 620년 ~ 서기전 607년, 양공의 아들, 10살도 안 되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아무것도 모르다가 20살이 넘자 포악한 정치를 했다. 이때문에 재상 조돈의 사촌 동생 조천에게 살해당했다[48].
- 성공 흑둔 (成公 黑臀) - 서기전 606년 ~ 서기전 600년, 문공의 아들.
- 경공 거(景公 據) - 서기전 599년 ~ 서기전 581년, 성공의 아들.
변소에 빠져 죽었다[49] - 여공 수만(厲公 壽曼) - 서기전 580년 ~ 서기전 573년, 경공의 아들, 난서와 중항언에게 피살.
- 도공 주(悼公 周) - 서기전 572년 ~ 서기전 558년, 양공의 손자[50]로 여공의 당숙, 여전히 강국이었으나 이때부터 군주보다 6경의 세력이 강해짐. 그래도 진 도공은 총명하였기 때문에 나름 군주로써의 세력을 휘두름.
- 평공 표(平公 彪) - 서기전 557년 ~ 서기전 532년, 도공의 아들, 초기에는 정치를 잘했으나, 점점 유흥에 빠져 누각과 연못을 만드는 때 예산을 낭비했다. 귀신을 부르는 짓까지 하다가 귀신이 보인다며 앓다가 죽음.
- 소공 이(昭公 夷) - 서기전 531년 ~ 서기전 526년, 평공의 아들. 실질적으로 실권을 가진 마지막 군주.
- 경공 기질(頃公 棄疾) - 서기전 525년 ~ 서기전 512년, 소공의 아들. 진 평공이 죽을 때 나이가 40살 정도로 추정되는데 그 아들 진 소공이 재위 6년 만에 죽었으므로 진 경공의 재위 당시 나이는 10살 미만으로 추정. 실제로 이 군주 때부터 진나라 군주의 실권이 완전히 소멸되었다.
- 정공 오(定公 午) - 서기전 511년 ~ 서기전 475년, 경공의 아들, 서기전 497년이 되자 지씨의 가주인 지백 요의 주도로 한나라(韓), 위나라(魏), 조나라(趙)의 가주들과 함께 범씨와 중항(순)씨의 영토를 분할해 차지해 버리고 6경 중에 네 가문이 남음
- 출공 착(出公 鑿) - 서기전 474년 ~ 서기전 452년, 정공의 아들, 서기전 457년 지백 요는 한(韓), 위(魏), 조(趙)의 가주에게 영토를 나누어 달라는 제의를 했는데 조의 가주였던 조양자가 거절함. 결국 지백은 그를 치기 위해 한의 가주 한강자(한호), 위의 가주 위환자(위구)와 함께 조양자(조무휼)를 쳤으나, 한과 위의 배반으로 사로잡혀 죽음을 당함, 이렇게 6경은 조, 위, 한 세 가문만 남고 지백의 영토를 삼분화함, 출공은 이들 세 가문을 몰아내기 위해 노나라 권신들이었던 삼환 가문의 가주들과 제나라 권신 전씨 가주에게 밀서를 보냈지만 오히려 그것을 삼가에게 알리는 바람에 쫒겨남. [51][52] 생각해보면 군주(공)를 위협하는 유력 가문들을 잡기 위해 다른 나라의 군주를 위협하는 유력 가문들을 끌어들인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3.5. 삼가분진 이후
- 애공 교(哀公 驕)[53] - 서기전 451년 ~ 서기전 434년, 소공의 증손[54]으로 출공의 먼 친척 동생, 출공을 몰아낸 삼가가 옹립함.
- 유공 유(幽公 柳) - 서기전 433년 ~ 서기전 416년, 애공의 아들, 수도 강[55]과 곡옥을 제외한 모든 영토를 세 가문에게 상실당해서 나라가 삼분됨. 밤마다 부녀자들과 놀아나다가 위 문후가 고용한 자객에게 암살당하는 등 이미 사실상 진은 멸망한 상태였음
- 열공 지(烈公 止) - 서기전 415년 ~ 서기전 389년, 유공의 아들, 기원전 403년에 조, 위, 한 세 가문이 주나라 위열왕에 의해 정식으로 제후로 인정받음. 군주인 열공이 한때 신하였던 이들에게 문안을 드릴 정도였음
- 효공 기(孝公 頎)[56] - 서기전 388년 ~ 서기전 357년, 열공의 아들, 곡옥을 잃음으로써 거의 진나라의 멸망이 기정사실화 됨
- 정공 구주(靜公 俱酒) - 서기전 356년 ~ 서기전 349년, 남은 강 땅마저 회수당하고 조, 위, 한에 의해 순(純) 땅으로 폐출된다. 진나라 멸망.
4. 정치 제도
자세한 내용은 육경(진나라) 문서 참고하십시오.[1] 晋으로 표기하기도 하며, 원래 한자는 㬜이다. Baxter-Sagart의 재구에 의하면 상고음은 tsin-s. 현대 발음은 Jìn.[2] 춘추전국시대 사람들은 주나라 시대와 비슷하게 세속적인 편이었다.[3] 여진족의 금나라도 Jin으로 쓰지만, 晉은 4성, 金은 1성으로 성조가 다르다.[4] 통일왕조 진나라는 Qin이라고 쓴다.[5] 특히 주나라가 봉하지 않은 나라가 등장했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초나라같은 경우 왕작을 사용하긴 했지만 대외적으로는 어디까지나 주나라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은 제후국이었다.[6] 전성기 때를 제외한 평균적인 국력과 위상 또한 대략 저 순위와 같다.[7]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진목후가 길한 이름을 둘째 성사(成師)에게 주고, 불길한 이름을 첫째 구(仇)에게 주었기 때문에 둘째가 첫째를 몰아내려 할 것이라고 예언한 사람이 있었고, 실제로 후에 후자 구의 후손인 진민후는 성사의 후손인 진무공에게 죽음을 당하고 후위도 뺏긴다.[8] 원래 당숙 우가 봉해진 곳은 요 임금의 후손의 나라인 당나라를 멸한 곳이므로 당이라고 하기도 한다.[9] 천하의 질서를 위해서 천자가 존재하니...[10] 나중에 진무공의 아들 진헌공이 죽자 그의 아들들이 다시 내전을 일으키게 된 것은 업보라고 한다.[11] '순망치한'의 고사가 우와 괵의 관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12] 후일 진문공[13] 후일 진혜공[14] 진에서 쪼개진 세 나라 조, 위, 한이 각각 전국칠웅의 한 자리씩을 차지했던 것을 보면, 국력을 기준으로 진나라가 사실상 춘추시대 최강국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전국시대로 들어오면서 조, 위, 한이 넓어진 것도 고려해야겠지만, 기본적으로 중원의 노른자위땅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다는 걸 명심하자.[15] 진문공 시기 초나라의 북진을 저지했던 성복 전투와 대조되는 모습인데, 성복 전투에서는 진문공을 따라다닌 공신이든 진나라에 계속 남았던 신하든 진문공이 임명한 선진의 지휘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초군을 대파했었다.[16] 대표적으로 위주와 전힐. 이 두 사람은 진문공을 따라 19년간 방랑한 신하들인데, 진문공이 즉위한 이후 방랑 시절 자신을 도와주었던 조나라의 대신 희부기를 우대해주는 것을 보고 배알이 꼴려 희부기의 집에 불을 질러서 그를 죽여버렸다. 진문공은 그 과정에서 큰 부상을 입은 위주는 벼슬에서 내쫓아버렸고, 먼저 말을 꺼낸 전힐은 사형에 처했다. 다만 위주는 성복 전투에서 공을 세워 다시 복귀한다.[17] 혹은 공신들과의 싸움에 밀려 죽은 뒤 기록이 조작되었을 수 있다. 단적인 예로 암군을 죽인 조씨 일가를 반역 행위라 기록한 사관의 경우가 있을 수 있겠다.[18] 다만 이 전투에서는 초나라의 막장성이 부각되는데, 3군 중 핵심인 중군 원수 초 공자 측(側)이 술에 취해 잠들어 전장에 참여하지 못했고, 이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패배하게 된다.[19] 적족 혼혈인 호언, 호모의 자손. 호언의 아들 호야고와 호야고의 친척인 속국거가 조최의 아들 조돈과 권력 투쟁을 하다 살인을 저지른 속국거의 처형으로 나머지 일족들은 모두 적족으로 망명하였다.[20] 성복 전투의 영웅 선진의 후손. 선진의 손자 선곡이 필 전투에서 독단적으로 행동함으로 패배의 원인이 되었고 뒤이어 적족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죽고 일족이 몰락한다.[21] 진나라 공족 극표의 후손. 진 여공 때 극주, 극기, 극지가 '삼극'이라 불리며 과도하게 권력을 휘두르다 그들에게 피해를 입은 적이 있는 관료들의 참소를 들은 진 여공에 의해 삼극이 살해당하고 나머지는 세력을 잃음. 이때 극씨 멸족을 주도한 서동은 또다른 공신의 후손이었다.[22] 곡옥환숙의 스승이자 진정후의 서손인 난빈의 후손. 난염이 포악하여 가문을 멸문 직전까지 보냈다. 그 아들 난영은 덕이 높아 많은 인기를 얻었으나, 귀족들 사이의 민심은 그들을 떠나서 제나라로 망명 후 반란을 일으켰으나, 난씨를 유일하게 도와주던 위씨가 범씨의 협박에 의하여 그들 반대편에 서서 결국 패하고 송나라로 망명한 난방을 제외하고 모두 처형. 제나라 난씨와는 별개의 가문이다.[23] 순림보의 후손. 순임보가 중행장을 지내서 중항씨와 순씨를 병용했다. 마지막 가주인 중항인이 조간자와 전쟁에서 패해 제나라로 망명[24] 서신의 후손. 마지막 가주 서동은 아버지가 극씨 일가에 의하여 쫓겨나자 진 여공에게 아첨하는 간신이 되어 삼극을 모두 죽임으로써 극씨에게 복수하였으나, 난씨와 중항씨에 의하여 살해당하고 가문도 몰락하였다.[25] 사회의 후손. 사회가 범 땅을 받아서 범씨와 사씨를 병용했다. 마지막 가주 범길사가 중항인과 같이 귀족들의 투쟁에 밀려 제나라로 망명[26] 숙향은 자이고 본명은 양설힐이다.[27] 사실 이후의 한씨가 진나라 공실에서 갈라진 가문이긴 했지만 이들도 진나라의 권위 따위는 알 바가 아니었다. 심지어 족보상 한씨는 공실에서 굉장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위열왕 기준으로 보면 300년도 더 전에 갈라진 집안이니 더 말이 필요한가?[28] 순림보의 동생 순수의 후손. 순수가 지 땅을 받아 지씨와 순씨를 병용했다.[29] 조최의 후손. 멸문의 위기에 몰렸다가 간신히 부활했다. 조씨고아 참고.[30] 위주의 후손.[31] 곡옥장백의 동생 한만의 후손.[32] 여기서 예양의 이야기가 나왔다.[33] 흥미롭게도 유유상종이라고 강씨를 쫓아내기 전 전씨는 삼진과 친하게 지냈다(...)[34] 당나라, 즉 진나라 초기. 서기전 1042년 ~ 서기전 746년 (11대 296년)[35] 釐(리)가 시호로 쓰일 때는 僖와 같은 글자로서 사용되기에 僖와 같은 '희'로 읽는다.[36] 사기[37] 세본.[38] 북조 진후묘 유적.[39] 목후는 뒤를 이을 태자였던 문후의 이름보다 그의 동생인 환숙을 더 후하게 지었다. 신하 중에서 이를 보고 한탄하기도 했는데 구는 원수를 뜻하고 성사는 일이 잘될 것을 뜻하니 성사의 후손이 장차 구의 후손을 대신해 진나라를 다스릴 거라고 예언했다. 예언은 적중하여 환숙의 후손인 진무공이 본가를 몰아내고 진의 군주가 된다.[40] 내전기. 진나라의 대종. 서기전 745년 ~ 서기전 678년 (6대 67년)[41] 이름은 기록이 되어 있지 않다.[42] 시호가 없다.[43] 내전기. 문후의 동생 환숙을 시조로 하는 진나라의 소종. 서기전 744년 ~서기전 678년. (3대 66년)[44] 아래의 무공과 동일 인물[45] 서기전 677년 ~ 서기전 349년. 20대 328년. 삼진이 제후로 인정받은 서기전 403년까지로 치면 18대 274년. 출공이 죽은 452년으로 치면 225년.[46] 해제, 도자 모두 시호가 없다.[47] 회공의 이름 어는 마굿간지기라는 뜻인데 원래 혜공이 망명 시절에 양나라에서 회공을 낳았다. 이때 그의 장인인 양나라 군주가 외손자가 남의 신하가 될 상이라고 하여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48] 사실 조돈은 이것을 걱정하여 진 양공의 동생인 공자 옹을 군주로 세우려 했으나 진 양공의 부인 목영의 1인 시위로 인하여 민심이 진 영공에게 몰려 어쩔 수 없이 그를 후로 추대했다.[49] 고사성어 병입고황의 유래이다.[50] 정확히는 양공의 아들인 혜백 담의 아들[51] 애초에 제나라의 규성 전씨는 강성 여씨의 제나라를 찬탈하려고 했기에 명분을 위해서 삼가에게 말한 것 같다. 전씨는 후에 결국 찬탈한다.[52] 살해당했다는 말도 있다.[53] 또는 의공(懿公), 경공(敬公)[54] 할아버지는 소공의 아들 대자 옹, 아버지는 공손 기[55] 과거의 익[56] 또는 환공(桓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