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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9 16:16:05

진영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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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晉)나라 26대 국군
영공
靈公
희(姬)
진(晉)
이고(夷皐)
아버지 진양공(晉襄公) 희환(姬歡, 姬驩)
어머니 목영(繆瀛)
숙부 진성공 희흑둔(姬黑臀)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607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620년 ~ 기원전 607년

1. 개요2. 그의 폭정

[clearfix]

1. 개요

진(晉)나라의 제26대 군주. 휘는 이고(夷皐). 진문공손자. 아버지진양공. 어머니진(秦)나라 공주인 목영(穆嬴).

2. 그의 폭정

아버지 진 양공이 그가 어린 시절 죽었기 때문에 정사는 대신 조돈(趙盾)이 담당했다. 그러나 그가 자라면서 군주의 도리를 다하지 않고 황음무도하게 굴었으며, 조세를 무겁게 하고 사치스럽게 놀아댔다. 거기다가 높은 누대에서 탄궁[1]으로 행인을 쏘는 막장 행각을 하니 행인들은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탄환을 피하기에 바빴다. 한번은 요리사가 웅장을 덜 익혔다는 이유로 죽여버렸는데, 그 시신을 궁녀로 하여금 광주리에 넣어 버리게 했다. 조돈이 그것을 두고 간했으나, 진 영공은 그에게 반감을 품었다.

그래서 자객 서예(鉏麑)에게 조돈을 척살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서예는 조돈을 보고 그가 충정이 뛰어나 백성을 아꼈기 때문에 진 영공의 명을 집행하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머리를 들이 받아 자결했다.

진 영공은 조돈을 잔치에 불러 복병을 풀어 그를 척살하려했다. 그러나 조돈의 거우인 제이명이 그것을 알고 조돈에게 그것을 알렸다. 그러나 그것을 알 리가 없는 진 영공은 개에게 조돈을 죽여버리게 했다. 그러나 제이명은 그것도 알고 진 영공의 개를 죽여버렸는데, 영공의 병사들이 그를 살해했다. 가까스로 도망간 조돈은 자신의 사촌인 조천(趙穿)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진 영공 14년(기원전 607년), 조천은 진영공을 시해했다. 조돈은 조천을 보내 주나라에서 진 문공의 아들이며, 진 양공의 아우인 공자 흑둔을 모셔오니 그가 바로 진성공이다.

이 때 사관의 장을 담당하는 태사(太史) 동호(董狐)는 조돈이 임금을 죽였다고 기록했는데, 조돈이 동호에게 "살인자는 조천이고, 난 국경 부근에 있었는데 내가 왜 범인이냐?"며 의문을 제기하자, 동호는 "정경의 신분으로 도망쳤으나 국경을 벗어나지 않았고, 돌아와서도 나라를 어지럽힌 자를 죽이지 않았으니 그대가 아니면 누가 범인이란 말이오!"라고 받아쳤다.[2][3][4]졸지에 주군 시해자 누명을 쓴 조돈은 진성공을 섬기되 매사에 신중을 기했다고 한다.

[1] 활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화살이 아니라 새총처럼 탄환을 매겨서 쏜다.[2] 이 이야기가 '동호직필'이라는 고사의 유래이다. 그 의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실을 기록하는 역사가나 기자의 태도라 할 수 있다. 혹자는 이것이 객관성이 결여된 의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나, 이는 당시 역사기록의 특징을 이해하지 못한 소치일 뿐이다. 당시 중국에서는 죽간을 기록매체로 사용했던 만큼 최대한 단어나 문장을 간결하게 줄이는 편을 선호했고 역사기록도 마찬가지로 한 줄 가량으로 간략하게 줄여서 기록했다. 짧은 기록에 최대한 많은 정보를 담아내기 위해서는 언제나 글이 함축적이어야 했고, 글을 읽는 사람들도 맥락을 충분히 고려해가면서 이러한 함축성의 이면을 읽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또한 이러한 기록은 언제나 후세의 교훈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시 세태에 대한 평가를 겸하고 있었다. 이 사건에서도 조돈이 조천의 죄행을 벌하지도 않았고, 스스로 그 사건으로 가장 이득을 보고 오히려 범행을 비호한 인물인만큼 실제로 그가 이 사건을 명시적으로, 혹은 의도적으로 저질렀건 그렇지 않건 간에 비판받을 여지는 충분했고, 실질적으로 이 사건의 최종적인 책임자로 여겨져도 그리 큰 무리는 없는 편이었다.[3] 훗날 공자는 이를 두고 "동호는 훌륭한 사관으로서 죄를 숨기지 않는다는 기록의 원칙을 지켰고, 조선자는 훌륭한 대부로서 원칙을 지키다가 오명을 썼다. 안타깝구나, 국경을 벗어났더라면 오명을 면했을 텐데"라 말했다.[4] 문천상의 <정기가>에 나오는 '제나라에는 태사의 죽간이 있고, 진나라에는 동호의 붓이 있다'라는 구절에서 동호의 붓은 이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