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1-08 11:33:54

여마동

고조공신후자연표(高祖功臣侯者年表第六) 후제(侯第)
100위 알지절후 풍해감 101위 중수장후 여마동 102위 두연장후 왕예
중수장후(中水莊侯)
여마동
呂馬童
시호 장후(莊侯)[1]
작위 중수후(中水侯)[2]
최종직위 기사마(騎司馬)[3]
(呂)
이름 마동(馬童)
고향 (楚) 팽성(彭城) 하상(下相)[4]
(現 강소성 숙천현(宿遷縣) 서남)
생몰 기간 ? ~ 기원전 171년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에서

1. 개요

중국 초한쟁패 시대의 인물.

2. 생애

원래 항우의 부하였으며, 항우와 같은 고향 출신이었다고 한다. 항우가 서초패왕이 되었을때 삼진에 남겨졌다가 장한이 패주하자 호치에서 유방에게 투항했고, 고제의 휘하에서 종군하던 도중 해하 전투에서 패배해 간신히 도망쳐나온 항우가 한나라군을 상대로 무쌍을 찍고 있었다.

그런데 여마동이 항우 앞에 나타나자 항우는 "너는 내 부하였던 녀석이 아니냐?" 고 물었다. 여마동은 차마 대꾸를 하기에는 겸연쩍었는지 옆에 있던 왕예(王翳)에게 "저 사람이 항우가 맞다"며 딴청을 부렸고, 항우는 그런 여마동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들으니 한왕이 내 목을 천금과 만호(萬戶)의 봉지로 사려한다고 했다. 내 그대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겠노라."

그러면서 항우는 자결했는데 그러자 유방군은 서로 항우의 시체를 가지려고 자기들끼리 아귀다툼을 벌였고 여마동도 이 아귀다툼에 말려들었지만 여마동은 다행히 항우의 사지 중 하나를 획득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래서 여마동도 제후에 봉해지는 데에 성공했다. 이 아귀다툼에 참가한 병력들 중에서 여마동 이외에도 항우의 머리를 가진 왕예를 비롯하여 양무, 양희, 여승이 항우의 시체조각을 가로챘다.

이후 그 시체를 한 번 조립해서 맞춰보자 딱 맞아 떨어졌으므로 5명은 모두 책봉되어 열후가 되었다. 고조공신후자연표을 보자면 고조공신열후 143인 중 양무가 서열 94위, 여마동이 서열 101위, 항우의 머리를 가져간 왕예가 서열 102위, 양희가 서열 103위, 여승이 서열 104위가 되었다.

특이한 것이 있다면, 비록 유방의 휘하로 돌아섰으나 항우가 여마동을 바로 알아보고 "내 시체를 그대들에게 주기 위해 자결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자결했다는 것인데, 항우가 얼굴을 바로 알아볼 정도였다면 오랫동안 항우 밑에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추측도 가능하다.[5][6]한신유방에게 말했듯, 항우는 벼슬을 내릴때는 인수가 닳을 때까지 아쉬워하고 망설였던 사람이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친절한 인물인 점을 감안했을 때, 이 점도 항우의 성격을 드러내는 일화 중 하나로 볼 수 있겠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강동에서 출병했던 인물들 중 끝까지 옆에 있었던 수십명은 다 죽고 마지막으로 눈에 담긴 고향 사람이었던 점을 생각해 보면 '아녀자의 마음'이라고도 평가 받았던 항우의 성격 상 저런 선택을 한 것도 크게 상궤를 벗어난 일은 아닐 것이라 하겠다.

3. 대중매체에서

중국드라마 초한전기에서는 초군 기병교위로 등장. 초군에서 집극랑 역할을 맡던 한신과도 안면이 있었다. 제후분봉을 끝낸 군사들을 대거 돌려보낼때 한군에 투항한다. 처음에는 항우를 찾아가 군에 남게 해달라 했으나, 항우가 이를 거절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라 하자 전시를 제외하면 멀리서 보기만 하던 항우에게 충성심이 없었기에 별로 망설이지 않고 소하를 찾아가 임관하고, 곧 기병교위의 경력을 살려 관영 휘하의 기병장군이 된다. 얼마 뒤 역시 초군을 떠나 한군으로 들어온 한신도 만난다. 한신은 그가 장군이 되었다는 말에 장군이 어떻게 우리같은 병사들하고 밥을 먹냐며 폭소를 터뜨린다.[7] 이후 사서에 기록된 대로 항우가 최후를 맞이할 때 등장해서 병력을 지휘하는데, 그를 알아본 항우가 그의 갑옷'만'을 작살내서 자신의 무력이 살아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의 머리를 줄 터이니 자신이 죽을때까지 무기를 놓지 않았음을 전하라 지시하곤 자결하자 그 시신을 얻는다.

문정후 초한지에서는 여마통으로 나온다. 항우와 동향으로 장한 휘하에 있다가 한나라에 투항했다. 오강에서 한군에게 포위된 항우는 여마통을 알아보고 그를 호명한다. 가까이 오라고 한 후 항우는 여미통에게 내 목을 가져가는 자에게 왕의 직위를 주는게 물어보고, 여마통은 그렇게 알고 있다고 답한다. 항우는 ‘옛정을 생각해 내 목을 너에게 주마. 가져가서 왕이 돼서 한 번 잘살아보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한다.


[1] 이 시호는 항우의 시체를 얻은 공통으로 받았다.[2] 《사기정의》에서는 진서지도기(晉書地道記)를 따라 하간군의 속현이라 했고, 《사기색은》에서는 《한서》 지리지를 따라 탁군의 속현이라 했다. 《서한정구지리》에서는 두 기록을 바탕으로 원래 조나라 하간군의 속현이었으나 한나라에서 조나라와 연나라 사이의 국경을 조정하면서 연나라로 넘어갔고 나중에 연나라에서 탁군이 떨어져나올 때 같이 떨어져나온 것으로 보았다.[3] 관영 휘하에서 항우를 추적할 당시의 관직[4] 항우와 동향이라고 한다.[5] 다만 여마동 입장에서 그가 항우와 친하거나 충성심이 깊었는지는 알 수 없다. 팽성전투에서 유방이 크게 패하고 형세가 항우에게 유리할 때도 유방을 배신하지 않았다.[6] 게다가 호치에서 항복한 시점을 보면 유방 휘하에서 5년 정도 종군한 셈이다.[7] 이 당시 한군은 상하구분이 그렇게 엄하지 않아서 전시가 아니면 장수와 병사들이 함께 동고동락하는게 규칙이었다. 승상소하가 직접 병사들에게 밤에 덮을 담요를 나눠줄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소하가 누군지도 몰랐던 한신은 바로 눈 앞에서 담요를 나눠주는 사람이 승상 소하일거란 생각은 전혀 못 하고 소하랑 같은 고향 사람이라는 뻥을 치며 천하의 대사를 논하고 싶으니 만나게 해달라고 청한다. 물론 소하가 소대인은 자네랑 그럴 시간이 없으시다고 매몰차게 거절하지만, 며칠 뒤에 한신은 그 사람이 소하임을 어떻게 알고 기어이 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