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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역사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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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 태사공서
/ 太史公書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저자 <colbgcolor=white,black>사마천
시기 기원전 1세기 전한
언어 한문
권 수 130권
분량 ? ~ 기원전 101년
황제 ~ 한무제 40년

1. 개요2. 편찬 배경3. 서술상의 특징
3.1. 최초의 기전체 사서3.2. 서술 태도3.3. 신뢰도
4. 후대의 평가5. 한국어 번역본6. 《사기》의 구성
6.1. 〈본기〉(本紀)6.2. 〈표〉(表)6.3. 〈서〉(書)6.4. 〈세가〉(世家)6.5. 〈열전〉(列傳)
7. 관련 고사성어8. 외부 링크

1. 개요

太史公曰:余述歷黃帝以來至太初而訖,百三十篇。
태사공은 말한다.
“나는 황제(黃帝)로부터 태초(太初)[1]에 이르기까지의 사실(史實)을 서술하였으니, 이는 모두 130편이다.”
《사기》(史記)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

중국 역대 대표 역사서 이십사사 중 가장 오래된 역사서이자 유일한 통사(通史)이다. 전근대 동아시아 역사서의 틀을 만들어낸 위대한 기록물로 손꼽히며, 전 세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저작 중 하나이자 중국 이십사사의 으뜸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역사서 서술의 대표적 방식 중 하나인 기전체 양식을 성립한 사서이기도 하다.

2. 편찬 배경

중국 전한사마천이 상고 시대의 황제부터 한무제 태초 연간(기원전 104~101년)의 중국과 그 주변 민족의 역사를 포괄하여 저술했다. 본격적인 저술은 기원전 108년 ~ 기원전 91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2]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 사마천의 아버지인 사마담 대에서부터 자료가 준비되었으리라 본다면 저술에 들인 기간은 더욱 늘어난다. 단 한 사람이 이렇게 방대한 기간을 다룬 역사서를 쓴 사례는 전 세계를 통틀어 보아도 드물다.

사마천은 저술의 동기를
가문의 전통인 사관[3]의 소명 의식에 따라 《춘추》를 계승하고, 아울러 궁형의 치욕에 발분하여 입신양명으로 대효를 이루기 위한 것
으로, 저술의 목표는
인간과 하늘의 관계를 구명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관하여 일가의 주장을 이루려는 것
으로 각각 설명하는데, 전체적 구성과 서술에 이 입장이 잘 견지되었다.

'사기'라는 이름 자체는 한나라 사람들이 사마천의 《사기》 이전에 쓰이던 역사를 부르던 명칭이었다. 사마천의 《사기》의 본래 이름은 《태사공서》(太史公書)로, 후한 말에 《태사공기》(太史公記)로 바뀌었다가 이후 사람들이 《사기》라 줄여 사용했다.

《사기》(史記)의 의미를 살펴보면, '사기'란 제목에서 (記)는 글자 그대로 기록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史)의 원래 의미는 《설문해자》(說文解字)에 기사자(記事者)라고 하여
'문자를 이용해 어떤 일이나 사건을 기록하는 사람.'
을 가리킨다, 즉 우리가 아는 '역사'(history)란 개념이 아닌, 직무의 명칭이라 할 수 있다. 다시 정리하면 《사기》(史記)라는 제목은
기록하는 직분을 맡은 사관(史官)이란 사람이 어떤 일이나 사건을 기록하다.
는 뜻이라 할 수 있다. 출전 이런 이유로, 《사기》의 영문 번역명은 '史'의 중의적인 의미를 반영하여 'Records of the History'{역사의 기록(사기)}가 아니라 'Records of the Great Historian'{위대한 역사가의 기록(태사공서)}이다.

단, 분량 자체는 편수에서 연상되는 것만큼 많지는 않은 편인데, 현재 원문만 번역하여 낸 것이 6권 정도 분량이며, 원문은 글자수로만 따지면 52만 6500여 자로 이십사사 중 가장 분량이 많은 《송사》의 1/4 수준이다. 참고로, 역시 편년체 통사인 《자치통감》(총 294권)은 번역본이 30권이 넘는다. 물론 《사기》를 실제로 읽어 보면 결코 분량이 적다고 느껴지지 않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옛날 책의 한 '권' 또는 '편'은 요즘 책의 한 '장'(章) 정도 분량이었다. 분서갱유와 초한전쟁을 거치며 원사료들 다수가 소실된 원인도 있지만 사마천이 살던 시기에는 채륜이 종이를 발명하기 전이라서 필연적으로 부피가 큰 간독에 기록을 해야 했기 때문에, 휴대하기 적절한 부피로 나눈 각 '편'의 분량은 적음이 당연했다.

사마천궁형이라는 치욕을 감내하면서까지 쓴 책으로도 유명하다.[4]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자신을 고자로 만든 한무제를 비판했다.[5] 사실 한무제에게 공격이 집중되긴 했지만 역대 중국 왕조와 비교하며 한나라 자체도 매우 비판한 편이다. 다만 현재의 황제를 비판한 부분은 후세의 가필이라는 의견도 있다.[6]

3. 서술상의 특징

3.1. 최초의 기전체 사서

《사기》는 역사적 사실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술하는 편년체가 아닌, 각 사건과 인물을 개별적으로 따로 기술하는 기전체 형식으로 서술된 최초의 역사서이다. 이후 분열기를 통일한 통일 왕조를 서술하는 데 있어 기전체의 장점이 부각되어, 중국 정사 이십사사를 비롯하여 고려의 《삼국사기》, 조선의 《고려사》 등이 모두 기전체로 쓰였다. 특히 《사기》는 사서로서 완성도는 말할 것도 없고, 문장력도 뛰어나 문학작품으로서의 완성도 역시 대단한 수준이다.

또한 민중과 사회에 대한 생동감 또한 대단하다. 중국에서 《사기》에 나오는 직업군에 대해 통계를 내봤는데 총 1,300여 가지 직업들이 언급되었다고 한다.[7] <본기>(本紀), <표>(表), <서>(書), <세가>(世家)[8], <열전>(列傳)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중에서 인물에 대한 기록은 <본기>, <세가>, <열전>이다. <본기>는 천자의 기록, <세가>는 춘추전국시대전한대의 제후들의 기록, <열전>은 그 밖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기록이다. 사마천 - - - - 으로 정통성이 이어진다고 보아 하, 상, 주, 진시황 일대기를 모두 <본기>에 서술했다.

3.2. 서술 태도

후대의 역사책과 비교하여 특기할 점은 명분과 정치 이념보다 실제를 더 중시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항우는 한때나마 천하를 제패한 패왕으로 인정하여 <세가>나 <열전>에 서술하지 않고 <본기>에 서술했다. 또한 전한의 제2대 황제인 혜제와 그의 뒤를 이은 제3대 황제 소제, 제4대 황제 소제 모두 허수아비 황제였기 때문에 그들의 <본기>는 아예 없고, 대신 <여태후 본기>가 들어가 있을 정도이다.[9] 《사기》가 전한의 제7대 황제인 한무제 시기에 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눈치를 보지 않고 대단히 과감하게 처사한 것이다. 그만큼 항우여후의 임팩트가 어마어마했다는 소리일 수도 있겠다. 한(漢) 왕조 아래 살던 당시 사람의 입장에서는 특히 더 그럴 것이다. 혹은 사마천이 한무제에게 궁형을 당했기 때문에 한 왕조에 대해 심사가 좋지 못했던 점을 반영했다고 보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한(漢) 왕조의 찬양을 위해서 그랬다는 설도 있다. 항우의 격을 너무 낮추면 그에게 항상 패배했던 고조 유방의 격도 덩달아 낮아지지만, 항우의 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그를 패사시키고 한 왕조를 창시한 유방의 격 또한 높아진다는 의도가 반영되었다고 본 것이다.[10] 여후는 유방의 아내이고 제2대 황제의 어머니로 정치 쪽에서는 확실히 간섭을 많이 했으니 이를 완전히 숨길 수도 없었을 것이다.

<세가> 역시 실제로는 제후가 아니었던 공자진승[11]을 <세가>에 넣었음도 특이하다. 공자는 중국, 나아가 동아시아에 미친 영향은 <세가>가 아니라 <본기>에 서술된 그 어떤 황제들보다도 위대한 업적을 세운 위인이니 <세가>에 넣어도 이상하지 않지만, 공자가 처음으로 추시된 것이 전한 말기였으니, 꽤나 선구적인 태도임은 분명하다.

사마천이 《사기》를 쓰던 시점은 유학이 전한의 국가 이념으로 정립되던 시기로 유교의 정치 사상인 '명분론'이 확립되던 때였다. 사기가 모델로 삼았던 《춘추》가 역사비평서라는 본래의 모습에서 벗어나 유교적 명분론을 담은 정치 철학서로서 독해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상당히 이색적인 서술 태도를 보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마천 역시 《춘추》를 대단히 고평가하긴 했다. 《춘추》를 두고 천자, 신하, 아비, 자식 모두 통달해야 할 최고의 책이라고 극찬한 바 있다. 이는 유교적으로 접근한 것은 아니며, 공자가 세상만사를 포폄함으로써 세상에 큰 가르침을 남기려 했다는 점을 높이 산 것이다.

기본적으로 사마천도가를 상당히 중요시했다. <태사공자서>에서 사마천은 각 제자백가를 평가했는데 도가를 두고는 편애가 느껴진다. 사마천은 도가의 가르침을 따르면 만물의 실체를 통달할 수 있으며 도의 규범에 순응하는 것이야말로 군주가 지켜야 할 법도라고 적었다. 유가, 법가, 묵가 등을 다룰 때는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을 사정없이 드러내지만, 도가를 두고는 비판하지 않는다. 한나라 초기에는 진나라의 엄벌주의에 반해 <과진론>[12]이 유행하고 무위의 치를 높이 사는 도가가 유행했는데, 사마천 역시 이 영향 아래 있었던 모양이다.[13] 궁형을 받는 것 역시 사마천이 유학자였다면 절대 받아들이지 못했을 형벌이다.

전한 초기까지만 해도 유교는 사실상 허울이나 마찬가지였고, 실제 정치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랬다. 한고제부터 시작해서 한무제까지의 시기 중에서 유교가 정치 수준까지 영향을 미친 시기는 없다. 본격적으로 유교가 실제 정치를 포함한 의식 세계의 본질에 영향을 주기 시작하는 것은 제11대 황제인 한원제 시기에 이르러서인데, 원제는 젊어서 유교에 심취했다가, 아버지 한선제가 이러다가 나라 망치겠다고 하여 황위에 오르지 못할 뻔했다. 실제로 한원제 이전의 한나라 유학은 우리가 아는 유학과는 다른 냄새가 많이 난다. 단적으로 전한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동중서는 <오행설>을 들고 나왔는데, 유가와 별개의 학설을 한무제의 지배논리에 끼워 맞추기 위해 유가에 끌어다 붙인 것이었다. 사마천은 한대 유학이 내세운 (도참, 참위 등) 미신적인 믿음은 혐오했다. 이런 미신과 같은 유교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스며드는 것은 실질적으로 신 왕조을 세운 왕망의 영향 때문이었다.

다만 사마천이 한대 유교를 신봉하지는 않았지만 선진(先秦)의 '유가'에 대해서는 상당히 긍정했다. 젊어서 유학을 배운 영향도 있을 것이며, 공자의 《춘추》를 높게 평가한 점이 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점을 고려해서 본다면, 사마천은 어느 정도 유가적으로 《사기》를 썼다고 볼 수도 있다. 한나라의 유교는 이후의 유교와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명분에 모든 것을 걸기 시작하는 것도 한참 뒤의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국가에서 돈을 들여 관리 감독하는 책이라면 국가 이데올로기에 맞춰서 구성되지만 국가가 본격적으로 감독한 것은 수•당대에 이르러서이다.

또한 법가 사상에 대한 비판이 지배적이며,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법치주의 비판이라기보단 엄벌주의에 대한 비판이 항상 들어있다.[14]

3.3. 신뢰도

《사기》의 신뢰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상나라(은나라) 관련 기술이다. 상나라는 사마천이 살던 시기인 전한과도 1,000년 가까운 간격이 있었던지라 《사기》에 서술된 상나라 기술의 신뢰도에 대한 의문은 계속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이전까지 상나라는 전설 속의 왕조이고, 거기 《사기》에 나오는 왕이나 사건들은 모두 지어낸 거짓말이나 구전으로 떠돌던 신화나 전설을 사마천이 집대성한 걸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15] 그러나 20세기에 상나라의 수도였던 은허에서 발굴된 갑골문에 나타난 상나라 왕들의 이름과 순서가 《사기》의 기술과 거의 일치하여 《사기》의 상나라 관련 기사에 대한 신뢰도를 증명해주었다. 상나라/계보 문서 참조. 즉, 이런 각 부분부분에서의 실제 사실과의 일치가 종합적으로 모여 《사기》 전체의 신빙성/신뢰도를 높여 주는 것이다.[16]

춘추전국시대에 즉위한 일부 군주들의 재위기간의 오류 문제와 기록이 누락된 군주[17] 및 <공자 세가> 등 몇몇 부분에서는 일부 기사가 신빙성을 의심받기도 하나[18], 으레 그렇듯이 교차검증에서 걸리는 부분에 한정된다.

위 각주처럼 먼 후대의 사람 사마천이 어떻게 이사와 조고의 은밀한 대화를 알았겠느냐 하는 의심도 있긴하나, 추가적인 사료가 나오지 않는 이상 어떻게 가능했겠냐는 의문과 가정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 사서를 부정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은 심히 위험한 발상이기에 기본적으로는 사서를 따르는 게 맞다.

사마천도 결국은 사람이고 취사선택 및 연구의 한계, 외부의 영향이 1도 없었을리는 없기에 사마천의 기록을 어디까지 신뢰해야 할지는 현재 학자마다 의견이 확연하게 갈린다. 관련 연구서를 종합해서 낸 유리 파인스(Yuri Pines)와 로타르 폰 팔켄하우젠(Lothar von Falkenhausen) 등이 말하듯, 현재 학계의 잠정적인 합의는
《사기》의 왜곡과 오류에는 비판적으로 접근하되, 《사기》와 사마천의 커다란 공헌도 부정하지 않는다.
정도이다. 고고학과 출토문헌을 빼고, 전래 문헌만으로 중국 고대사를 완벽히 재구성하기가 불가능함은 이미 상식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사마천의 사기 역시도 오류가 없는 완벽한 역사서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고전 역사서에 대한 의심은 유독 서구에서 자주 나오기에 자연스레 반발심이 나오는 편이다. 다만 서구 사학계의 이런 성향이 아무 근거없이 나온 것이 아님을 알아둘 필요도 있다. 근래에 이루어진 고고학의 성과와 출토 문헌의 활발한 활용은, 기존 전래 문헌의 신뢰성을 많은 부분 입증하기도 했지만, 반대로 전래 문헌의 오류들을 상당 부분 입증하기도 했다. 이는 《사기》 역시 마찬가지라 많은 신뢰성이 출토를 통해 증거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오류들 역시 발견되고 있다.

그 일례가 바로 《죽서기년》으로, 《죽서기년》에 기록된 내용과 《사기》에 기록된 내용을 교차검증하면 교차불가한 내용들이 있으며, 상기한 갑골문 중 주왕(제신) 시대에 쓰여진 갑골문 기사 또한 《사기》에 기록된 주왕에 대한 기록과 상당히 정반대의 기사들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4. 후대의 평가

물론 《사기》는 원저(原著) 그대로의 형식과 내용으로 현전하지는 않는다. 당장 표제가 사마천이 실제로 붙였던 '《태사공서》'가 아닌 '《사기》'라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열전> 맨 마지막 부분인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
"정(正)·부(副) 두 본(本)으로 써서 정본(正本)은 명산에 보관하여 사라질 것에 대비하고, 부본은 경사(京師)[19]에 보관하여[20] 후세의 군자를 기다리겠다."
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130권 가운데 <효경본기>, <효무본기>, <예서>, <악서>, <병서>, <한흥이래장상명신연표>, <삼왕세가>, <부근괴성열전>, <일자열전>, <귀책열전> 등 10권은 이미 전한 후기에 그 전권 또는 일부분이 빠져서 저소손(褚少孫)이 다른 자료들을 참조해서 보충했다. 예를 들어 저소손은 <귀책열전>을 시중에서 구하려고 했으나, 구하지 못해 다른 책들을 참조하여 보충했다고 한다. 사마천이 죽은 지 100년도 못 되어서 이런 상황이었다면 《사기》의 초기 역사는 상당한 수난을 겪었을 가능성이 높다.[21][22]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사기》 주석서는 남조 유송 때 배인(裴駰)[23]이 쓴 《사기집해》(史記集解) 130권이다. 사마천의 시대로부터 약 600년이 경과한 이 시대에는 《사기》가 상당히 읽혔던 것 같은데, 탈간(脫簡)·착간(錯簡) 또는 서사(書寫)할 때의 오기(誤記) 등으로 판본이 각기 달라서 그것을 통일하는 주석서가 필요했을 것이다.

· 시대가 되니 종이에 서사된 《사기》가 몇 가지 나타났다. 당나라때는 사마정(司馬貞)이 《사기집해》(史記集解)를 근거로 《사기색은》(史記索隱) 30권을 짓고, 또 <삼황본기>(三皇本紀)를 만들어 이에 주석을 붙였으며, 장수절(張守節)이 다시 《사기정의》(史記正義) 130권을 지었다. 《사기집해》, 《사기색은》, 《사기정의》를 통틀어 사기 삼가주(三家注)라고 부른다.[24]

현대 역사가들은 《사기》를 단순한 사서가 아닌 태고부터 춘추전국시대를 지나, 한무제까지의 오만군상의 인간상과 사마천 본인의 개인적 고뇌가 담긴 인간학의 저서로 평가한다.

19세기 말 ~ 20세기 초의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량치차오는 《사기》의 10대 명편을 선정했는데, <항우본기>, <위공자열전>, <염파인상여열전>, <노중련추양열전>, <회음후열전>, <위기무안후열전>, <이장군열전>, <흉노열전>, <화식열전>, <태사공자서>를 꼽았다. 또한 사마천의 《사기》로 중국에 역사학이란 것이 시작되었다고 평가했다. 조선 정조 역시 《사기》를 한문 문장의 전범(典範)으로 호평하고[25] 《사기》에서 문장의 모범이 될 만한 열전 27편[26]을 뽑아 《어정사기영선》(御定史記英選)을 편찬하기도 했다. 《삼국지》의 왕윤채옹을 죽일 때 《사기》를 '정부를 헐뜯고 비난하는 방서'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분명 보수적이고 정통주의적인 지식인들의 시점에서는 그랬겠지만, 오히려 최고 권력자에게도 서슬 퍼런 역사의 붓을 들이댄 사마천의 용기와 신뢰성을 높게 평가해 주는 장점이 되었다. 《사기》는 당나라때부터 관리 임용 시험 과목에 들어가면서 중시되어 송나라에서도 역사가와 문인들의 주된 관심대상이 되었다. 당•송 8대가 중 한 명인 한유(韓愈)는 사마천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나, 유종원(柳宗元)은 《사기》를 웅심아건(雄深雅健), 즉
'문장에 힘이 있고, 함축성이 있어 품위가 빼어나다.'
고 평가하면서 문장 학습의 기본 틀로 삼았고, 구양수(歐陽脩)는 《사기》 애호가로서 《사기》를 즐겨 읽으면서 작문에 활용하고자 했다.

《사기》에 대한 평가는 원나라때 잠시 주춤했으나, 청나라에서는 기윤(紀昀)과 조익(趙翼) 등이 재평가했고, 량치차오(梁啓超)는 사마천을 '역사계의 조물주'라고 떠받들었다. 장빙린(章炳麟)도 《사기》와 《한서》를 같은 대열에 두고, 역사의 전범으로 여겼다.

특히 근대 중국의 위대한 문학가 루쉰(魯迅)은 《사기》를 일컬어
"역사가의 빼어난 노래요, 운율 없는 이소다."(史家之絶唱, 無韻之離騷) - 《한문학사강요》(漢文學史綱要) -
라고 극찬했다.

《사기》는 군주에 대한 기록을 다룬 <본기>(本紀)보다 당대의 인물들에 대해 다룬 <열전>(列傳)이 좀 더 재미있고 읽기 쉽다는 평가를 받는다. <본기>는 천자의 일생과 업적을 다루고 있어서 연표에 따라 조금 딱딱하게 구성된 반면에[27], <열전>은 다양한 인물군상을 다루고, 연도에 그리 얽매이는 편도 아니라 <본기>에 비해 덜 지루하며 더 생동감이 넘친다. 현장 답사 위주로 쓰여진 <열전>들은 문학적으로도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흥미로운 일화나 사마천의 생각, 인물평 또한 <열전>에 가장 잘 드러나 가르침 역시 <열전>에서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다.

5. 한국어 번역본

한국에 소개된 번역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부분 중요한 편만 추려내서 뽑은 것이 많다. 국내에 《사기》와 관련된 책을 보면 <열전>에서 추려낸 책들이 대부분이다.

6. 《사기》의 구성

사기(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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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1권 「오제본기(五帝本紀)」 2권 「하본기(夏本紀)」 3권 「은본기(殷本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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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황제 · 이세황제 · 진왕 자영
<rowcolor=#ffffff> 7권 「항우본기(項羽本紀)」 8권 「고조본기(高祖本紀)」 9권 「여태후본기(呂太后本紀)」
항우 유방 여치
<rowcolor=#ffffff> 10권 -2「효문본기(孝文本紀)」 11권 「효경본기(孝景本紀)」 12권 「효무본기(孝武本紀)」
유항 유계 유철
보사기(補史記) 「삼황본기(三皇本紀)」
복희 · 여와 · 신농
※ 13권 ~ 22권은 표에 해당, 23권 ~ 30권은 서에 해당. 사기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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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가(世家) ]⠀
||<-2><tablewidth=100%><tablebgcolor=#3d414d><width=33%><rowcolor=#ffffff> 31권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 ||<-2><width=33%> 32권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 ||<-2><width=33%> 33권 「노주공세가(魯周公世家)」 ||
⠀[ 열전(列傳) ]⠀
||<-2><tablewidth=100%><tablebgcolor=#3d414d><width=33%><rowcolor=#ffffff> 61권 「백이열전(伯夷列傳)」 ||<-2><width=33%> 62권 「관안열전(管晏列傳)」 ||<-2><width=33%> 63권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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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진 천하의 옛 이야기들을 망라하되, 왕들이 일어난 그 처음과 끝을 탐구하고 그 흥망성쇠를 관찰하며 사실 진행에 따라 고증해 간략히 삼대의 사실을 추구하고 진나라와 한나라의 사실을 기록했는데, 위로는 헌원으로부터 아래로는 지금에 이르기까지를 12본기로 기록하되, 모두 조목별로 나누어 설명했다.

사적에는 시대가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어 연대의 차이가 분명하지 않으므로 10표를 만들었다.

예악의 증감, 법률과 역법의 개정, 병권, 산천, 귀신, 하늘과 인간의 관계, 시대와 세상에 따라 변화하는 것에 대한 내용으로 8서를 지었다.

별자리 28수가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고 있고, 30개의 바퀴살이 모두 하나의 바퀴통에 집중되어 있어 끝없이 돌고 도는 것처럼, 천자를 보필하는 신하들을 이에 비유해 그들이 충신의 도리로서 천자를 받드는 모습을 내용으로 30세가를 지었다.

의로움을 따르고 재능이 빼어나, 때를 놓치지 않고 천하에 공명을 떨친 사람들의 일들을 내용으로 70열전을 지었다.

합해 130편, 52만 6500자[43]이고, 이를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부른다."
《사기》 <태사공자서>

6.1. 〈본기〉(本紀)

중화 세계를 지배한 통일국가와 천자에 대한 기록이다. 항우와 여태후가 〈본기〉에 들어 있는 것이 특이점이다. 명분과 신분보다 그 인물이 끼친 영향력과 업적을 중시한 사마천이기에 위의 두 인물이 편입될 수 있었다.

6.2. 〈표〉(表)

도표 형식으로 사건을 기록한 것. 즉, 연표이다.

6.3. 〈서〉(書)

당시의 생활상이나 제도, 풍속 등을 기록한 사회사 기록이다. 후대 역사서들의 <지>(志)에 해당된다. 내용의 손실이 극심했는지, 사마천이 쓴 목록과 현재 남은 목록이 비율상 가장 다르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현재 남은 부분은 후대에 자료를 수집해서 채우고, 자료가 없는 경우에는 아예 새로 쓴 것들이다. 원래는 <예서>, <악서>, <병서>, <율력서>, <천관서>, <하거서>, <봉선서>, <평준서>의 순서대로 있었는데, <예서>, <악서>, <병서>는 망실된 뒤 <예서>와 <악서>는 다른 자료들을 토대로 다시 만들어졌으나 <병서>는 끝내 복원되지 못했다. 또한 <율력서>가 <율서>와 <역서>로 쪼개져 8서 체제를 갖춘다.

6.4. 〈세가〉(世家)

춘추전국시대의 유명 제후들 및 전한의 황족, 제후들과 고관들의 기록이다. 여기에 공자진승이 포함된 것이 특이한 점이다. 오, 초, 월의 경우 이리저리 윤색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민족 국가였을 가능성이 높다. 《사기》를 본떠 만든 《삼국사기》에는 제후국이 따로 없었던 만큼 <세가>가 없으며, 중국의 정사 또한 한나라 이후 중앙집권체제가 된 관계로 제후가 독립적인 통치 권한이 없는 작위에 불과하게 되어 대부분 <세가>를 생략했다. 반면 제후를 자처한 조선에서는《고려사》를 쓸때 <본기>를 없애고, 고려 왕사를 <세가>에 적었다.

6.5. 〈열전〉(列傳)

천하에 공명을 떨친 인물들에 대한 기록이다. 한족이 아닌 타민족의 역사도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으며, 다양한 직업을 가진 수많은 인물들이 총망라되어 있다.분량도 독보적으로 많은 편.무엇보다 가장 재밌는 파트다.

한문학의 산문 갈래인 문학의 시초이기도 하다. 후대의 실전(實傳), 가전(假傳), 탁전(託傳) 등은 물론, 전책(傳冊)이라 불리던 조선 후기, 인물 중심의 소설 (한글 소설 포함) 등도 계보를 따져보면 사마천의 〈열전〉이 원조라는 이야기이다.

7. 관련 고사성어

8. 외부 링크



[1] 한무제일곱 번째 연호. 한무제는 총 11개의 연호를 썼는데, 태초는 기원전 104~101년에 사용되었다.[2] 사마천이 거세당하기 전부터 시작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날짜가 불분명하나 사마천은 기원전 98년 연말에 거세당했다. 근데 음력 연말이라 양력으로는 기원전 97년 1월일 수도 있다. 거세당하고 회복후 풀어준 시점이 97년초였다.[3] <태사공자서>에서 자신의 집안이 대대로 사관을 세습한 집안임을 밝히고 있다. 원래 아버지 사마담이 사서를 저술하려 했으나, 역사 기록과 함께 천문, 역법을 담당하던 태사령의 직책에 있었음에도 한무제의 봉선 의식을 수행하지 못하자 이를 치욕으로 여겨 사마천에게 사서 저술을 당부하고 화병으로 죽었다.[4] 사마천이 궁형을 감수한 이유에 대한 연세대 김선자 교수의 간략한 설명.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보고자 하면 사마천 항목 참조.[5] 국가에 비판적인 사람이었다는 설도 있다. 실제로 탐관오리에 대한 비판 절대 다수가 한무제 때 사람들이며, 창업황제 유방의 최대 적수였던 항우를 <열전>이 아닌 <본기>에 기록하여 높게 대우해 주었다. 한무제는 본인 인생도 멸망시켜 버렸지만, 아버지의 인생에도 치명적 상처를 준 철천지 원수라 도저히 좋은 평가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6]삼국지연의》에서는 왕윤이 이를 근거로 채옹을 살려주지 않고 죽였다.[7] 사마천이 <태사공자서>에 자신이 젊은 시절 중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생생한 삶을 체험했다고 소략하게 써 놓았는데, 이 경험이 《사기》를 쓰는 데 중요한 밑바탕이 되었을 것으로 본다.[8] 참고로, 일부 판본에서는 世家 대신 係家라고 쓰였다. 이는 오자가 아니라 해당 판본이 당나라 시대 것이라 태종 이세민의 이름을 피휘해서이다.[9] 참고로 후한대에 나온 《한서》는 명분을 보다 중요시하여 항우는 <열전>에 넣고 혜제 대에는 <혜제 본기>를 따로 두었으며, 혜제의 뒤를 이은 두 명의 소제 시기만 <고후기>(高后紀)에 포함시켰다.[10] 이렇게 하면 유방은 져도 이겨도 폄하되지 않는다. 유방이 지는 장면에서는 '항우가 이렇게 대단한 인간이니 져도 이상하지 않다.'고 하면 되고, 이기는 장면에서는 '항우가 이렇게 대단한데 그 항우를 이겼으니 얼마나 대단하냐.'라고 찬양할 수 있다. '그럼 그렇게 대단한데 왜 졌냐?'에는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고 하면 그만이다.[11] 진승이 스스로 장초(長楚)를 세워 왕을 자칭했으나 자칭 왕이면 또한 왕이지 역시 제후는 아니다. 아마도 사마천은 진승을 제후로 인식하거나 제후급 영향력을 보였다고 평가하여 <세가>에 넣은 모양이다. 사실 한고조도 진승에게 왕위를 내리고 무덤을 관리하게 하는 등 대우했다.[12] 진나라의 잘못을 논함[13] 이 시기 유행한 도가 사상을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의 학문'이란 뜻으로 황로학(黃老學)이라고 부른다.[14] 사실 또 이는 《사기》의 <열전> 중 <혹리열전>에 수록된 12명의 혹리들 중 10명이 엄벌주의, 원칙주의 등을 빙자한 편리주의를 한 것도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실제로 사마천은 그 10명은 비판하면서 나머지 2명인 질도와 장탕에 대해선 '참혹하다' 등의 평가를 내리면서도 '공정했다'거나 '그 자리에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등의 긍정적인 평가도 했다.[15] 현재는 존재 증거가 나오지 않은 하나라가 이런 전설 속의 왕조 취급을 받고 있다.[16] 물론, 사람이 적는 이상, 그리고 정보 수집의 한계는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므로, 《사기》에 기록되지 않거나 아래에서 말하는 식의 교차검증에서의 한계는 존재할 수밖에 없으나, 사마천의 시대를 감안하고 본다면 이런 수준의 정확성은 엄청난 것이다.[17] 위나라(魏)의 군주인 위혜왕위양왕의 재위기간의 오류및 제나라(齊)의 군주인 전도자(田悼子)와 제후섬의 누락으로 인해 전제(田齊) 초기에 꼬여버린 군주의 재위기간 등.[18] 사실 가장 대표적으로 언급될 만한 것이 <진 본기>의 한 부분이다. 조고이사가 서로 짜고 시황제의 유서를 빼돌렸는지 안 빼돌렸는지는 동시대 인물들도 쉽게 알 수 없다.[19] 당시 수도였던 장안을 말한다.[20] 외부에 공개하지 않고 집안에 두어 물려주었다가 한선제 대에 외손자 양운(楊惲)이 세상에 공개했다고도 하고, 무제 대에 이미 공개되었다고도 한다. 하술하듯이 정황상 무제 대에 이미 공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시기는 달라도 같은 한나라 사람인 저소손이 사마천이 쓴 원본이 실전되어 손을 본 내용이 많다.[21] 《삼국지》 <종요화흠왕랑전>에 따르면 왕랑의 아들 왕숙명제(조위)와 대화를 할 때 위명제가 사기를 두고 한무제를 비방하려고 쓴 책이라고 평하자, 왕숙이 사기는 객관적으로 쓰인 탓에 <효경본기>와 자신의 본기를 읽어 본 한 무제가 크게 화를 내며 파기해 버려 내용은 없이 목록만 남게 되었고, 후에 이릉의 사건 때 무제가 사마천을 궁형에 처해 버렸다고 언급하는 구절이 있다.[22] 서경잡기에도 비슷한 언급이 있는데, 사마천이 <효경본기>를 통해 경제의 과실과 무제의 단점을 죄다 기록하자, 분노한 무제가 해당 부분을 삭제해 버렸고, 후에 이릉의 사건 때 연좌하여 궁형에 처해 버렸으며, 한선제대에는 태사공 직책을 태사령으로 깎고, 다시는 사마천의 후손들을 관직에 등용하지 않았다고 한다.[23] 배송지의 아들.[24] 2020년 한가람역사연구소 《신주 사기》에서 삼가주, 삼가주석을 포함한 완역본이 처음 나왔다. 다만 한가람연구소는 그 악명높기로 유명한 이덕일 소장의 연구소로, 환빠적 민족주의 논리에 오염되었을 가능성이 상당하고, 실제로도 서문에 강단사학 운운하는 등 주의가 필요하다.[25] 정조는 당대에 유행하던 문장을 철저히 배격하고, 고문 중심으로 돌아가자는 문체반정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26] 여기에 《한서》 <열전> 여덟 편까지 더했다.[27] 줄창 역사만 늘어놓는다.[28] 대표 번역자는 성균관대 총장을 지낸 바도 있는 정범진 성균관대 중문학과 명예교수이다.[29] 다만 김원중 교수의 단점인 오역이 많아서 좋은 소리는 못듣고 있다.[30] 번역 당시 건양대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 위의 까치판 번역에도 참여한 바 있다.[31] 2015년에 기존에 번역한 것 중에서 <표>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의 오류를 수정하고, 미주였던 주석을 각주로 바꾸었다.전공자들 사이에선 개정판도 도대체 뭘 바꿨는지 모르겠다란 평가가 많다[32] <표>까지 번역한 네 번째 《사기》이다. 2018년 올재 클래식스에서 나온 사기도 신동준 완역본이다.절판 되었다[33] 예를 들어 현전하는 <악서>는 사마천이 쓴 것은 사라지고 후대에 예기의 악기편을 참고하여 가필한 것이라는 게 《사기지의》 이후 주류 의견이었으나, 신동준의 경우 가필론을 언급하면서도 사마천이 처음부터 예기의 악기편을 참고하여 <악서>를 작성했다고 보는 입장이다.[34] 한국사마천학회의 발기인이기도 하다. 위에 링크한 네이버의 《사기》에 들어간 중국과 관련된 사진 자료들을 제공한 사람이기도 하다.[35] <본기>, <세가>, <열전>, <표>, <서> 순서로 발매될 예정이고, 현재 <본기> 2권에 <세가> 2권까지 발매되었다. 12권 완간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한다.[36] 전한부터 봉건제가 사라져 군현제가 자리 잡았고, 중화제국과 조공-책봉 체제를 이어가던 주변국은 열전으로 남아있으니 세가가 낄 틈이 없어진 탓이다. 진서에 세가에서 변형된 재기가 있긴 한데, 제후국의 기록이라기보다는 오호십육국 시대에 대권에 도전한 여러 인물들의 개인 기록에 가까워 사기의 세가와는 저술 맥락이 다른 편이다.[37] 이덕일이 소장으로 있는 곳이다. 표지 뒷면에서 ‘동이족 역사=우리 역사’ 운운하는 것이 다소 당황스럽기도 하다.[38] 이덕일이 혼자 신주 사기를 전체 번역한 것은 아니지만, 이덕일 스스로가 한문 해석을 내세울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여러 사례가 있기 때문에 의심스러운 점도 있다.[39] 고문에 구두점을 찍고, 오탈자 등을 바로 잡은 것.[40] 1983년 대만 굉업서국에서 낸 표점교감본도 있다.[41] 다만 언급한 수정공정이 동북공정의 일환이 아닌지 의심하는 시각도 있는 편이다.[42] 김영수, 장세후, 송도진 번역은 아직도 출간중 이기 때문에 평가에서 제외[43] 다만, 현전하는 《사기》는 55만 5660여 자 정도로 약 3만 자 남짓 더 많은데, 후대에 빠지고 더해진 결과이다.[44] 국내에서 시판 중인 완역본 《사기》 중에서 〈삼황본기〉를 실은 번역본은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번역본뿐이다. 일부 편역본에서 〈삼황본기〉를 수록한 정도이다.[45] 《서경잡기》(西京雜記)의 기록에 의하면 사마천이 〈경제본기〉에 경제무제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을 담자 무제가 잔뜩 화가 나 그 내용을 지워 버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와 비슷한 내용이 정사 삼국지 위서 왕랑전에 언급되어 기록 되어 있다.[46] 후대에 《한서》 〈경제기〉를 참고하여 소략하게 작성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47] 금상(今上)은 현재 왕위나 황위에 앉아 있는 임금을 이르는 말이다. 아직 군주제가 남아있는 일본에서는 오늘날에도 나루히토를 금상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다.[48] 원제선제대의 인물로, 현존하는 《사기》에는 이런 식으로 저소손이 보충한 곳이 상당히 많다.[49] 〈효무본기〉의 내용이 봉선 의식과 관련된 내용으로 가득찬 이유가 무제의 경우, 수십 년 제위에 있으면서 한 것이라고는 사치스럽게 제사를 지낸 것밖에 없다는 사마천의 비판적인 시각을 반영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50] 송대에 판각하면서 잘못 찍힌 것으로 보인다.[51] 청대의 고증학자 양옥승(梁玉繩)이 《사기》의 내용을 분석한 사료 비판서.[52] 다만, 사마천은 이 개념에 비판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53]신오대사》를 제외하면 《한서》 이후 중국 정사의 재정 및 경제 관련 편의 표제는 <식화지>로 굳어진다. 한반도 역대 왕조의 역사서 중에서는 《고려사》에 <식화지>가 포함되어 있다.[54] 《사기》에는 언급이 없지만 곽숙처는 3년 후 복위했다.[55] (陳)에서 망명한 공자 진경중완의 후손이다.[56] 제태공제환공 사이에 제후 섬이라는 군주가 한 명 누락되어 있다. 그래서 《사기》에서는 제후 섬의 재위기간이 환공의 재위기간에 포함되어 있다.[57] 물론 이것 뿐만이 아니라 한나라의 건국군주인 한고제가 진승에게 '은왕'의 시호를 내린 것도 감안한 것으로 창업군주의 언행은 그 국가가 존속하는 내내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58] 그래서 주인공 이야기가 갑자기 실종되는 구조가 된다.[59]회남자》의 편찬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60] 원래 형산왕은 유장의 차남인 유발이었으나, 유발이 제북왕으로 옮기면서 여강왕이었던 유사가 형산왕이 되었다.[61] 지금의 페르가나 지방이다.[62] 그래서 김영수 역에서는 〈태사공자서〉를 전체 책의 맨 앞, 즉 〈본기〉 앞에 수록하고 있다.[63] 이외에도 네이버에서는 여러 동아시아 고전을 볼 수 있도록 공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