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 | |||
膠 | 柱 | 鼓 | 瑟 |
아교 교 | 기둥 주 | 북 고 | 큰 거문고 슬 |
1. 개요
사마천의 《사기》 염파·인상여 열전에 나온 말이다. 출전(중국어 위키문헌) 줄여서 교슬(膠瑟)이라고도 한다.표면적인 의미는 "기러기발을 아교로 붙이고 슬을 타다"이다. 슬은 고대 중국 악기의 이름으로, 한국에서는 비슷한 악기인 거문고로 대신 풀이하기도 한다.
여기서 기러기발이란 슬 줄에 달려있는 안족(雁足:기러기발) 혹은 현주(絃柱)를 가리킨다. 이를 움직이며 소리를 조절하는건데, 좋은 소리가 나오는 위치를 찾았다고 아교로 고정시키는 것이다. 줄이란 주위 환경에 따라 느슨해졌다 팽팽해졌다 하는건데 당장에 좋은 소리가 나왔다고 고정시키면 당연히 다른 환경에선 못 쓰게 된다. 때문에 이 표현은 고지식하여 규칙에만 얽매이고 융통성이 전혀 없는 이를 뜻한다.
2. 유래
時趙奢已死,而藺相如病甐,趙使廉頗將攻秦,秦數敗趙軍,趙軍固壁不戰。秦數挑戰,廉頗不肯。
趙王信秦之閒。秦之閒言曰:「秦之所惡,獨畏馬服君趙奢之子趙括為將耳。」趙王因以括為將,代廉頗。藺相如曰:「王以名使括,若膠柱而鼓瑟耳。括徒能讀其父書傳,不知合變也。」趙王不聽,遂將之。
趙括自少時學兵法,言兵事,以天下莫能當。嘗與其父奢言兵事,奢不能難,然不謂善。括母問奢其故,奢曰:「兵,死地也,而括易言之。使趙不將括即已,若必將之,破趙軍者必括也。」及括將行,其母上書言於王曰:「括不可使將。」王曰:「何以?」對曰:「始妾事其父,時為將,身所奉飯飲而進食者以十數,所友者以百數,大王及宗室所賞賜者盡以予軍吏士大夫,受命之日,不問家事。今括一旦為將,東向而朝,軍吏無敢仰視之者,王所賜金帛,歸藏於家,而日視便利田宅可買者買之。王以為何如其父?父子異心,願王勿遣。」王曰:「母置之,吾已決矣。」括母因曰:「王終遣之,即有如不稱,妾得無隨坐乎?」王許諾。
趙括既代廉頗,悉更約束,易置軍吏。秦將白起聞之,縱奇兵,詳敗走,而絕其糧道,分斷其軍為二,士卒離心。四十餘日,軍餓,趙括出銳卒自博戰,秦軍射殺趙括。括軍敗,數十萬之眾遂降秦,秦悉阬之。趙前後所亡凡四十五萬。
《사기》, 염파·인상여 열전(廉頗藺相如列傳) # 영인
조나라(趙)에서 이름을 날리던 명장 조사(趙奢)가 죽자 그간 조나라와 천하를 다투던 진나라(秦)가 침략했다. 조나라는 장군 염파(廉頗) 로 응전한다. 하지만 염파는 성만 고수할 뿐 나오지 않으므로 진나라는 속수무책이다.趙王信秦之閒。秦之閒言曰:「秦之所惡,獨畏馬服君趙奢之子趙括為將耳。」趙王因以括為將,代廉頗。藺相如曰:「王以名使括,若膠柱而鼓瑟耳。括徒能讀其父書傳,不知合變也。」趙王不聽,遂將之。
趙括自少時學兵法,言兵事,以天下莫能當。嘗與其父奢言兵事,奢不能難,然不謂善。括母問奢其故,奢曰:「兵,死地也,而括易言之。使趙不將括即已,若必將之,破趙軍者必括也。」及括將行,其母上書言於王曰:「括不可使將。」王曰:「何以?」對曰:「始妾事其父,時為將,身所奉飯飲而進食者以十數,所友者以百數,大王及宗室所賞賜者盡以予軍吏士大夫,受命之日,不問家事。今括一旦為將,東向而朝,軍吏無敢仰視之者,王所賜金帛,歸藏於家,而日視便利田宅可買者買之。王以為何如其父?父子異心,願王勿遣。」王曰:「母置之,吾已決矣。」括母因曰:「王終遣之,即有如不稱,妾得無隨坐乎?」王許諾。
趙括既代廉頗,悉更約束,易置軍吏。秦將白起聞之,縱奇兵,詳敗走,而絕其糧道,分斷其軍為二,士卒離心。四十餘日,軍餓,趙括出銳卒自博戰,秦軍射殺趙括。括軍敗,數十萬之眾遂降秦,秦悉阬之。趙前後所亡凡四十五萬。
《사기》, 염파·인상여 열전(廉頗藺相如列傳) # 영인
결국 계책으로 유언비어를 퍼뜨린다. '염파는 진나라가 두려워 방어만 하니 다행이다, 만약 조사의 아들 조괄(趙括)이 나온다면 큰일인데 다행이다.' 이 소문을 들은 왕이 염파를 해임하고 조괄을 임명하려 할 때 신하 인상여(藺相如)가 만류한다. '그 이름만 믿고 조괄을 대장에 임명함은 슬의 기러기발을 아교로 붙여놓고 타는 것이나 다름없다. 조괄은 상황에 따른 임기응변의 책략을 세우지 못한다'며 간언하지만 왕을 설득하지 못한다. 그렇게 조나라 임금은 인상여의 말을 듣지 않고 조괄을 대장에 임명한다.
한편 그 소식을 들은 조괄의 모친이 조정으로 달려와 이렇게 말한다.
“괄이는 제 아비와 다릅니다. 조사 장군은 살아생전 늘, ‘저 녀석은 병서만 붙잡고 있으면서 자기가 군사를 안다고 착각한다. 저 녀석에게 군사를 맡긴다면 반드시 패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디 저 아이를 장수에 임명하지 마시옵소서.”
그러나 임금은 아랑곳하지 않았고 모친은 다시 말한다.
“그렇다면 전쟁에 패하더라도 우리 식구에게 죄를 묻지는 말아 주시옵소서.”
임금은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장평에서 전투가 시작되자(BC 260) 역시 조괄은 진나라의 계략에 빠져 대패하였고(장평대전), 이때부터 전국시대 강대국 가운데 하나인 조나라는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해 급기야 시황제에게 멸망하고 만다.
3. 기타
청주시 용두사지 철당간에도 이 표현이 쓰였다. 거기서는 교주(膠柱)로 썼다.삼국지연의에서도 쓰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