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전근대 일본에서 있었던 일련의 육식 금지령에 대해 서술한 문서이다. 675년 덴무 천황이 육식을 금하도록 명령한 이래 1000여년 간 중근세 일본에서는 여러 차례의 육식 금지령 및 도살 금지령이 있어왔다. 이 영향으로 인해 일본의 육식 문화는 어패류와 가금류를 중심으로 발전하고, 소고기와 돼지고기 요리는 상대적으로 잘 취급되지 않는 등 기형적인 형태를 띠게 되었다.[1]2. 역사
일본은 당나라 · 백제를 통해 일본에 불교가 유입되어 신토와 함께 자리잡자, 살생을 금하는 불교 교리의 영향이 강해졌다.[2] 헤이안 시대 초기부터 케가레(부정)에 대한 관념이 확산된 탓에 살생을 하면 부정타고 업보가 쌓인다는 인식이 강했다. 그래서 살생을 할 수밖에 없는 육식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도 확대되었고 이는 지속적인 육식 금지령의 반포와 통제 강화로 이어졌다.庚寅. 詔諸國曰. 自今以後. 制諸漁獵者. 莫造檻穽及施機槍等之類. 亦四月朔以後. 九月卅日以前. 莫置比滿沙伎理梁. 且莫食牛馬犬猿鷄之完. 以外不在禁例. 若有犯者罪之.
경인(17일)에 제국(諸國)에 조를 내려 “금후 각종 어업, 수렵에 종사하는 자에게 금하노니 올무를 놓거나 함정을 파는 일, 기계를 이용한 창 놓기 등의 행위를 하지 말라. 또 4월 1일부터 9월 30일 이전까지 어린 고기를 잡는 것을 하지 마라. 또 소, 말, 개, 원숭이, 닭의 고기를 먹는 것을 삼가라. 이 이외에는 금례에 들지 않는다. 만약 이를 어기는 일이 있으면 벌을 내린다.”고 하였다.
일본서기 권29, 덴무 4년(675년) 4월 17일 # 영인 페이지[3]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덴무 덴노의 육식 금지령이다. 675년 덴무 천황은 농경 기간 동안 소, 말 · 개 · 원숭이 · 닭의 섭취와 사냥, 어업을 금지했다.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이 육식 금지령은 육식 그 자체를 금지하는 게 아니라, 4월부터 9월까지 육식 취식을 막는 것이었다. 다만 이를 시작으로 불교를 숭상하는 일본 정권에서는 종종 육식 금지령을 내렸고, 전반적으로 육식을 피하는 문화가 형성되어갔다. 경인(17일)에 제국(諸國)에 조를 내려 “금후 각종 어업, 수렵에 종사하는 자에게 금하노니 올무를 놓거나 함정을 파는 일, 기계를 이용한 창 놓기 등의 행위를 하지 말라. 또 4월 1일부터 9월 30일 이전까지 어린 고기를 잡는 것을 하지 마라. 또 소, 말, 개, 원숭이, 닭의 고기를 먹는 것을 삼가라. 이 이외에는 금례에 들지 않는다. 만약 이를 어기는 일이 있으면 벌을 내린다.”고 하였다.
일본서기 권29, 덴무 4년(675년) 4월 17일 # 영인 페이지[3]
이러한 금지령은 기근과 같은 재난 사태에 종종 이루어졌다. 기근에는 도살 금지령이 많이 내려졌는데, 이는 기근을 신의 징벌로 인식한 조정과 막부가 살생이라는 업보를 쌓아 신과 부처의 진노를 사서 기근이 더 오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내린 조치였다.[4] 막부 역시 쇼군가에 근심거리가 있거나 자연재해, 환난이 일어났을 때에 시행하는 일이 많았다. 신의 벌을 받아 재해가 일어났는데, 괜히 살생을 해서 부정타고 업보를 쌓는다면 사태가 더 안 좋아질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후술할 츠나요시의 생류연령도 실은 후계자가 태어나지 않던 게 영향을 미쳤다.[5] 쇼군가에 후계자가 없는 일을 신불의 진노 때문이라 생각하여 이를 가라앉히고 부정을 떨쳐내려 한 것이다.
2.1. 가마쿠라~무로마치
사냥 문화를 향유하고 육식을 하던 무사들이 권력을 차지한 시기에도 공가와 불교 문화에 영향을 받아 사냥 금지령이나 육식 금지령을 내리는 등 계급 배반적인 일을 저질렀다. 가마쿠라 막부의 막후 실력자 중 하나였던 호조 마사코가 반포한 사냥 금지령이 대표적이다.그러나 초기 무기 정권 시기에 육식 금지령의 강도는 이전보다 확연히 약화되었다. 실질강건을 중시하고 활동량이 엄청난 무사들이 채식만으로 열량을 확보하는 일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무로마치 시대에는 어패류와 가금류 요리가 인기를 끌었다. 조정과 막부가 영락한 전국 시대에는 금지할 권력층조차 없기 때문에 육식 금기는 한층 더 약화되었다. 이 시기에 세계적으로 대항해시대가 열림에 따라 서양 상인들로부터 유럽의 육류 요리가 소개되고 이전 시대보다 더 많은 육류를 섭취했다.
2.2. 에도 시대
도쿠가와 이에츠나의 집권 후반기인 칸분 연간에 육식 금지령을 내리면서 다시 규제가 강화되었다. 바로 직후에 자리를 이은 도쿠가와 츠나요시는 생류연민령으로 개쇼군이란 멸칭을 들었다.그러나 에도 막부가 규제 일변도의 정책만 실시한 것은 아니다. 상술했듯이 일본의 육식 금지령은 규제와 완화를 오가는 것이었다. 에도 막부 시기에 하코네번은 소 사육을 허가받아 쇼군에게 소고기를 진상하는 업무를 담당했고 사쓰마번에서는 번주가 류큐에서 돼지를 수입해 사육했다. 특히 에도 막부의 마지막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사쓰마의 돼지고기를 즐겨 먹었고, 그래서 '부타이치도노(豚一殿, 돼지전하)'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돼지고기를 많이 먹었다.[6] 바로 전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탄수화물 중독과 당분 과섭치로 인해 거의 모든 이빨이 다 썩고, 각기병에 시달리며, 20세란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과 달리, 요시노부는 상당한 미식가였으며 76세의 나이로 숨지면서 에도 막부 최장수 쇼군이 되었다.
2.3.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천황이 메이지 유신을 선포하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육식은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양인과 같은 체격을 위해 권장해야 할 만한 사안이 되었다.[7] 이에 따라 메이지 천황은 자신이 직접 공개적으로 고기를 먹었음을 전하는 것으로 옛 풍습과의 단절을 선언했다. 허나 오랜 기간 동안 고기를 피하다 보니 도축 기술이 부족하고 고기 특유의 누린내에 대한 거부감이 컸다.신정부는 육식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서 스키야키[8], 돈가스[9] 등 경양식이나 일본식으로 개량한 고기 요리를 전파해 서서히 고기에 대한 거부감을 줄여나갔다. 소고기를 먹으면 불로장생한다는 과장광고가 나왔을 정도로 이전과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육식을 문명인의 상징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형성될 정도였다. 이후, 성장을 거듭하던 일본의 육식 문화는 한반도와 대만, 중국의 고기 요리가 유입되고 보편화되면서 이전보다 훨씬 더 다채로워졌고 일본인들의 식탁을 더욱 풍요롭게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비건 국가화를 추진하고 피지배층에게 채식을 강요하던 일본의 지배층들이 메이지 유신 시기부터 일종의 ‘육식 역코스 정책’을 실시해 육식에 대한 인식을 전환하고 육식을 장려하자, 지배층의 탄압에 저항하며 육류를 먹던 일본의 대중들이 역으로 육식 문화 장려에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육식을 문명인의 상징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했지만, 대중적으로 “인성에 문제가 있는 인간이나 고기를 먹고 ‘문명인’이 되었다고 허세를 부린다.”는 분위기도 존재했으며 소고기 식당이 개업했다는 소식만 들리면 식당에 찾아가서 행패를 부리고 영업을 방해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그래서 신정부는 대중들의 정서에 변화를 일으키고 육식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기 위해 1880~1890년대까지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3. 금지 대상
시대/정권마다 규제의 폭과 대중들의 인식은 상이했다.상술한 덴무 천황의 금제에는 식재료로 거의 쓰지 않는 원숭이가 기재되어 있는 반면에 가장 대표적인 가축 중 하나인 돼지는[10] 없다는 점이 다소 특이한데, 멧돼지와 사슴을 사냥하던 무사들의 사냥 문화를 배려했기 때문이다. 후대에는 원숭이를 빼고 돼지, 양을 더해 육축(六畜. 소 · 말 · 양 · 돼지 · 개 · 닭)을 금지한다고 바뀌었다.[11]
심할 때는 역사 내내 제한이 적었던 유제품에도 취식에 부정적인 관념이 드러나는 일화가 있고 어패류와 가금류도 이와 유사한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금제가 가장 심하게 적용되는 것은 소고기로, 가금류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어도 소고기는 대단히 강력하게 제한했다.[12] 그런 한편으로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매우 귀하게 여겨져 약으로도 여겨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대개의 경우 가금류는 허용되었기에 일본 농가에서 닭과 오리는 도축해 먹는 것이 보통이었다. 다만 가금류도 규제할 때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전근대에 일반 백성의 사냥은 종종 통제되는 것이 보통이었고[13] 일본에서는 육식에 대한 금기로 제한이 좀 더 강하긴 했지만 멧돼지 · 토끼 · 사슴 같은 것들을 몰래 밀렵해서 먹는 일도 있었다.[14]
세계적 생선 소비 국가로 유명한 일본답게 어패류는 이러한 통제가 이루어진 적이 거의 없었다.[15] 지금이야 육상 가축과 어류가 똑같이 동물로 묶인다고 생각하지만 대체로 육지에서 기르는 가축과 어류는 다른 부류라고 생각하는 문화가 전세계적으로 일반적이었다. 당시의 관념으로는 가축은 새끼를 낳고 사람이 기르지만 어류는 바다에서 자연발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세 가톨릭 사회의 금육재 때도 생선은 잘 먹었다.[16]
수명이 다해 죽은 동물의 고기는 오정육(五淨肉)에 속해 승려들조차도 마음 놓고 먹을 수 있었다.[17][18]
4. 영향
앞에서 밝혔듯 600년도의 명령 하나가 계속 유지된 것은 아니지만, 나라에서 주기적으로 육식 금지령을 내리기를 반복하다 보니 육류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은 전반적으로 안 좋아졌다. 쌀 문화와 채식 문화의 확산 역시 육식에 대한 지배층의 인식을 더욱 나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일본의 지배층들은 쌀은 고귀한 음식, 고기는 부정한 하품 음식으로 간주했고 이러한 풍조는 일본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특히나 교토의 귀족들은 채식하는 것을 마치 특권처럼 여기고, 육식을 하는 이들을 부정하고 하찮은 자들로 무시했다. 이런 공가 문화가 퍼진 탓에 교토의 식문화는 상당 기간 동안 채식의 비중이 매우 높았다. [19]그런 이유로 전래되는 사연들이 있다. 양갱(羊羹)이란 원래 이름대로 양고기에서 나온 선지로 만든 요리였는데[20], 일본에서 선지를 팥으로 대체해서 만든 것이 현재의 일본식 양갱이 되었다. 만두도 중국은 두꺼운 피에 여러 고기, 야채, 향신료를 넣어 주식으로 먹고 한국은 얇은 피에 고기, 야채, 두부, 당면[21]을 넣어 반찬으로 먹지만 일본은 밀가루 피 안에 팥앙금을 넣어 간식으로 먹었고, 이것이 만쥬이다. 그 외에 양갱과 유사한 과자류로 규히(求肥)라는 것이 있는데 이 역시 중국에서 본래 牛脾라고 소 지라로 만든 음식이었던 것을 찹쌀가루로 대체하고 글자를 求肥로 바꾼 것이다.
일본에서 십이지의 亥가 돼지(ぶた)가 아닌 멧돼지(いのしし)인 것 역시 육식 금지령의 영향인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에서 멧돼지를 기르기 시작한 것이 일본서기에는 600년대 경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22] 이 시기에 육식 금지령도 이루어졌으니 가축으로서의 개량은 미진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돼지는 가축이 아니라 무사들이 사냥하는 야생 동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쓰마를 비롯한 일부 지역에서 가축으로 기른 돼지를 잡아 먹는 것을 본 다른 지역의 주민들은 이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실제 히로시마현의 기록에 따르면, 1681년 조선 사절에게 대접하기 위해 나가사키로부터 수입해온 돼지 중 몇 마리가 먹히지 않고 남았는데, 현지인들이 돼지를 다룰 줄 몰라 무시하고 방치한 결과 번식해서 성과 밭의 식재만 줏어먹는 애물단지가 되었다고 한다. 결국 돼지들은 5년 뒤 번국 측의 결단으로 사냥된 뒤 인근 섬으로 추방되고 나서야 히로시마 성내에서 사라졌다. 그로부터 80년 뒤인 아래 화국지 기록에서 역시 사절에게 돼지가 아니라 멧돼지를 잡아서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금지 대상 문단에서 다루었듯 금제의 영향력이 가장 강한 것은 소고기였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닭고기 · 오리고기 · 생선 · 멧돼지고기 · 사슴고기 · 고래고기 · 계란을 중심으로 단백질을 섭취했다. 괜히 일본에서 스시류가 발전한 게 아닌 것. 일본인들이 오래도록 고래고기에 집착한 것도 육식 금지령과 불교의 영향일 수 있다. 또한, 오리고기는 물에서 나오니 생선이라거나, 멧돼지고기는 산에서 나오니 고기가 아니라 채소라거나, 산에 사는 고래이므로 생선이라거나, 토끼를 새로 간주하고 수를 셀 때 '깃(羽)'으로 세는 것도 이러한 식문화 때문에 나온 말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일본에서 곰고기 섭취 문화가 발달한 것 또한 육식금지령의 영향이다. 사람을 해치는 곰을 퇴치한다는 명목으로 곰을 사냥하여 곰고기를 먹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그 영향이 현대 일본에도 남게 된 것이다.
일본의 덴푸라 문화도 육식 기피의 영향이라는 설이 있다. 고기를 피하려는 과정에서 튀김으로 영양가를 보충하려는 맥락에서 덴푸라를 먹었다는 것이다. 문서에서도 보듯 덴푸라는 포르투갈로부터 전래된 것인데, 어원 설 중 하나로 애초에 포르투갈에서도 금육재 때 고기 대신 먹을 것을 찾다가 튀김을 먹었고 금육재를 뜻하는 tempora에서 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일본의 식문화 발전이 두드러졌던 무로마치 시대에는 가금류 고기와 어패류는 고급 음식으로 취급하면서 야생 동물 고기는 하품으로 취급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조선 통신사 일행의 기록에서 보듯 외국인인 조선인들도 일본인의 식문화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23], 비슷하게 18세기에 출간된 일본의 백과사전 화한삼재도회에서도 "우리나라(일본) 사람들은 고기를 피한다"라는 내용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직업을 다룬 7권에서는 고기를 안 먹어서 장수한다는 식의 믿음도 나타나고 있다.
근대 시기 이후로 일본의 육식 기피 문화는 사라졌지만 현대에도 육류 소비량은 그렇게 높지는 않은 편이다. 2023년 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육류[24] 소비는 1인당 55.25kg으로 OECD 평균(57.6kg)보다 약간 적은 반면[25] 일본은 34.87kg에 불과하여 베트남, 말레이시아보다도 적은 정도이다. 그래도 인도, 태국, 인도네시아처럼 채식 국가에 가까운 수준까지는 아니다.#
4.1. 도축업자에 대한 인식
위에서처럼 시시때때로 육식 금지령, 도살 금지령이 내려지다 보니 도축업자들에 대한 인식이나 형편은 악화되기 마련이었다. 정부의 조치와 불교의 영향으로 인해 무두질, 가죽 세공, 도축업 등이 천하고 부정한 업 취급을 받게 된 것이다. 도덕적 관념을 차치하고서라도 도살 금지령이 내려지면 도축업자들은 당장의 일거리를 잃어버리는 셈이었다. 그나마 무가 정권 시기에 도축업자와 가죽 세공업자들은 무사들의 식단을 풍성하게 만들어주고 의복과 갑옷 제작에 필요한 가죽을 다루었기 때문에 영주나 호족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들이었으므로 이들은 천민 취급받을지언정 무사들의 시종이 되어 나름대로 그 지위를 인정받고 생계를 영위할 수 있었다.한편 1970년대 이후 연구에서는 육식 금지령과 일본의 도축업자의 낮은 지위가 큰 관련이 없다는 견해도 나타나고 있다. 조선의 신량역천이나 천민 취급을 받던 에타와 히닌들 같은 경우, 빈곤에 시달리던 빈민층과 천민 취급받던 이들이 생계 유지를 위해 평민들이 기피하던 무두질, 가죽 세공, 도축업에 종사하게 되었다는 관점이다. 즉, 가축 관련 노동을 하던 이들이 천한 취급을 받은 것이 아니라 천민이 이들 직종에 몰렸다는 것이다.[26]
4.2. 와전된 일화
육식 금지령은 오늘날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데, 이는 일본의 육식이란 것이 메이지 유신이라는 성공한 근대화의 상징이라는 측면도 적지 않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돈가스나 고로케 같은 음식이 한국에도 매우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현대인에게도 "옛날에 일본에선 고기를 안 먹었는데 메이지 유신 때 해금하고 이런 음식이 만들어졌다더라" 하는 식으로 널리 이야기되었다.[27] 잘 알려진 한국의 교양 역사 만화인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에서도 일본의 육식 금지령과 메이지 유신 시기의 풍경을 한 코너에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다소 과장된 에피소드들도 존재한다.- 상술한 바와 같이 본 사건은 한 법령이 1000년간 유지된 것이 아니라 일련의 흐름을 나타내는 것이다. 때문에 이 금제로 인해 근대 이전에 일본의 육류 요리가 전무했다는 것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단지 일본 요리에서 생선이 너무 압도적인 주류를 차지하고 있고, 육류 요리는 유명한 게 별로 없어 그렇게 보일 뿐이다.
- 일본인의 체격이 작은 게 이 영향이라는 것 역시 사실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육류 섭취가 많은 남미나 몽골 지역 등에서도 평균 키가 작은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애초에 인간의 신장은 육식 외에도 환경이나 민족간 혼혈[28]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작용하는 복합적인 사안이다. 상술했듯이 일본의 육식 금지령은 시대별로 그 영향이 오락가락하는 편이었기에 육식 금지령만으로 그런 차이가 나타나기는 어렵다. 근대에 일본인의 체격은 이전보다 많이 커지긴 했지만 고기 섭취 외에도 전반적인 영양 상태의 개선에 기인한 바가 많을 것이다.
사실 이 오해는 일본 메이지 정부가 의도적으로 조장했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 개화기 당시에는 서구의 문화는 뭐든지 긍정적으로 평가되었고, 메이지 정부는 서양인의 큰 체격이 육식에 있다고 해석하고[29] 육식 전파를 위해 이를 적극적으로 알렸다. 오늘날 "일본인은 오랜 기간 육식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체격이 작다"라는 오해가 널리 퍼진 것은 이 영향이 적지 않을 것이다.
- 스키야키가 원래 두부 · 곤약 · 버섯 등만 넣어 만든 채식 요리였다가 나중에 고기가 추가된 요리라는 이야기인데, 해유록 같은 기록에 나타나듯이 스키야키는 원래부터 어육은 들어갔다.
5. 그럼에도 이루어졌던 육식
육식 금지령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문화적 경향이며, 더욱이 다른 동아시아 국가에 비해서도 중앙집권적 국가 권력이 미비했던 일본에서는 금령 하나가 전 일본 국토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칠 수는 없었다. 육식 금지령은 일본의 육식 문화를 위축시켰을지언정, 이를 소멸시킬만큼 철저하지 않았으며 시대별로 그 영향이 제각각이었다. 금지령을 지속적으로 반포했던 것 역시 일본에 육식 문화가 유지되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이다. 가마쿠라 시대에 일부 신불교 교단들이 육식을 한 자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 일 또한, 육식 금지령이 내려졌음에도 수백 년 동안 이를 지키지 않고 육식을 하던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존재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지역적으로는 육식 금지령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류큐 왕국, 도호쿠, 홋카이도 일대의 아이누인들은 목축과 수렵으로 육류를 섭취했고, 조정이나 막부의 영이 제대로 미치질 못하는 산간 지역과 규슈의 일부 지역에서도 육식을 했다.
5.1. 각 집단의 입장
- 무사 계층
애초에 사냥과 밀접한 집단이고 야외 활동이 잦은 이들이어서 육식에 대한 거부감은 덜했다. 천황과 공가들을 밀어내고 권력을 차지한 무사들이 공가 문화와 불교 문화의 영향을 받아 조정의 육식 금지령을 계승하긴 했지만 금제가 강화된 일부 시기를 제외하면 공가나 불교에 비해서 그 정도가 약한 수준이었다. 그런 이유로 사냥 금지령이나 강력한 육식 금지령이 내려진 시기가 아닌 이상, 무사들의 식단에는 언제나 사슴고기와 멧돼지고기가 올라왔다. 혹여라도 공가와 불교계가 사냥에 대해 지적하는 경우에는 약으로 쓸 고기를 구하기 위한 ‘약렵(藥獵)’이나 ‘군사 훈련’이란 명분을 내세워 사냥에 나섰다.
특히나 한반도에서 전래된 매사냥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에미쓰를 위시한 다수의 무사들이 환장할 정도로 좋아한 야외 활동이어서 에도 막부는 오래도록 조선에서 매를 수입했고, 환경의 변화에 민감한 매들이 이송 과정에서 죽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매 관리사인 응장(鷹匠)을 파견할 정도였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무사와 영주들도 육식을 하거나, 사냥을 했다는 기록이 많다. 전국 시대, 오다 노부나가는 매사냥을 좋아했고 엔랴쿠지를 공격할 때도 "승려들이 매일 술과 고기를 먹으면서 비단옷을 입고 여자를 끼고 살 정도로 타락이 극에 달했다."는 명분을 내세워 치천의 군주마저 못 건드린 엔랴쿠지를 불살랐다. 승려로 출가한 다케다 신겐도 죽기 몇 년 전부터 약으로 매일 닭을 잡아서 삶아 먹었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기록도 있다.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이에야스는 어느 날부터 신겐의 전속 요리사가 닭을 잡지 않고 있다는 간자의 보고를 듣고 신겐이 죽었음을 눈치챘다고 한다. 매사냥을 좋아한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성곽이 아닌 야외에서 외박하는 일이 많자, 막부 중신들의 부탁을 받은 다테 마사무네가 과거에 매사냥을 하던 이에야스를 급습할 계획을 세웠던 일을 거론하며 이에미쓰를 성으로 돌려보냈다는 일화도 있으며 나카가와 히데마사처럼 전시에 매사냥을 하다 조선군의 급습을 당해 죽는 이도 있었다.
- 공가
앞서 언급했듯 일본의 육식 금기 문화를 선두한 집단이다. 그러나 이들도 겉으로는 고기를 멀리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육식을 했다. 이들은 고기를 하품이나 부정한 식자재로 간주하면서도 사람을 건강하게 만들어 주는 보양식으로 인식했다. 원래 소고기는 가장 강력한 규제가 걸린 육류였지만, 몸이 아플 때 먹는 보양식으로 먹는 고기 중에서 최상품으로 치는 것이 소고기였다. 그래서 공가들이 아프단 핑계로 소고기를 먹는 일이 많았다. 육포의 형태로 말린 것을 환약처럼 만들어서 조선의 비법이라면서 '조선우육환'(朝鮮牛肉丸)이라고 만들어 파는 일도 있었다.#
- 불교
마찬가지로 채식 문화를 주도했던 집단으로, 위 공가와는 달리 종교적 신념이 결합되었으므로 금기의 강도는 더 강했다.[30] 그러나 논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마쿠라 시대 이후로 육식 문제를 놓고 교단 간의 갈등이 벌어지기도 했다. 가마쿠라 막부 시기에 성장한 신불교(선종, 정토종, 법화종) 세력 중, 정토종과 일부 법화종 교단이 악인정기(惡人正機)를 강조하며 고기를 먹은 죄인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자, 구불교(화엄종, 천태종, 진언종) 교단들이 격렬하게 비판한 게 대표적인 사례이다.
6. 문헌에서의 묘사
11대 조선 통신사(1763년)의 일행 중 한 명이었던 원중거(元重擧, 1719∼1790)는 도쿠가와 츠나요시의 치세부터 육식 금지령이 강화된 에도 시대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여섯 가지 가축(소, 말, 양, 닭, 개, 돼지)을 먹지 않으며 집안에서도 키우는 마축이 드물다. 풍속에서 도살을 기피하는데 개나 말이 가장 심하다. 가축이 죽으면 모두 땅에 묻는다. 소가 만약 병들어 죽으면 태워서 기름을 취하여 등(燈)을 태우는 데 쓴다. 이런 일은 천한 자들로 하여금 맡아 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은 꺼려서 나가보지 않는다. 그리고 나서 즉시 그 나머지 살과 남은 뼈를 땅에 묻는다. 혹 병자의 약으로 쓸 경우에는, 소를 낭떠러지 위에 세워 놓고 밧줄로 끌어서 거꾸러뜨려 추락사하면 적당히 약용을 취하고 그친다. 나머지도 죽은 소의 예와 같다.
집돼지는 가정에서 키우는 것이 전혀 없다. 우리 사행을 위하여 멧돼지를 산 채로 잡아서 보내주었기에 잡게 하여 음식으로 하였다. 닭 또한 드물게 키우는데 그 키우는 자들은 단지 때를 알려주는 것만 취할 뿐이요 음식으로 먹기 위한 것은 아니다.
화국지(和國志, 1763?) - 음식(飮食) 편[31]
집돼지는 가정에서 키우는 것이 전혀 없다. 우리 사행을 위하여 멧돼지를 산 채로 잡아서 보내주었기에 잡게 하여 음식으로 하였다. 닭 또한 드물게 키우는데 그 키우는 자들은 단지 때를 알려주는 것만 취할 뿐이요 음식으로 먹기 위한 것은 아니다.
화국지(和國志, 1763?) - 음식(飮食) 편[31]
7. 비슷한 사례
- 고려는 불교의 영향으로 육식 문화와 도축 기술이 크게 쇠퇴했다. 고려도경에 따르면, 도축할 때는 동물을 두들겨 패거나 절벽에 떨어 뜨리거나 산 채로 불태우고 핏물도 제대로 안 뺀 것을 대충 구워서 내놓아 접대용으로 내놓은 고기에 악취가 심해 먹기가 곤란했다고 한다. 그런데 동 시기의 일본과 마찬가지로 육류를 아예 취식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고려도경에는 왕공 대신들의 식탁에는 고기가 오르고, 양고기와 돼지고기는 왕공 대신과 귀인이 아니면 먹지 못한다는 기록, 백성들은 어패류를 많이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고려사에는 권신 이자겸이 세도를 부릴 때, 뇌물로 받은 고기가 너무 많아 썩을 지경이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개고기와 관련된 유물, 고려 시대에 제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육포와 어포가 발견된 일도 있다.
이후 원 간섭기부터 몽골 문화의 영향을 받아 육식 문화가 다시 부흥했으며[32] 고려의 뒤를 이은 조선의 지배층들은 육식에 대한 거부감이 없고 불교 문화를 탄압했기 때문에 육식 문화는 계속 성장해 나갔다.[33]
-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절 조선 침공을 위해 전국에서 군사들을 징발해 시모노세키 군항으로 집결시켰는데, 당시 시모노세키는 복어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징병된 군인들은 당연히 전국 각지에서 모인 이들이었기에 바다를 접해보지 못한 이들이 많았고, 이때문에 제독 기술이 부족한 군인들이 복어의 독을 완벽히 제거하지 못하고(...) 요리해먹다가 조선 땅을 밟아보지도 못한 채 죽어나가자 복어금식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는 에도 막부에서도 유지됐다가 근대화 이후 이토 히로부미 초대 내각총리대신이 해제했다고 한다. 복어 관련 영상.
8. 매체에서의 묘사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의 일본은 육식금지령을 반영하여 게임 내에서도 동물의 도축과 사냥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일본은 일본만의 특수건물을 지으면 동물 가축이 그 주변에 모여들어서 모여들어 있는 동물의 수만큼 자원이 쌓이는 구조로 되어있다.
문제는 컴퓨터와 동맹을 할 경우 컴퓨터 동맹군의 주민들이 멋대로 우리 영토로 들어와 도축하고 채취해가는 일이 발생한다. 사람과 동맹해도 마찬가지 동맹이 멋대로 주민으로 도축해가면 막을 방법이 없다.
다만 자동으로 그냥 막 자원이 올라가는 구조 자체가 좀 일뽕이다 싶을 정도로 사기적인 면이 있다. 에이지 시리즈는 전통적으로 후반으로 갈수록 자원이 고갈되어 몰빵전을 할 수 밖에 없는데 일본처럼 자동으로 올라가는 치트키스러운 구조로는 쭉 농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밸런스적으로는 양해할 만한 페널티이다.
- 80일간의 세계일주에서 장 파스파르투가 일본을 구경할 때 육식금지령에 관련된 언급이 잠시 나온다.그는 일본의 푸줏간에는 양고기나 염소고기, 돼지고기가 전혀 없다는 걸 알고 놀랐다. 또 일본에서는 소를 오직 농사짓는 데만 쓰고, 소를 죽이는 것을 불경한 일로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쇠고기가 매우 귀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결론지었다. 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쇠고기는 없다 해도 멧돼지나 사슴, 꿩이나 자고새, 가금류 또는 일본인들이 쌀과 함께 거의 주식으로 삼다시피 하는 생선이라도 먹을 수 있었다면 만족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용기를 잃지 않고 불운을 견뎌야 했다. 양식을 구하는 일은 내일로 미루기로 했다.쥘 베른, '80일간의 세계일주' 중에서. 시공주니어 김주경 번역본(1872년)
위는 장 파스파르투가 돈도 없이 일본에 상륙해 식량을 찾아나서는 장면이다. 1872년에 나온 소설인데 메이지 유신 이후지만 아직 육식금지의 영향이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 근대 이후 일본의 고기 요리는 대부분 한식(야키니쿠, 호루몬 등), 중식(징기스칸 요리, 교자, 라멘 등), 양식(돈가스, 니쿠자가 등)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2] 대승 불교에서 육식을 금하게 된 것은 보통 양무제가 517년 내린 단주육문(斷酒肉文)으로부터인 것으로 본다.[3] 왼쪽 페이지, 오른쪽에서 2번째 줄부터이다.[4] 737년 덴표 대기근 시기에 내린 도살 금지령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5] 결국 이에츠나는 이복 동생인 츠나요시에게, 츠나요시는 조카인 이에노부에게 천하인의 자리를 물려줘야 했다.[6] 이 별명은 요시노부가 쇼군직에 오르기 전 히토쓰바시 가문에 있던 시절부터 하인들로부터 전해져 오는 별명이라고 한다.[7] 이 시기에는 근대화의 이념에 따라 과거의 전통은 대체로 '구습'이라고 멸시되었다. 일례로 음력이나 이에 기반하여 길흉을 따지는 육요 같은 개념은 딱히 사회에 큰 악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지만 후쿠자와 유키치는 『개력변』(改暦辧)이라는 책에서 매우 비효율적인 문화로 없애버려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런 사회문화도 그런데 실제로 영양학적 영향을 지니는 육식 기피에 대해서는 더욱 적극적으로 몰아내려고 하기 마련이었다.[8] 고기를 얇게 썰고 날계란물에 찍어 먹어 그나마 익숙한 비린맛인 계란 비린맛으로 육향을 가렸다.[9] 고기를 얇게 피고 튀김옷으로 완전히 덮어버려 육향을 가렸다.[10] 정확히는 당시 일본에는 고기를 먹기 위해 가축으로 개량된 돼지가 없었다. 그래서 보통 돼지를 가리키는 말이 일본에서는 멧돼지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대표적으로 12간지의 돼지가 일본에서는 멧돼지를 가리키는 식이다.[11] 여기서 양은 덴무천황의 치세에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12] 이는 소를 신성한 동물로 여기는 종교인 인도의 힌두교와도 비슷했다.[13] 사냥은 오랜 세월 동안 고위층의 권력 과시 수단이었고 특정 지역을 귀족들만의 사냥 공간으로 지정하고 사냥을 통제하는 문화는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유럽의 사냥터지기(gamekeeper)가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다. 다만 토끼나 족제비 같은 작은 동물들은 잡든 말든 상관을 하지 않는 게 보통이었다. 실제로 한국에선 좀 생소하지만 토끼고기는 전세계적으로 활발히 소비되는 육류이다.[14] 여담으로 이웃 한국에서 전근대에 사냥으로 주로 충당하던 고기는 꿩고기였다. 꿩 대신 닭이 이런 문화에서 나온 말이다.[15] 어쩌면 일본의 육식 기피가 오랜 세월 동안 유지된 데에는 활발한 어패류 소비의 영향도 있을 수 있다. 풍부한 어패류가 없었다면 상부에서 고기를 금하든 말든 영양학적으로 고기를 먹을 수밖에 없었겠지만 워낙에 생선이 풍부하니 '기왕에 위에서 먹지 말라는 고기보다는 생선이나 먹자'로 경향이 굳어졌을 수 있다.[16] 때문에 유럽에서 훈제 청어는 성직자가 많이 먹는 음식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다.[17] 이조차 먹지 못하게 하는 승려가 있다면, 그는 데바닷타 같은 근본주의 이단이다.[18] 오늘날 고래고기도 알아서 떠밀려온 것은 국제포경규체협약과 무관하게 가공과 판매가 가능한 것과 비슷하다면 비슷하다. 이 경우 종교적 요인이 아니라 환경적 요인에 따른 것이라는 차이는 있지만.[19] 이는 백제와도 유사한 편인데, 불교의 영향을 받은 백제 귀족들은 주로 채식을 하고 도리어 하층민들이 더 많은 육류를 섭취했다.[20] 원래 갱(羹)이라는 글자의 뜻 자체가 고깃국을 의미하는 것이다.[21] 당면이 전래된 이후. 한국에 당면이 들어온 건 일제강점기 때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이전의 정통 한국 잡채는 문자 그대로 채소와 나물을 섞어 만든 것이었고, 일제강점기 이후 양을 불리기 위해 당면을 섞은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 한복려 여사의 어머니 황혜성 여사의 스승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주방상궁으로서 조선궁중요리 초대 기능보유자(일명 인간문화재)였던 한희순 여사는 늘 당면잡채를 '가난뱅이 잡채'라고 깎아내리면서 제자 황혜성 여사에게도 '가난뱅이 잡채'는 절대 만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을 정도였다.[22] #[23] 위의 기록에서도 보이듯이 외국 사신에게는 고기 요리를 대접했는데, 고기 요리법이 발달하지 못했다보니 누린내와 같은 잡내를 전혀 잡지 않아 먹는 게 고역이었다고 한다.[24] 소고기, 돼지고기, 가금류, 양고기에 대해 통계가 작성되어있다.[25] 그런데 이는 상위권 국가가 고기를 너무 많이 먹어서(...) 평균이 좀 상향되는 왜곡이 있다. 37개국 중에서 평균 이상으로 먹는 국가가 미국, 호주, 아르헨티나, 이스라엘, 브라질, 칠레 6개국밖에 없다. 특히 미국은 83.01kg으로 OECD 평균보다 1.5배 더 높은 육류 소비량을 보이고 있다.[26] 이는 동 시기 중동에서 일어난 일과도 비슷한 현상인데, 이슬람 제국에서 도축업은 3D 업종이라 무슬림들은 이를 기피했고, 사회적으로 차별을 받던 기독교인들이 도축업에 진출하기 시작해 상당 기간 동안 기독교인들이 도축업계를 장악하기도 했다. (이슬람과 힌두의 교리를 혼동하여 무슬림이 도축한 고기만 할랄 취급한다는 오해가 있는데, 칼을 든 사람의 종교와는 상관 없이 이슬람 교리에 따른 방식으로 도축하면 할랄로 취급한다. 무슬림들과 이슬람 국가의 지배층들은 기독교인이 도축하고 조리한 고기 요리들을 아무 문제 없이 받아들였다.) 이슬람권에서 무슬림들이 적극적으로 도축업에 종사하고 오히려 기독교권에서 소수의 무슬림들이 도축업자가 되는 경우가 많아진 현대의 상황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27] 사실 육류 소비의 측면에서 보자면 한국 역시 근대화 과정에서 육류 소비가 크게 증가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나, 대체로 기존의 육류 음식들(설렁탕 등)의 소비 증가로 이어졌고 새로운 요리의 도입은 찾기 어렵다. 전근대에 비해 돼지고기 소비의 증가가 눈에 띄며 삼겹살 구이가 근대에 탄생한 것이라는 등의 설이 비슷한 맥락으로 이야기되곤 한다.[28] 현대 일본인들은 야요이인과 조몬인의 혼혈이 직계 조상이다.[29] 여담으로 비교적 최근인 20세기 후반까지도 이로 인해 서양인은 소화기관도 동양인에 비해 짧다는 이야기가 사실처럼 전파되곤 했다. 오늘날에는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30] 잘 알려져있듯이 비슷하게 북방 불교에 속하는 한국 불교에서도 육식을 금하고 있다.[31] 번역은 "와신상담의 마음으로 일본을 기록하다, 박재금 역, 소명출판, 2006"을 그대로 옮겼다. 번역서 기준 308쪽에 해당 내용이 실려 있다.[32] 순대, 선지 같은 내장과 피를 활용한 요리는 이 시기에 유입된 북방계 요리의 흔적이라는 설이 있다. 그래서 그런진 몰라도 일본은 육류는 몰라도 내장 요리는 확실히 한국보다는 적은 편이며, 순대는 한류가 꽤 퍼진 지금도 일본인들 사이에서 꺼려지는 한국 음식으로 꼽힌다.#[33] 단, 소는 농경에 중요한 가축이었기에 소에 대한 도축은 강력하게 제한했고, 허가 없이 소를 도축한 것을 적발당했다간 중벌을 면키 어려웠다. 다만, 성균관에 고기를 공급하는 반촌의 반인들처럼 소 도축을 허가받은 이들이 소고기를 유통한다거나, 병에 걸렸단 핑계를 대고 소를 도살하는 등 편법으로 소고기를 먹는 일이 성행했다. 그러다 조선 후기가 되면, 왕조 후기 특유의 체제 이완 현상이 일어나 규제가 완화되고 도시를 중심으로 소의 도축과 소고기 소비가 크게 늘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