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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1 19:48:52

송익필


山林三傑
산림삼걸
매월당 김시습
梅月堂 金時習
추강 남효온
秋江 南孝溫
구봉 송익필
龜峰 宋翼弼
송익필
宋翼弼
출생 1534년 2월 10일 (중종 29년)
조선 한성부
사망 1599년 8월 8일 (선조 32년) (향년 65세)[1]
충청도 당진현 북면 원당리
본관 여산 송씨
운장(雲長)
구봉(龜峯) 또는 구봉(龜峰), 현승(玄繩)
시호 문경(文敬)
가족 할머니 감정, 아버지 송사련, 어머니 연일 정씨(延日 鄭氏) 부인 창녕 성씨(昌寧 成氏)
큰형 인필(仁弼), 작은형 부필(富弼), 동생 운곡거사(雲谷居士) 송한필

1. 개요2. 생애3. 학문4. 교육관5. 미디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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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선조 때) 서얼 출신의 유학자.

이이, 성혼, 정철 등과 교류했고, 김장생, 정엽의 스승으로 이후 서인 더 나아가 노론의 학문적인 스승으로 불리는 등 당대 최고의 학자의 반열에 들었음에도 미천한 신분으로 죽을 때까지 인정받지 못한 비운의 인물이다.

2. 생애

송익필(宋翼弼)의 할머니 감정(甘丁)은 사예(司藝)안돈후(安敦厚)의 천첩 소생이고, 좌의정 안당(安塘)의 서출 누이였다. 감정이 직장(直長)송린(宋璘)과 결혼하여 송사련을 낳았다. 송사련은 안당의 아들 안처겸(安處謙)과 고종사촌 간이었으나, 서출 집안과 적장자 집안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1515년(중종10) 안당은 이조 판서가 되어 조광조(趙光祖) · 김식(金湜) 등의 사림파(士林派)를 천거하여, 훈구파(勳舊派)와 대립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서 조광조 등 사림파가 화를 당할 때, 좌의정 안당은 영의정 정광필(鄭光弼)과 함께 사림파를 구원하려다가 파면되었다. 1521년(중종16) 안당의 아들 안처겸이 훈구파 남곤(南袞) · 심정(沈貞) 등을 숙청하려고 모의하다가, 송사련의 고발에 의하여, 동생 안처함(安處諴)과 함께 처형되었다. 이 일로 아버지 안당도 사사(賜死)되는 등 안당 일가가 몰락하였는데, 이것이 <신사무옥(辛巳誣獄)>이다. 이 옥사는 남곤 등 훈구파가 송사련을 사주하여 꾸민 사건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송사련은 그 공으로 일등 공신이 되어 당상관(堂上官) 절충장군(折衝將軍) · 시위대장 등의 지위에 올랐다. 이리하여 그 아들 송익필과 송한필은 어려서부터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러나 1566년(명종 21) 무고 사실이 밝혀지고 천민인 할머니와 서얼 신분으로 인해 평생 관직에 나가지 못한 불운한 인물이다.

송익필은 재능이 비상하고 문장이 뛰어나 아우 송한필(宋翰弼)과 함께 일찍부터 문명을 떨쳤고, 명문 자제들과 폭넓게 교유하였다.초시(初試)를 한번 본 외에는 집안 가계 때문에 정거(停擧)를 당하고 나서 과거를 단념하고 오로지 성리학 연구에만 몰두하여 도학(道學)으로 명성이 높았다. 이이(李珥)·성혼(成渾)과 함께 성리학의 깊은 이치를 자주 토론하였었다.[2]
특히 예학(禮學)에 밝아 김장생(金長生)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3] 또 정치적으로도 뛰어나 서인 세력의 막후 실력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송익필의 방패막이 역할을 해주던 이이가 사망한지 2년 후, 1586년(선조 19) 동인들의 후원으로 안당 집안에서 송사를 제기, 안처겸의 역모가 조작임이 밝혀지고 송익필의 형제들을 포함한 감정의 후손들 70여 명이 안당 집안의 노비로 환속되어 추노꾼들에게 쫓기자 그들은 성명을 바꾸고 도피 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나 1589년 기축옥사로 정여립(鄭汝立)·이발(李潑) 등 동인들이 제거되자[4] 그의 형제들도 신분이 회복되었다.

기축옥사의 가장 큰 피해자이기도 한 동인의 영수 이발이 송익필 일가가 노비로 환천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시기적으로 송익필 일가들이 노비로 환천되고 얼마 후 기축옥사가 일어났고, 기축옥사 직후에 송익필 일가들이 신분이 회복됐으며, 기축옥사 위관이던 정철이 송익필과 절친했다는 점들 때문에 기축옥사의 막후 조종 인물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뒤에 또 노수신, 이산해 등 동인들을 비난한 조헌(趙憲)의 과격한 상소에 관련된 혐의로 이산해(李山海)의 미움을 받아[5] 송한필과 함께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되었다.

1593년 사면을 받아 풀려났으나, 일정한 거처없이 친구·문인들의 집을 전전했다. 1586년 안씨 집안의 송사 전까지는 파주 구봉산[6] 아래에서 크게 문호를 벌여놓고 후진들을 양성하였다.

1596년 충청도 당진군 마양촌이란 곳에 제자 김장생의 배려로 거처를 마련한다. 2년 후 부인 창녕 성씨가 세상을 떠났고 곧이어 평생지기 성혼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이가 죽었을 때 '율곡 제문'을 썼던 송익필은 성혼의 죽음 앞에 시를 남겼다. 그리고 1599년 생을 마감했다.

1762년(영조 38)에는 제자인 김장생의 6대손에 의해 그의 저서 '구봉집'이 발간됐다. 족보에서 누락되어 빠져있던 그의 이름도 사후 300년이 지난 1905년에 족보에 등재되었다. 1910년 7월 20일 대한제국이 망하기 한달 전 자헌대부(資憲大夫)와 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에 추증되고, 바로 순종의 명으로 문경(文敬)의 시호가 내려졌다.

3. 학문

송익필은 시와 문장에 모두 뛰어나 이산해(李山海)·최경창(崔慶昌, 1539 ~ 1583)·백광훈(白光勳, 1537 ~ 1582)·최립(崔岦, 1539 ~ 1612)·이순인(李純仁, 1533 ~ 1592)·윤탁연(尹卓然, 1538 ~ 1594)·하응림(河應臨, 1536 ~ 1567) 등과 함께 선조 대의 팔문장가(八文章家)로 불렸다.

저서로는 구봉집[7]이 있다.

송익필은 스승이 없이 독학으로 공부하였으나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이에 통달하였는데 율곡이 그를 평하기를 "성리학을 논할 만한 자는 오직 송익필 형제 뿐"이라고 할 정도였다. 또한 신흠은 말하기를, “천품(天稟)[8]이 매우 높고 문장(文章) 신묘하였다.”라고 평하였으며 조헌은 말하기를, “늙도록 글 읽기를 쉬지 않아, 학문이 깊고 경(經)에 밝았으며, 행실이 방정하고 말이 정직하여 아버지의 허물을 덮기에 충분하였다." 라고 평했다.
'송익필은 비록 송사련의 아들이나, 노년에도 독서에 힘써 학문이 깊고 경서에 밝았으며 언행이 바르고 곧아 아비의 허물을 덮기에 충분하였다. 이리하여 이이, 성혼도 모두 존경하는 친구로 여겨... (이하 생략)... 이이가 서얼의 임용을 허가하자고 주장한 의도는 다만 훌륭한 인물을 구하여 임금을 보필하자는 것일 뿐, 일개 송익필에게 사심을 둔 것은 아니었는데도 사람들은 대부분 이이의 과실로 돌린다.'
-《조선왕조실록》 선조19년

이러한 평도 있는것을 보면 송익필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다.

4. 교육관

송익필은 교육자로서도 뛰어났었는데 그 문하에는 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정엽(鄭曄)·서성(徐渻)·정홍명(鄭弘溟)[9]·강찬(姜澯)·김반(金槃)·허우(許雨)·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윤선거(尹宣擧)·윤증(尹拯) 등이 배출되었다.

그는 유생들과 문인들에게 처음부터 정답을 가르쳐주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고 깨달을 것을 강조하였다. 송익필은 그에게 배우고자 찾아온 유생들에게 자상하게 설명해 주는 법이 없었다. 스스로 정신을 집중하여 다시 읽고 생각해 볼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이다. 지식을 습득하는데 있어 사색을 중요시 하되 연구자 스스로 노력하는 것을 강조한 때문이다. 송익필은 선생에게만 의지하는 주입식 교육이 자칫 학생들의 창의성을 저해할 수 있는 폐단을 생각했던 것이다. 사물을 연구할 때도 무엇이 옳고 잘못되었나, 왜 옳고 옳지 않은가를 스스로 생각하게 했다. 공자와 맹자, 사서육경, 주자, 태극설 등을 강의함에 있어서도 무조건 수용하여 옳다고 하기 전에 왜 옳은가를 유생, 문인들 스스로 생각하게 했다.

5. 미디어에서

드라마 징비록에서 등장한다. 배우는 박지일. 기축옥사의 설계자로 묘사되며 역사적 사실처럼 동인들에게 쫒기는 신세다. 정철과 성혼에게 많은 도움을 받는 것으로 나온다.
[1] 세는 나이로 66세.[2] 이 세명의 교류는 세 사람은 20대 중반이었던 1560년부터 서신 왕래를 시작하여 1593년까지 33년동안 교류하였다. 이들의 편지를 송익필의 아들 송취대가 엮어 삼현수간이라는 책으로 냈다. 자세한 내용은 삼현수간 문서 참고.[3] 다만 출생 신분 때문에 서인의 공식적인 학통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니, 우암 송시열은 비문이 없던 송익필의 묘비에 글을 써주며 송익필은 김장생이 첫걸음을 내딛게 이끌어 줬다고만 언급하고, 김장생의 스승은 이이라고 못 박았다. 만약 송익필 출생 신분에 문제가 없었다면 서인의 종주는 이이가 아닌 송익필이 됐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4] 자세한 내용은 정여립의 난 참고.[5] 안씨 집안의 노비로 환속되었던 시기에 송익필은 동인인 이산해로부터 이이를 비난해 보라는 권유를 받자 이를 완강히 거절하고, 오히려 그가 시세에 결탁하며 음모를 꾸민다며 그를 풍자하는 시를 지어줌으로써 이산해의 분노를 사게 된다. 다만 처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은 아니며 오히려 송익필과 이산해는 친한 편이었다. 이산해는 송익필이 금고(禁錮)를 당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안씨 집안의 자손들이 환천된 송익필을 죽이려고 하자 정철 김은휘등과 함께 송익필을 숨겨주기도 하였다.[6] 송익필의 호 '구봉'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구봉산의 현재 이름은 심학산으로 산 아래에 파주출판도시가 있다.[7] 여산송씨대종회등의 후원하에 2023년 국역구봉집이 3권 형식으로 출간되었다.[8] 타고난 기질[9] 정철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