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曄
1563년 - 1625년[1]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유학자로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시회(時晦), 호는 수몽(守夢),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선조, 광해군, 인조 시기에 도승지, 대사성, 대사간, 우참찬을 역임한 문신이자, 이이의 대표적인 제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2]문집인 '수몽집(守夢集)'과 성리학에 입문하는 초심자를 위해 '근사록(近思錄)'[3]을 쉽게 설명해주는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를 남겼다.[4]
2. 생애
1563년(명종 18년)에 진사 정유성(鄭惟誠)과 파평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4세에 친구들과 놀다가 마침 이웃집에 왔던 율곡이 남다른 모습의 정엽을 보고 이름을 묻고 시도 지어보게 했다고 한다. 16세에 이산보(李山甫, 1539 - 1594)[5]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산보의 스승은 작은 아버지인 토정 이지함이었는데 조카의 사위인 정엽을 이지함이 높이 평가하며 송익필[6] 에게 소개하였고 이어서 이이와 성혼 문하에도 드나들게 된다.19세(1581년)에 도봉서원(道峯書院)에서 공부하며 한 살 아래인 이정구와 친구가 된다. 21세(1583년)에 문과에 급제하며 출사하였으나 부친이 사망하여 3년상을 치른다. 22세(1584년)에 스승 이이가 사망한다. 25세(1587년)에 형조좌랑이 되었다가 모친을 모시기 위해 김포 현감(金浦縣監)으로 외직에 나갔다가 다시 사직한다. 29세(1591년)에 조모상을 당해 다시 3년상을 치르던 중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32세(1594년)에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에 제수되었다가 사직하고, 35세(1596년)에 예조정랑이 되어 명에 원병을 요청하고 돌아와 수원 부사(水原府使)가 되었다. 36세(1598년)에 응교, 집의, 동부승지, 우부승지를 거쳐 형조참의가 되었다가 동지사(冬至使)로 중국에 다녀와 대사간, 예조참의를 역임한다. 당시 기자헌이 이조좌랑 자리에 추천 받았으나 정엽은 평소 그의 사람됨을 좋게 보지 않아 반대하였다. 기자헌은 그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하며 수차례 집에 찾아왔으나 한 번도 만나주지 않아 결국 그의 원한을 샀다. 40세(1602년, 선조 35년)에 북인이 성혼을 공척하며 그의 문인들을 축출하였고 정엽도 함경도의 종성 부사(鍾城府使)로 좌천된다. 이듬해에 종성에 노적(虜賊)[7]이 쳐들어와 잘 방어하고 백성 1명이 잡혀간 것이 유일한 피해였는데, 기자헌이 백성이 포로로 잡혀갔다는 사실을 가지고 참소하자 정엽은 옥에 수감된 후 44세(1605년)까지 동래(東萊)[8]에 안치된다.
44세(1606년, 선조 39년)에 성주(星州), 홍주(洪州)의 목사(牧使)가 되었고, 47세(1609년, 광해군 2년)에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 유생들을 가르치는데 진력한다. 50세(1611년)에는 도승지가 되었고 당시 광해군이 경연에 나오지 않자 간언하여 광해군이 따랐으나 주변의 참소로 호조참의로 강등되었다가 51세(1613년, 광해군 5년)에 다시 도승지가 되었다. 기자헌이 있는 대북이 일으킨 계축옥사가 발발하여 서인과 남인이 쓸려나갔고, 정엽은 사실 관계를 밝히기 위해 소장을 작성하였으나 아들을 걱정한 모친이 울고불고하며 소장을 불사르자 포기하고 사직하였다.
52세(1614년)에 공조참판, 53세(1615년)에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가 되어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한다. 당시 이정구와 함께 인목왕후가 유폐된 경운궁(慶運宮)이 관리되지 않은 것을 보고 눈물 흘린 것이 이이첨의 귀에 들어가 분노를 샀는데 다행히 주변의 만류로 무사했다. 이후 벼슬에 뜻을 잃고 산직(散職)에 머무른다. 광해군이 '정모(鄭某)는 일절 출사(出仕)하지 않으니, 그 뜻을 알 수 없구나.'하는 교지를 내렸으나 상소를 올려 ‘일찍이 근시(近侍)의 자리에 있던 신하로서 정성을 쌓고 뜻을 다하여 성상을 감오(感悟)시키지 못하였고, 지금 모친은 늙고 형제가 없어 모친의 곁을 떠날 수 없다.’고 대죄하며 출사하지 않았다.
61세(1623년)에 인조반정이 일어나 다시 불려나왔다. 반정이 일어나기 전에 정엽도 거사 준비 소식을 들었으나 '강상(綱常)이 이미 끊어졌으니 이러한 때에는 종사(宗社)가 중하다. 그렇지만 만일 일이 잘못되어 사류(士類)가 섬멸되면 일은 이루지 못하고 나라는 따라서 망할 것이다. 나같이 오활한 선비는 천지(天地)의 큰 분수를 지킬 뿐이다.'고 하여 지켜보았는데, 이 말이 점점 퍼져나가며 와전되자 사직하여 향리로 돌아간다. 그러다가 인조가 사풍(士風)을 바로잡기 위해 명망있는 선비를 구하고자 묘당에 자문하여 정엽이 천거받아 다시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으며 동지경연(同知經筵) 원자사부(元子師傅)를 겸임했다. 정엽은 국가의 폐단을 인조에게 여러 차례 지적하였다.[9]만언소 참조 이후 이조참판 물망에 올랐으나 정엽이 아니면 유생 교육이 안된다는 인조의 반대가 있었다. 그러다가 인조가 '옛날에 실직을 가지고 대사성을 겸임한 사람이 있었던가? 정모를 어찌 한 직임에 국한시킬 수 있겠는가.' 하며 대사간 등 다른 직임으로 옮겨 일하면서도 특명으로 대사성을 겸임토록 했고 대사성이 다른 직임을 겸하는 것이 정엽으로부터 시작되었다. 62세(1624년, 인조 2년)에 이괄의 난이 발발하였다. 이괄이 진군하며 송도가 함락되었을 때 공주로 파천하자는 주장을 하여 인조가 따랐다. 이괄의 난 이후 인성군의 처분 문제가 불거지며 이귀와 정경세가 대립하자, 동문인 이귀에게 성질 좀 가라앉히라며 좋은 말로 편지를 보냈다.링크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을 겸임하고 있을 때 대소를 막론하고 모든 일을 법대로 처리하니 사람들이 청탁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 때 공조참판 김경징이 군관을 장살하는 일이 발발하였다. 1등 공신 김류의 아들인 김경징의 문제이기에 인조는 적당히 넘어가려 했는데 사헌부에서 죄를 주라고 청했다.링크 이 일로 정엽은 김류의 원한을 샀고 그 원한은 사위이자 제자인 나만갑이 고스란히 받게 된다. 또한 경상감사 민성징(閔聖徵)이 사람을 마음대로 죽이자 탄핵하였고, 궁노(宮奴)가 행패를 부리자 감옥에 가두어 형신(刑訊)하자 인조가 자전(慈殿)에 관계되는 일이라 하여 대사헌에서 체직시키라고 명해 대사헌에서 물러나 우참찬(右參贊)이 되었다.
63세(1625년, 인조 3년)에 소현세자가 관례를 올리고 책봉될 때 원자사부(元子師傅)라 하여 숭정대부(崇政大夫) 겸 우빈객(兼右賓客)으로 승진한다. 여러 관직을 겸임하며 과로가 쌓인 그는 입궐하던 중 갑자기 중풍에 걸려 몸이 안좋아졌다. 운명을 예감하고 인조에게 올릴 소차를 작성하고[10]링크 운명하였다. 인조는 부음을 듣고 애석해하며 조회를 중지하고 예장과 부의를 내렸다. 그리고 소식을 들은 당일에 바로 사망한 그에게 실직(實職)을 제수하라고 명하였으나 이조에서 죽은 사람에게 실직을 제수하는 것은 광해군 때의 잘못된 전례라며 반대하여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숙(文肅)이라는 시호를 받았다.링크 실록의 졸기는 다음과 같다.링크
나만갑이 그의 글을 수집하였고, 1661년에 나만갑의 아들인 외손자 나성두가 해주목사를 역임할 때 문집인 '수몽집(守夢集)'을 간행하였다. 나만갑이 그의 행장을 작성하였으며, 이정구가 신도비명을 작성하고 신흠의 아들이자 선조의 사위, 정숙옹주[11]의 남편인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이 글씨를 썼다.링크 경기도 양주시에 그의 무덤이 있다.링크
'수몽집'은 한국고전번역원에 의해 우리말로 모두 번역되어 있다.링크
3. 유학자로서
김장생과 함께 율곡의 대표적인 제자로 충실히 스승의 사상을 계승하였다. 김장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제가 선친께 가르침을 받았는데, '너는 율곡을 스승으로 삼고 김 아무개(=김장생)를 벗으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감히 당신과 더불어 종유하게 된 것입니다.'라고 하였고 그와 활발한 학문 교류를 하며 계승, 발전시켰다. 김장생은 '근사록'을 공부하며 선배 유학자들의 학설을 인용하거나 자신의 견해를 붙여 정엽에게 간정(刊正)을 요청하였고, 정엽은 그 작업을 이어받아 '근사록석의 (近思錄釋疑)'를 완성하였다. 정엽 사후 나만갑이 책을 베껴 세상에 전했고, 송시열이 훗날 본문과 주석을 구분하고 내용을 고증하여 1661년에 간행한 것이 현재 판본이 전하고 있다. 한백겸, 신응구와 서신으로 학문을 논하였으며 '사단칠정논쟁'에서도 '이치만을 생각해보면 고봉의 의견이 명백, 명쾌하다'며 율곡의 입장을 재확인한다.노수신(盧守愼, 1515 - 1590)이 명의 학자 나흠순(羅欽順, 1465 - 1547)의 인심도심론을 상당히 수용하여 '인심도심변(人心道心辨)'을 썼는데 당시 주자학이 지배하던 조선 사상계에 파란을 일으켰다. 정엽은 그의 의견에 대해 굳이 변론을 하지도 않겠다고 폄하하기까지 했는데 노수신이 양명학에 물들어 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선조에게 경안령(慶安令) 이요(李瑤)가 심학(양명학)을 칭찬하자 '攻柳瑤箚'라는 글을 지어 강하게 비판한다.[12] 양명학을 거의 이단 취급한 셈.
4. 광해군과의 관계
정엽은 자신이 도승지로 가까이에서 모셨던 광해군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미안함을 크게 느꼈던 것으로 추정된다. 폐위된 임금임에도 연민을 보이는 모습이 여러차례 보인다.광해군이 강화도로 옮겨갈 것이라는 말을 듣고 '폐주(廢主)가 스스로 잘못하여 하늘로부터 버림을 받았으나 신하들은 일찍이 북면(北面)하고 섬겼던 임금이니, 마땅히 곡(哭)하며 전송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는데 주위에서 놀라 답하지 않았고 홀로 실행하려 했으나 이미 나갔다고 듣자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광해군이 병을 앓는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신이 광해를 섬긴 지 10여 년이니, 미천한 신의 마음인들 어찌 옛정이 없겠습니까'하며 인조 앞에서 눈물을 흘리자 인조가 의복(衣服)과 물품을 광해군의 처소에 보내도록 명하기도 했다.
[1] 아래 내용은 유지웅, '수몽 정엽의 생애와 성리학' 논문과 웹 정보를 기반으로 작성되었다.[2] 김장생, 조헌, 이귀가 널리 알려져 있다.[3] 중국의 주자와 여조겸(呂祖謙)이 주돈이(周敦頤)·장재(張載)·정호(程顥)·정이(程頤) 등의 저서와 어록 가운데서 중요한 것을 뽑아 엮은 것으로 성리학의 입문서라 할 수 있다.[4] 당시 유자들이 누구나 가지고 있었다고 할 만큼 수준 높은 책이다. 요즘으로 치면 필독 참고서가 되겠다.[5] 이색의 후손, 이산해의 사촌으로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임진왜란 시기 진군하지 않는 명의 이여송을 설득하여 조선으로 들어오도록 하는 공을 세웠다. 당시 세자이던 광해군을 호종하다가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6] 훗날 송익필이 천민이 되어 신원되지 못하고 사망하자 신원을 위해 동문인 김장생 등과 노력하여 복권시킨다.링크[7] 오랑캐[8] 부산[9] 私에 얽매이지 말고 公에 따라 모든 國事를 처리할 것, 經書의 訓句에만 얽매이는 과거제도의 폐단을 고칠 것, 학교 교육을 재정비 하여 인재를 양성 할 것, 國事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 백성을 안정시키고 군사를 재정비하며 군량을 비축할 것[10] 사망 후 손자 정원(鄭援)이 인조에게 바쳤다.[11] 인조의 고모이다.[12] '미쳐서 정신을 못 차리는 일개 사람'이라고 까지 이요를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