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4-05 15:07:12

오성과 한음

1. 개요2. 에피소드3. 만화4. 애니메이션5. 오성X한음6. 비디오 게임7. 개그 콘서트의 코너

1. 개요

조선 중기의 정승[1]이자 한국의 대표적인 친구 사이로 유명한 이항복이덕형을 이르는 말. 오성(鰲城)은 이항복의 봉호인 오성부원군[2]에서 따왔고, 한음(漢陰)은 이덕형의 다.[3]

조선 최고의 개그 콤비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두 사람이 얽힌 코믹한 에피소드가 민담, 전래동화, 어린이용 문고 등으로 워낙 많이 다뤄지면서 흔히 두 사람이 불알친구 수준의 어린이일 때부터 알고 지낸 소꿉친구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두 사람이 진짜로 처음 만났던 때는 선조 11년(1578년)으로 두 사람이 과거 시험을 봤을 때였다. 이때가 세는나이 기준으로 이항복은 23세, 이덕형은 18세.[4] 또한 이항복은 <백사집>에서 본인이 "내가 어렸을 때는 마치 짐승과 같아서 아무도 나를 바로잡아 주지 못했다"라고 밝혔을 정도로 어릴적 스테레오타입 그대로의 말썽꾸러기가 맞았던 반면, 이덕형은 어린 시절 이야기는 크게 두드러지는 면이 없는 편이다.
만력 6년(1578년), 이때 비로소 백사 이상국 항복과 교분을 맺었다.
<한음문고>
신의 선조와 오성은 과거장에서 서로 사귀게 되었는데, 한 번 보고 매우 친밀해졌습니다. 이는 사적에 실려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서로 사귀었다고 하는 것은 민간에서 속되게 전하는 바입니다. 나이는 오성이 신의 선조보다 다섯 살 많습니다.
이덕형의 후손인 참찬관 이병교(李炳敎)의 말. <승정원일기> 고종 10년(1873년) 9월 14일

이덕형의 문집인 한음문고와 그의 후손 이병교가 밝혔듯이 둘은 과거장에서 처음 만났고, 이항복이 이덕형보다 5살이나 더 많다.[5][6] 이병교가 이렇게 밝히기 전에 고종은 이병교에게 "오성과 한음이 소꿉친구라는 게 정말인가? 그 사람들 장난친 일이 아직도 전설로 전해지니 매우 멋진 일인듯. 나이는 누가 많고 적은지 모르겠네?"라고 물었다고 한다. 고종은 태어나서 12세에 즉위할 때까지 궐 밖에서 살았던 인물이었던만큼 거리의 이야기꾼이나 여러 야담집을 통해 오성과 한음 이야기를 접해 알고 있었으며, 오성과 한음이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다는 이야기는 이때에도 민간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는 조선 후기 백성들 중에서는 이항복의 본명이 '오성'인줄 알고 성을 오씨로 알았던 사람도 있었다고 전한다.

역사상의 이항복, 이덕형의 본모습보다 민담 속에서 그려진 이야기가 더 유명해진 케이스[7]지만 이 두 사람이 평생에 걸친 각별한 우정을 나눈 남다른 관계였던 것 자체는 분명한 사실이다.

특히 이덕형의 문집인 한음문고를 보면 이덕형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가 총 110여 통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 이항복에게 보낸 편지만 무려 77통에 이른다. 특히 이덕형은 이항복을 형(兄)이라는 매우 격식 없는 호칭으로 부르고 있으며 "형도 내 마음 몰라요"라고 징징대는 편지도 남아 있다.[8] 그런데 정작 이항복의 문집인 백사집에는 이덕형을 위해 지어준 시가 몇 수 남아 있지만, 이덕형에게 보낸 편지는 한 통도 실려 있지 않다. 아놔 항복이형 카톡 보냈는데 확인 안 했어요?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읽씹의 역사

하지만 이것만 보고 이항복이 이덕형을 특별히 생각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는 게 이덕형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이항복이 묘지명을 쓸 때 "내가 명보(이덕형의 )를 그르쳤구나. 한스럽다."는 식으로 애통해 하고 있으며 이덕형이 세상을 떠났을 때 지은 시에서도 "목소리 죽여 남몰래 한원군(이덕형)을 곡하노라."는 구절이 남아 있다. 이항복이 꽤 인간 관계가 폭넓었던 것에 비해 이덕형은 인간 관계가 협소한 편이었지만 벼슬도 짝을 이뤄 한 경우도 있었고 실록에서도 이항복과 이덕형이 서로를 배려하는 기록도 남아 있던 만큼 두 사람이 매우 특별한 우정을 나눴던 것 자체는 분명하다.

이항복과 이덕형은 5살 차이였는데 공교롭게도 죽을 때에도 5년 차이가 났다. 이덕형은 1613년 사망, 이항복은 1618년 사망.

오성과 한음 말고 조선조 말썽으로 유명했던 실존 인물로 영조 대의 영중추부사 이천보의 양자인 속칭 '말썽 괴수' 이문원이 있다. 이문원의 야사 또한 이 오성과 한음 이야기와 겹치는 부분이 적지 않다.

야사에선 이문원이 일자무식이라고 나오지만, 실제로는 진사시는 합격했고 영조에게 과거 시험장에서 3글자만 써서 그 당돌함 때문에 아버지 음덕으로 문과에 합격한 인물이다. 그렇지만 기본적인 학문만 알았지 벼슬할 정도의 깊은 학식이 있는 건 아니었다. 맹꽁이 서당에선 이문원 친아버지가 이천보를 대감 아우라 하지만 정 반대로 이천보와 이문원은 나이 차가 42세로 조선시대로 치면 조부와 손자의 나이 차로 이천보가 이문원 친아버지의 친척 형 또는 친척 아저씨뻘이 된다.

포천시는 그들과 유서가 깊은 지역이기 때문에 마스코트 역시 오성과 한음이다.

2. 에피소드

동화에 나온 야사들도 섞여있다.

1. 서당에서 공부할 때 수업 도중 훈장님이 졸고 있었는데 오성이 몰래 껍질을 안 깐 생밤을 화로에 넣어 폭발시켜 훈장님과 학생들을 놀라게 했다. 어린이용 문고판에서는 보통 이 때 한음과 처음 만난 것으로 나온다.

2. 오성이 감을 따먹으려고 하인을 불렀는데 그 감나무의 가지가 옆집 권율 대감 집으로 넘어가서 딸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오성이 권율의 집에 가서 권율의 방 창호지를 손으로 뚫어 손을 넣고 권율에게 "대감, 이 손이 누구 손입니까?"라고 물었다. 권율은 황당해하며 "그게 네 손이지 누구 손이냐."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오성은 "그럼 저희 집 감나무에서 대감댁으로 넘어간 가지에 달린 감은 누구 감입니까?"라고 되묻자 권율이 웃으면서 "너희 집 감이 맞으니 우리 하인들에겐 잘 일러두겠다"고 하였다.

3. 오성이 어린시절 대장간에 자주 놀러 갔는데 집에 가면서 몰래 못(이야기에 따라서는 편자)을 한두개씩 슬쩍해갔다. 당시에는 개구멍바지라고 엉덩이가 뚫려있는 바지가 있었는데, 이걸 이용해서 개구멍바지를 입고 방문 후 훔치고 싶은 물건 위로 앉고서 슬쩍한 것. 이를 눈치챈 대장장이가 오성을 혼내주기 위해 불에 달군 못을 맨 위에 올려놓았는데 이를 몰랐던 오성이 못을 깔고 앉았다가 엉덩이에 화상을 입었다. 전승에 따라 여기서 끝나지 않고, 나중에 대장간이 노름빚으로 망하게 되자, 오성이 그동안 훔쳤던 못들을 단지에 넣어 전부 돌려주며 다시 재기하게 도와주는 것으로 끝난다.

4. 오성이 한음에게 "내가 네 부인과 정을 통하였다"고 말하자, 이 말을 들은 한음 부인은 오성을 초청해서 떡에 똥을 넣어 오성에게 먹였다. 오성은 뭣도 모르고 똥이 든 떡을 먹었다가 호되게 당했다. 한음 부인은 거짓말을 하는 입에는 똥이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5. 오성은 신붓감을 선보려고 인절미를 해서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고 몽둥이로 자기를 쫓으며 때리라고 시킨 뒤 도망치는 체하며 신부의 치마폭 속으로 들어갔다. 신부는 이에 당황하지 않고 “선을 보려면 겉선이나 보시지 속선까지 보십니까.”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6. 한음으로부터 한밤중에 전염병으로 일가족이 몰살한 집에 시체 감장[9]을 부탁받은 오성이 혼자 그 집에 이르러 시체를 감장하다가 갑자기 한 시체가 벌떡 일어나며 볼을 쥐어박는 바람에 혼비백산하였는데, 알고 보니 시체인 척 누워 있었던 한음의 장난이었다는 것이다.

7. 오성의 아버지는 오성의 담력을 시험하려고 한밤중에 외딴 숲 속의 고목나무 구멍에 무엇이 있는가를 알아 오라고 시키고, 먼저 가서 나무 구멍 속에 숨어 있다가 오성이 구멍 속으로 손을 넣을 때 안에서 그의 손을 잡았는데, 오성은 놀라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체온이 느껴지자 귀신이 아니고 사람의 장난임을 알았다는 것이다.

8. 오성과 한음이 참새를 잡아 키우고 있었는데 어느날 참새가 죽어버렸다. 이에 슬퍼한 오성과 한음은 새를 묻어주고 축문을 써주며 곡을 했는데 이를 본 오성의 아버지가 "공부는 안하고 장례식 놀이나 하냐"며 다그쳤다. 이에 오성은 "우리 때문에 참새가 죽었는데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라며 참새의 명복을 비는 축문을 아버지에게 보여주었다. 축문의 내용을 읽은 아버지가 그 문장 솜씨에 감탄하여 "한 번만 용서해줄 터이니 앞으로는 생명을 함부로 해치지 마라"고 주의를 주었다.

3. 만화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신판 오성과 한음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4. 애니메이션

비디오용 애니메이션으로 사자성어 한자 공부용이다.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다양한 사자성어를 알수있다. 투니버스 개국 초기인 1996년에 방영되기도 했다.

5. 오성X한음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오성X한음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6. 비디오 게임

1993년 에이플러스(A+)[10]라는 교육 출판사 업체에서 만들고 금성 소프트(현재 LG그룹)에서 배급한 어드벤처 게임. 오성과 한음을 조종하여 여러가지 임무를 맡는 게임. 방식은 물론 캐릭터 등의 그래픽 스타일마저 미국 어드벤처 게임 고블린의 영향이 상당히 짙게 드러난다. 이젠 레어가 된 정품 구성. 풀 플레이

Windows 환경에서는 도스박스로 실행해야 한다.

7. 개그 콘서트의 코너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오성과 한음(개그콘서트)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1] 둘 다 최고위직인 영의정을 지냈는데, 이항복은 89대, 91대 영의정을 지냈고 이덕형은 90대 영의정을 지냈다.[2] 오성은 이항복의 본관인 경주를 의미한다. 이항복의 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 이항복의 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백사(白沙)다. 젊은 시절에는 필운(弼雲)이라는 호를 쓰기도 했으며, 조선시대 문인들이 다 그렇듯 이항복은 그 외에도 호가 많았다.[3] 한음은 '한강(漢)의 남쪽(陰)'이란 뜻으로 이덕형의 본관인 광주를 의미한다.[4] 조선시대에 과거를 응시할 수 있는 최소 연령이 18세였다. 둘은 과거 시험장에서 처음 만났기 때문에 둘 중 어린 쪽인 이덕형이 당시 기준 18세가 되기 전에는 만날 일이 없었던 것. 둘 다 생일이 불명이라 만 나이를 측정할 수 없으므로 연 나이로 따지면 각각 22세와 17세. 초등학교 1학년과 6학년, 고1과 예비역 혹은 군대말년 정도의 나이 차이니 적지는 않다.[5] 조선시대에는 15살 이상 나이 차이가 나지 않으면 굳이 서열을 나누고 하지 않았다. 류성룡이순신의 경우도 류성룡이 나이가 3살 더 많았고, 끝내 서로 앙숙이 되었지만 한때는 서로 친밀한 관계였던 송시열윤휴도 송시열이 10살 연상이었지만, 송시열은 윤휴를 벗으로 대우했다. 해동역사를 저술한 한치윤(韓致奫)과 그 서문을 써준 유득공 역시 15세 이상 차이가 났지만 친구 관계였다. 정몽주정도전도 정몽주가 5살이 더 많다. 사실 나이 한두 살 차이로 서열을 매기는 건 실제 조선시대 풍토와는 거리가 있다. 농촌 사회 특성상 한 마을에 동갑내기가 얼마 되지도 않았기에 보통은 나이대가 크게 차이나지 않는 또래들과 막역하게 지내는게 일반적이었다.[6] 오늘날에도 중년이나 노년층에서 나이 차이가 몇 년 나도 친구로 지내는 경우를 의외로 적잖이 볼 수 있는데, 이 경우는 이 세대가 출생했던 무렵은 전쟁이나 행정 체계의 미비, 영양 상태 등 여러 이유가 작용해 출생신고가 제때 안 된 경우가 많아서 나이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지내는 것에 가깝다. 베이비붐 세대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은 나이를 말할 때 실제 나이랑 주민등록증 나이를 구별해서 말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1, 2살 꼬치꼬치 따지는 건 기성세대보다도 청장년층에서 더 심해진 측면도 있다.[7] 비슷한 케이스를 들자면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가 있다.[8] 현대 한국에서는 난생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상황에 따라 형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지만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같은 동네의 지인이라 할지라도 서로 존대를 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보통 성씨관직을 붙여 부르는게 일반적이었다(ex 김 대감, 이 부사, 박 생원). 따라서 형이라는 호칭을 썼다는 건 매우매우 가까운 사이였다는 뜻이다.[9] 勘葬 장례를 주도하여 마침[10] 중앙교육진흥연구소의 학습지 레이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