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F0C420><colcolor=#ffffff> 이여백 李如柏 | |
출생 | 1553년 |
대명 산동성 요동도사 철령위 (現 랴오닝성 톄링시) | |
사망 | 1620년 (향년 67세) |
대명 북경 순천부 (現 베이징시) | |
본관 | 철령 이씨 |
가족 | 부 - 이성량 형 - 이여송 동생 - 이여매 아들 - 이영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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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나라의 무관.2. 생애
철령위에서 이성량의 아들로 태어났다. 음서를 통해 관직에 나갔고 아버지 밑에서 종군하며 공을 세웠다. 하지만 포성이 궁궐까지 들리는 사건으로 파직되었고 다시 음서를 통해 지휘첨사가 되었다. 1588년 탄핵되었으나 복직 후 선부참장을 지내다가 병으로 사임했다.임진왜란 당시 형인 이여송을 따라 도독참사로 조선으로 내려왔다. 평양성 전투 당시 서문을 담당해 함락시키고 벽제관 전투에도 참가했다. 이여송이 평양으로 퇴각하자 보산에서 지원했다.
귀국 후 도독승지, 오군영부장, 총병관, 우도독을 역임했다. 1596년 오르도스 인근의 몽골족이 침범하자 270명을 죽이고 격퇴했다. 이후 병으로 고향에 갔으며 20년간 칩거하다가 다시 우도독이 되어 철령위의 오랑캐를 격퇴했다.
사르후 전투 당시 남로군 사령관으로 22,000명으로 요양을 출발해 호란로에 당도했다. 그 과정에서 두송의 서로군, 마림의 북로군이 전멸했다는 소식을 듣고 혼란에 빠졌고 후금의 정찰군이 거짓으로 대군이 돌격한다는 신호를 울리자 부대가 와해되어 후퇴도중 압사자가 발생하며 1,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후 퇴각해 수도 순천부로 돌아왔으나 신하들이 이여백의 죄를 강력히 질타했고 조사에 들어갈 예정이였다. 이에 두려운 이여백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