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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17 21:50:27

두송(명나라)

<colbgcolor=#F0C420><colcolor=#ffffff> 두송
杜松
출생 미상
대명 섬서성 유림
(現 장쑤성 쑤저우시 쿤산시)
사망 1619년 4월 16일
후금 사르후
(現 랴오닝성 푸순시인근)
이명 두흑자(杜黑子), 두태사(杜太師)
가족 형 - 두동(杜桐)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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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나라의 군인.

2. 생애

섬서성 유림 출생으로 두동의 동생이다. 내몽골 영하에서 성장했으며 주로 북방에서 오이라트와 전투를 치렀다. 1594년 참장에 올랐으며 1600년대부턴 몽골족과 전투를 치렀다. 검은 갑주를 갖추고 황금빛 쌍 칼을 들고 돌격해 두흑자라는 별명이 붙었고 전형적인 맹장으로 일선의 용맹이 뛰어나 돌격에 능하고 우직한 성격이나 성질이 급하고 무모한 성격으로 악명이 높았다. 평소에 자신의 몸에 생긴 칼자국을 자랑하며 다녔고, 일이 안 풀리면 갑옷을 부수고 삭발하는 버릇이 있었다. 게다가 공적을 위해서라면 부하들의 고생 등을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인물이었다.

1608년 이성량의 후임으로 요동총병관이 되었고 이전의 전투에서 패배한 것으로 인해 자살하고자 모든 갑옷와 무기를 불태우는 행위로 인해 조정은 그를 강제로 귀향 조치했으나 다시 총병관으로 복직시켰다. 1619년 명 조정은 양호를 총사령관으로 마림, 유정, 이여백, 두송을 각 로군의 사령관으로 발탁해 4로 병진으로 후금의 수도인 무순을 향해 진군했다.

하지만 이 4로간의 지휘관들은 능력과 경험은 있으나 서로 사이가 좋지 못했고 서로군의 지휘관 두송은 공을 세우기 위해 심양에서 지휘관 중 제일 먼저 무순으로 향해 아무것도 없는 무순을 함락시켰다. 이후 다른 로군과 합류해 전투를 치러야했으나 단독으로 공을 세우기 위해 홀로 진군했다. 총 30,000명 중 20,000명을 사르후에 배치시키고 자신은 10,000명의 병력으로 계번성으로 진격했다.[1]

이에 후금은 정찰조를 보내 명군의 상황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고 누르하치는 아들 홍타이지에게 팔기 2기를 내줘 계번성에서 두송을 급습하라 명했으며 나머지 6기 45,000명을 사르후의 명군을 공격하라 명했다. 화기로 무장했으나 총사령관의 부재로 방심하고 있었으며 야간 공격으로 사격통제도 되지 않아 후금군은 불꽃이 있는 방향에 화살비를 퍼부어 명군을 사살하며 전멸시켰다.

앞서 나가던 두송군 역시 홍타이지의 2기에게 역습을 당했고 대기군이 전멸했다는 소식을 듣게되자 사기가 떨어졌다. 사르후의 6기가 두송군의 후방을 공격하며 전멸했고 두송역시 후금군의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명 조정은 두송의 무모한 행동을 질책했으며 1621년 소보좌제독에 추증되었다.

[1] 첩보에 따르면 400명의 병력만 존재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