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16 13:27:53

톄링시


{{{#!wiki style="margin:-12px -0px"<tablebordercolor=#ee1c25>
파일:중국 국장.svg
}}}
{{{#!wiki style="color: #ffff00; 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rowcolor=#fff> 지급행정구
지급시 14
현급행정구
시할구 59, 현급시 16, 17, 자치현 8
선양시
성도
沈阳市
허핑구
和平区
선허구
沈河区
다둥구
大东区
황구구
皇姑区
톄시구
铁西区
쑤자툰구
苏家屯区
훈난구
浑南区
선베이신구
沈北新区
위훙구
于洪区
랴오중구
辽中区
신민시
新民市
캉핑현
康平县
파쿠현
法库县
다롄시
大连市
중산구
中山区
시강구
西岗区
사허커우구
沙河口区
간징쯔구
甘井子区
뤼순커우구
旅顺口区
진저우구
金州区
푸란뎬구
普兰店区
와팡뎬시
瓦房店市
좡허시
庄河市
창하이현
长海县
안산시
鞍山市
톄둥구
铁东区
톄시구
铁西区
리산구
立山区
첸산구
千山区
하이청시
海城市
타이안현
台安县
슈옌 만족 자치현
岫岩满族自治县
푸순시
抚顺市
순청구
顺城区
신푸구
新抚区
둥저우구
东洲区
왕화구
望花区
푸순현
抚顺县
칭위안 만족 자치현
清原满族自治县
신빈 만족 자치현
新宾满族自治县
번시시
本溪市
핑산구
平山区
시후구
溪湖区
밍산구
明山区
난펀구
南芬区
번시 만족 자치현
本溪满族自治县
환런 만족 자치현
桓仁满族自治县
단둥시
丹东市
전싱구
振兴区
전안구
振安区
둥강시
东港市
펑청시
凤城市
콴뎬 만족 자치현
宽甸满族自治县
진저우시
锦州市
타이허구
太和区
구타구
古塔区
링허구
凌河区
링하이시
凌海市
베이전시
北镇市
헤이산현
黑山县
이현
义县
잉커우시
营口市
잔첸구
站前区
시스구
西市区
바위취안구
鲅鱼圈区
라오볜구
老边区
가이저우시
盖州市
다스차오시
大石桥市
푸신시
阜新市
하이저우구
海州区
신추구
新邱区
타이핑구
太平区
칭허먼구
清河门区
시허구
细河区
장우현
彰武县
푸신 몽골족 자치현
阜新蒙古族自治县
랴오양시
辽阳市
원성구
文圣区
바이타구
白塔区
훙웨이구
宏伟区
궁창링구
弓长岭区
타이쯔허구
太子河区
덩타시
灯塔市
랴오양현
辽阳县
판진시
盘锦市
싱룽타이구
兴隆台区
솽타이쯔구
双台子区
다와구
大洼区
판산현
盘山县
톄링시
铁岭市
인저우구
银州区
칭허구
清河区
댜오빙산시
调兵山市
카이위안시
开原市
톄링현
铁岭县
시펑현
西丰县
창투현
昌图县
차오양시
朝阳市
솽타구
双塔区
룽청구
龙城区
베이퍄오시
北票市
링위안시
凌源市
차오양현
朝阳县
젠핑현
建平县
카라친쭤이 몽골족 자치현
喀喇沁左翼蒙古族自治县
후루다오시
葫芦岛市
룽강구
龙港区
롄산구
连山区
난퍄오구
南票区
싱청시
兴城市
쑤이중현
绥中县
젠창현
建昌县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background-color: rgba(0, 128, 255, .2)"
색인: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padding: 3px; text-align: center"
}}}}}}}}}
파일:중국 국기.svg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지급시
[ruby(铁岭, ruby=Tiělíng)][ruby(市, ruby=Shì)]
톄링시 | Tieling City
시정부 소재지 랴오닝성 톄링시 톄링현
판허신구 진사장루28호
辽宁省铁岭市铁岭县
凡河新区金沙江路28号
지역 둥베이
면적 12,966km²
하위 행정구역 2구 2현급시 2현
시간대 UTC+8
인문 환경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5px -13px"
인구 2,388,294명 (2020)
민족 구성 한족 76.99% | 만주족 20.39%
시버족 0.89% | 조선족 0.72%
몽골족 0.51% | 후이족 0.39%
기타 0.11% (2020)
인구밀도 184명/km²
서기 쑹청(宋诚)
시장 리원뱌오(李文飙)
GRDP 전체 $103억 7,493만 (2020)
1인당 $4,344 (2020)
상징 시화 백합
시목 단풍나무
차량번호 辽M
행정구역 약칭
행정구역코드 211200
지역전화번호 024
우편번호 112000
ISO 3166-2 CN-LN-12 }}}}}}}}}
홈페이지
파일:중국 톄링.jpg

1. 개요2. 역사
2.1. 인저우구(银州区)2.2. 칭허구(清河区)2.3. 댜오빙산시(调兵山市)2.4. 카이위안시(开原市)2.5. 시펑현(西丰县)2.6. 창투현(昌图县)
3. 교통

[clearfix]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북부의 지급시. 선양시에서 동북쪽으로 40km 거리로 가깝다. 다만 번시, 푸순, 랴오양처럼 선양 외곽 순환도로 안에 있지 않다는 점에서 안산시와 공통점이 있다. 지급시 관할 인구는 약 240만이고, 도시 자체에는 40만 정도가 거주한다. 지명의 유래는 강원도함경도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인 철령, 그리고 거기서 유래한 명나라 시기 요동의 군사 거점이던 철령위로, 한국계 장군 이성량이여송 부자의 고향이기도 하다. 석탄, 화학 등의 공업과 서쪽과 북쪽 평지의 농업이 발달하였다. 당나라 때의 원통사(員通寺), 명대의 간화루(看花樓), 저우언라이가 소시적 공부했던 은강서원(銀崗書院) 등의 고적지가 있다. 전체 인구 중 한족은 77%로 적은 편이다. 북부 카이위안에서는 만주족, 조선족, 몽골족 등이 주민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이다. 조선족은 시청이 있는 인저우구에 많다.

2. 역사

춘추시대 이전에 이 지역은 숙신의 영토였다. 춘추전국시대에 들어와서는 현재의 톄링시 남부는 요동군 관할이 되었고, 북부 지역은 동호의 영토가 되었는데, 진나라한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남부와 북부 지역을 포함한 대부분이 요동군 관할에 들어가게 되었다.

후한 때부터 삼국시대, 서진 때까지 남부 지역은 현도군에, 북부 지역 중 지금의 카이위안시(开原市)·창투현(昌图县) 지역은 부여의 영토였다. 동진 때에 이르러서는 이 지역은 현도군 관할이 되었고, 남북조시대 때는 거란의 영토가 되었다.

수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고구려의 영토에 편입되었다가, 고구려 멸망 후 남부 지역은 안동도호부, 서북부 지역은 송막도독부(松漠都督府)의 관할이 되었다. 그리고 창투현 지역은 일찍이 발해서경압록부·부여부(扶餘府)의 관할에 들어갔다. 그 뒤 이 지역은 월희말갈(越喜靺鞨)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713년(당나라 현종 2) 발해 고왕이 이 지역을 빼앗아 부주(富州)를 두었다.

그러다가 917년(요나라 태조 11) 야율아보기가 발해의 부주를 복속한 뒤 이 지역에서 은화를 제련한다는 것에 착안하여 이유로 이름을 은주(銀州)[1]로 고쳤고, 현재의 톄링시 지역의 대부분이 동경도(東京道) 요양부(遼陽府) 관할이 되었다.

금나라 때 남부 지역은 동경로(東京路) 함평부(咸平府), 서부 지역은 북경로(北京路), 북동부 지역은 상경로(上京路) 회령부(會寧府)에 각각 속하게 되었다. 원나라 때는 서부 지역이 중서성(中書省) 회창로(會昌路)에 속하게 되었고, 그 나머지 지역은 개원로(開原路) 함평부(咸平府) 관할이 되었다.

현재 이곳의 지명은 의외라면 의외로 한국과 관련이 있는데, 바로 명나라 건국 후 1387년 철령위가 설치된 것과 복잡하게 얽힌 이야기가 있다. 명나라는 고려를 압박하기 위한 목적으로 원나라로부터 공민왕이 수복한, 강원도함경도의 경계 지방에 있는 철령 인근이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철령위를 만들었고, 1388년 3월에는 실제로 군대를 움직이며 한반도에 진입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무력 충돌을 감수한 최영의 강경 대응 앞에 명나라의 야욕은 무산되어 철령위는 페이퍼 플랜으로 남았고, 고려에서 명에 대한 강경 대응의 연장선상에서 요동정벌을 단행했다가 이듬해 위화도 회군이 벌어진 이후에도 당연히 고려, 그리고 뒤이은 조선이 생짜로 자기 땅을 내놓으라는 명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일 리는 없었다. 그 때문에 결국 원래 계획이 엎어진 채 남의 집에 더부살이하던 철령위를[2] 옮겨 1393년(홍무 26) 지금의 선양시와 카이위안시 사이의 옛 은주 지역에 둔 것이다. 즉 기묘하게도 이름은 한반도의 철령에서 유래했는데, 이름만 그랬을 뿐 실질적으로는 한 번도 철령위가 한반도에 들어와 설치된 적은 없었다. 반대로 요동의 톄링시가 사실은 고려 땅이었다는, 일각에서 주장되고 있는 괴설 또한 역사적 사실을 상당히 잘라먹고 만들어진 역사 왜곡이다.[3]

그 뒤 남부 지역은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 철령위, 서부 지역은 요하투(遼河套) 부여위(扶餘衛), 북부 지역은 삼만위(三萬衛) 등에 각각 편입되었다. 그리고 홍무제의 20번째 아들 한왕(韓王) 주송(朱松)을 지금의 카이위안시에 봉했다.

명나라 멸망 후 1664년(청나라 강희 1) 강희제는 철령위를 폐지하고 이 지역에 철령현(鐵嶺縣)을 설치하였고, 인근에 설치된 개원현(開原縣)과 함께 봉천장군(奉天將軍) 봉천부(奉天府)의 관할이 되었다. 당시 철령현 지역은 지금의 시펑현(西豊縣)을 비롯한 북동부의 경우 봉금지대의 일부분이었고, 서부와 북부의 경우 내몽골 코르친부(科爾沁部) 소속이었다.

1907년(광서 33) 봉천장군이 폐지되고 봉천성으로 개칭되자 여기에 속하게 되었다. 1913년 남부 지역이 봉천성 요심도(遼瀋道)의 관할, 서부와 북부 지역이 도창도(洮昌道)의 관할이 되었다. 1929년 2월 5일 봉천성이 랴오닝성으로 개칭되어 랴오닝성 소속이 되었다.

만주국이 건국한 뒤 랴오닝성이 다시 봉천성으로 개칭되어 봉천성 소속이 되었다. 중일전쟁 발발 후에는 양정우(楊靜宇)가 이끄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1군이 이 지역에 거점을 형성하기도 했다.

국공내전 시에는 인민해방군이 게릴라전 끝에 1948년 10월 28일 도시를 접수하였다. 1948년 요북성(遼北省) 소속이 되었다가 1949년에는 요서성(遼西省)에 편입되었다. 그러다가 1954년 9월 1일 요동성(遼東省)과 요서성이 통합되어 랴오닝성이 되면서 랴오닝성 소속이 되었다. 이후 석탄 등의 광산업 거점으로 성장하여 1979년 지급시가 되었다.

2.1. 인저우구(银州区)

1946년 톄링현에 인저우진(银州镇)이 설치되었고, 1948년 랴오베이성에 편입되었다. 1949년 톄링현이 랴오시성에 편입되면서 인저우진이 폐지되었다.

1954년 톄링현이 랴오닝성에 편입되었는데, 1955년 인저우진이 복구되었다. 1979년에는 다시 폐지되어 톄링지구에 편입되었다가, 1984년 톄링지구가 폐지되어 인저우진을 복구하였고, 이어 인저우구(银州区)로 개칭되어 지금에 이른다.

2.2. 칭허구(清河区)

본래 카이위안현(開原縣) 관할로, 1948년 카이위안현 제8구(第八区)가 되었다가 1957년 화랑툰구(貨郞屯区)가 설치되었다. 1958년 화랑툰구의 일부를 쪼개어 칭허진(清河镇)을 신설하였다.

1984년 카이위안현 칭허진·칭허향(淸河乡)을 분리하여 톄링시 칭허구(清河区)로 편입하였다.

2.3. 댜오빙산시(调兵山市)

1906년(광서 32) 법고문무민청(法庫門撫民廳, 법고청)이 신설되자 조병산촌(調兵山村)으로 편입되었다. 1910년(선통 2) 동일향(東一鄕)이 되었고, 1913년 법고청이 법고현으로 개칭되자 이 소속이 되었다.

1981년 9월 21일 톄링시에 편입되면서, 톄링시의 '톄(铁)'과 파쿠현(法库县)의 '파(法)'를 따 톄파시(铁法市)를 신설하였다. 그러다가 1984년 10월 톄링시 소속의 톄파구(铁法区)가 되었고, 1986년 9월 톄파시로 복구되었다.

2002년 댜오빙산시로 개칭되었다.

2.4. 카이위안시(开原市)

1664년 개원현으로 설치되었으며, 1984년 9월 톄링시에 편입되었다. 1989년 3월 카이위안시로 승격했다.

2.5. 시펑현(西丰县)

1902년 서풍현이 설치되어 해룡부(海龍府)의 관할이 되었다. 1914년 6월 봉천성 요심도 관할이 되었다. 1947년 랴오베이성 소속이 되었다가 1948년 다시 랴오닝성 소속이 되었다. 1949년에는 랴오둥성 소속이 되었다가 1955년 랴오둥성과 랴오시성이 통합되면서 다시 랴오닝성 소속이 되었다.

1959년 선양시 소속이 되었고, 1976년 톄링시 소속이 되었다.

2.6. 창투현(昌图县)

1806년(가경 11) 창도청(昌圖廳)이 설치되었다. 1877년(광서 3) 창도부(昌圖府)로 개칭되었다가, 1913년 창투현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3. 교통

징하철도가 톄링시 내의 톄링역(铁岭), 카이위안역(开原), 창투역(昌图)을 지난다.
[1] 이 지명은 현재도 톄링시 도심 중심부에 있는 인저우구(銀州区, 은주구)로 남아 있다.[2] 1388년 3월 철령위의 한반도 내 설치 시도가 실패한 이후 철령위에 보내질 예정이던 부대는 원나라 때 행정 구역을 폐지했던 봉집현(奉集縣)을 부활시켜 그곳에 임시로 머물게 되는데, 지금의 선양시 남부이다.[3] 심지어 철령위의 설치에 대해 항의할 때 고려에서 '공험진까지 전부 우리 땅이었다'고 한 주장을 근거로 동북 9성에 대한 가장 극단적인 주장을 들고 와서 한반도의 철령을 만주 한복판까지 옮겨놓는(...) 괴설도 존재한다. 당연하지만 고려에서 공험진까지 전부 우리 땅이라고 주장한 것은 철령이 공험진에 있다는 얘기가 아니라 철령보다 훨씬 북쪽 공험진도 역사적으로 고려 땅인데 명에서 철령위를 두어서 고려 땅의 허리를 끊어 채간다는 것이 대체 무슨 소리냐는 항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