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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2 20:17:48

철령위

1. 개요2. 상세3. 역사4. 목적5. 사료6. 철령위 만주설?
6.1. 진실
6.1.1. 왜 요동으로 향했는가6.1.2. 주원장의 인정6.1.3. 요동의 철령
7. 관련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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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鐵嶺衛

고려위화도 회군의 원인이 되었던 지역으로, 을 세운 주원장이 이곳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자 고려의 우왕최영은 이에 반발해 요동정벌을 감행했다. 결국 사불가론을 내세워 요동정벌을 반대한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2. 상세

철령위는 엄밀히 따지자면 지역이라기보단 일종의 군사 기구에 더 가깝다. 명나라의 철령위같은 기관을 '위소'라고 부르는데 원칙적으로 군사 5,600명이 정원이며 1,120명이 배치되는 천호소 5개로 구성된다. 다만 군사요충지에 설치된 위소는 기존의 행정구역을 폐하고 행정의 일을 직접 담당했으며 철령위는 이런 케이스에 속했다. 어찌보면 고려의 양계나 신라의 패강진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철령위가 관할하려고 했던 지역은 압록강변에서 원산만까지 아우르는 굉장히 넓은 영토였는데 옛 쌍성총관부와 공민왕의 북진영토를 합친 정도라고 생각하면 큰 문제는 없다. 다만, 당시 정황상 압록강 건너 요동까지 뻗어있었을 가능성도 있으니 논란의 여지는 있다. 더불어 초기 치소[1]의 위치에 대해선 여러가지 학설이 있는데 후보지로는 철령, 강계, 요동 황성, 요동 봉집 등이 있다.

3. 역사

원나라가 몰락한 이후 고려와 국경을 맞댄 명나라는 쌍성총관부공민왕이 수복한 그 이북 지역을 요구하는데, 원나라는 명나라가 합병했으니 옛 원나라의 땅도 명나라가 가지는게 맞다는 명분이었다. 실제로 반환된 동녕총관부탐라총관부와는 다르게 쌍성총관부는 끝까지 원나라의 직할지로 남아있다가 고려의 공격으로 탈환되었고, 그 이북 지역은 말할 필요도 없이 원나라 요양행성의 관할이었다.

결국 명나라는 1388년 3월에 요동도사를 시켜 공식적으로 철령위 설치를 시도한다. 지휘관 2명과 병사 1000여명이 강계를 거점으로 삼아 고려의 북방 경계에 진입했고, 이후 고려 영내에 주둔지 및 역참 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사전작업에 들어가려한다. 철령위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려는 의도였으나 본격적으로 실행에 옮기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

이미 수용하기 어렵다는 고려의 답서를 받았는데도 명나라는 사신을 보내 철령위 설치를 일방적으로 통보해버리는데 이에 격노한 최영이 군사를 보내 고려 영내로 진입한 명군 선발대 여럿을 죽이고 일부는 포로로 잡음으로써 양계의 방비를 관철한다. 그리고 그 이후로 명나라는 더이상 군사적으로 북방 영토에 간섭하려는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

홍무제 주원장의 본의가 무엇이었는지 현재로선 알 수 없지만 일단 고려땅에 철령위를 설치하려했던 계획 자체는 실패했다. 다만 철령위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고 결과적으론 요동에 철령위가 세워지게 되었는데 처음에 봉집현이라는 곳에 치소가 위치했다가 현재의 랴오닝성 톄링시로 치소가 이전되어 현재까지도 지명으로 정착했다. 때문에 톄링시에선 시의 지명이 강원도철령에서 유래했다고 밝히고 있다.

4. 목적

이미 고려가 지배하는 영역에 굳이 마찰까지 일으키며 철령위를 설치하려고한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의문에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대체로는 막 건국된 명나라의 고려 길들이기라는 것이 중론이다. 아직까지 건재하던 북원 세력과 고려를 차단시키고 궁극적으로는 고려에 대한 종주권을 확보하고자 했었다.

더불어 실효지배 중인 요동을 안정시키고 고려의 북진을 사전에 차단하거나 실제로 고려의 영토를 원했다는 주장 역시 받아들여지고 있다. 반대로 단순히 요동의 인력이 부족해서 철령위를 통한 인력충원이 목적이라는 의견도 있으나 실질적으로 영토분쟁화 되어버린건 사실이라 이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5. 사료

동쪽은 큰 바다[大海]에 임하고, 남쪽은 철령(鐵嶺)에 닿고, 서쪽은 황해도와 평안도에 접(接)하였다. 준령(峻嶺)이 백두산(白頭山)에서부터 기복(起伏)하여 남쪽으로 철령(鐵嶺)까지 뻗쳐 있어, 천여 리에 긍(亘)한다. 북쪽은 야인(野人)의 땅에 연하였는데, 남쪽은 철령으로부터, 북쪽은 공험진(公險鎭)에 이르기까지 1천 7백 여 리이다. 동쪽과 서쪽으로 큰 산과 큰 바다 사이에 끼어 있어서, 〈그 땅의〉 넓고 좁은 것이 같지 아니하여, 어떤 데는 수백여 리가 되고, 어떤 데는 6, 70리가 되는데, 오직 갑산(甲山)만이 큰 산의 서북쪽 바깥으로 쑥 들어가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함길도 #

6. 철령위 만주설?

다음 사료를 근거로 인하대학교 복기대, 정태만 교수가 '철령위는 만주에 있다'고 이견을 제시했지만 현재까지 검증되고 있지 않다.
철령위 홍무 21년[2] 3월 옛 철령성에 설치하였다가 26년 4월 옛 은주 땅으로 옮겼다. 즉 지금의 치소이다. 서쪽에 요하가 있고, 남쪽에 범하가 있다. 또 남쪽에 소청하가 있다. 모두 요하로 흘러 들어간다. 또 남쪽에 의로성이 있다 홍무 29년에 설치하였으니 이곳 의로에 1000호를 두었다. 또 범하성(范河城)이 위(철령위)의 남쪽에 있으니 또 범하성(泛河城)이라고도 이른다. 정통4년에 범하를 설치하여 이곳에 1000호를 두었다. (철령위의) 동남쪽에 있는 봉집현[3]은 곧 옛 철령성이다. 고려와 경계를 접하였다.
명사 지리지 철령위
高麗奏遼東文 · 高 · 和 · 定州皆其國舊壤, 乞就鐵嶺屯戍. 原名言 “數州皆入元版圖, 屬於遼, 高麗地以鴨綠江為界. 今鐵嶺已置衛, 不宜.” 復有陳請, 帝命諭其國守分土, 無生釁.
고려가 아뢰길 요동의 문 · 고 · 화 · 정주 등은 모두 고려의 옛 땅이니 (고려에서) 철령에 군영을 설치해서 지키기를 비니 원명이 말하기를 “여러 주는 모두 원의 옛 판도에 들어 있어서 요동에 속해 있고, 고려의 땅은 압록강을 경계로서 한다. 지금 이미 (명이) 철령위를 설치하였으니 마땅하지 않다” 하였다. 다시 청함이 있자, 황제가 명하여 그 나라를 달래어 땅을 나누어 지키어 헷갈림이 생기지 않도록 하였다.
— 《명사》 권136, 열전제24, 이원명
그 이전에 고려대학교의 박원호 교수는 명나라는 한반도에 영토를 확보하려는 욕심 없이 요동 개척을 위한 인력을 확보하고자 고려에 철령위 설치를 통보하였으며, 실제 철령위는 요동에 설치할 계획이었고 실제로도 요동에 설치되었다고 주장했었다. 다만 박원호 교수는 전문 분야가 중국 근세사이기 때문에 당시나 지금이나 심도있게 받아들여지는 이야긴 아니었다.[4]

6.1. 진실

들어가기 앞서 일단 세가지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학계에서 본래부터 논쟁이 있던 것은 철령위 '초기' 치소의 위치였다. 당연히 철령은 강원도의 철령이고 철령위는 공민왕이 수복한 철령 이북의 영토라는게 사실상 정설이었다. 그런데 복기대 교수 등의 주장은 이런 기존의 학설들과 아예 판이한 것으로 초기 치소 뿐만이 아닌 철령위 그 자체와 철령 모두가 아예 요동에 있었다는 심히 환빠스러운 내용이다. 더불어 모두 이 학설에 연관된 인물들이 모두 인하대학교와 연관되어 있다는 공통점도 있다.[5]

이러한 주장은 그들의 논문인 '철령위 위치에 대한 재검토(복기대)', '明의 철령위와 고려말 국경의 재검토(정태상)', '여말선초의 서북 국경선 연구(허우범)' 등의 논문에서 드러나는데 한번 읽어보면 매우 자의적이고 불확실한 내용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예 쌍성총관부를 요동으로 옮겨버리는 등 제도권 대학이나 정상적인 역사학계에선 인정받기 어려운 내용이 가득하다.

6.1.1. 왜 요동으로 향했는가

이 학설의 가장 기본적인 물음은 '철령위를 설치한 곳은 강원도인데, 정작 이성계의 고려군은 왜 동쪽이 아니라 서쪽인 요동으로 향했는가?' 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사실 역사에 조금만 관심을 가져도 바로 이상하고 느껴질 것이다. 이성계는 철령위를 치러간게 아니라 철령위 설치에 대한 보복조치로 요동을 치러간 것이다. 2차 요동정벌에 대하여 모르지 않고서야 이런 주장이 나올 수가 없다.

게다가 철령위는 단순히 강원도가 아니라 압록강변에서 동해로 이어지는 넓은 군사행정구역일 뿐더러 이미 구 쌍성총관부와 그 이북 지역에 대한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는 최영이 파병한 군대로 인해 실패한 상태였다. 즉 문제가 되던 지역은 이미 고려의 통제가 확고한 상태였고 철령위를 설치한답시고 투입된 명나라군은 고작 1000여명이여서 4만여명이나 되는 군사를 추가로 파견할 이유도 전혀 없었다.

6.1.2. 주원장의 인정

명실록에서 주원장이 말한 "高麗地壤舊以鴨綠江為界"라는 발언을 근거로 당시 명나라는 이미 압록강 동쪽에 대한 고려의 영유권을 인정한 상태였으니 분쟁지역인 철령위는 그 서쪽이라는게 맞다고 주장하는데 이건 전형적인 곡해에 해당한다. 실제 내용은 그런 의미가 전혀 아니다.
이때 고려의 왕 우(禑, 우왕)가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문주(文州)[6]·고주(高州)[7]·화주(和州)[8]·정주(定州)[9] 등이 본래 고려의 옛 땅이었으며 철령(鐵嶺) 땅은 실로 대대로 지켜오던 곳이었으니 바라건대 그대로 통속(統属)하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황상이 예부상서(禮部尙書) 이원명(李原名)에게 효유하여 말하기를, “몇몇 주의 땅은 만약 고려의 말대로라면 마땅히 그에게 예속되어야 할 것 같으나, 이치와 형세로 말하자면 옛날에 이미 원(元)에 통할되었으니 이제 마땅히 요동(遼)에 속해야 할 것이다. 하물며 지금 철령에 이미 위(衛)를 설치해서 병마가 주둔하여 그 백성을 지키고 있으니 각각 통속되는 바가 있는 것이다. 고려의 말은 믿기에 충분하지 못하다.

또한 고려의 땅은 과거 압록강을 경계로 하여 옛날부터 스스로 교화를 펼쳐왔다(高麗地壤 舊以鴨 綠江為界 從古自為聲教). 그런데도 중국 누대 왕조로부터 자주 정벌을 당한 것은 그들이 스스로 분쟁의 단서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지금 다시 철령을 두고 말이 있는데 이는 분쟁의 단서를 일으키고자 하는 것이니, 먼 나라의 작은 오랑캐라면 진실로 마땅히 그와 같이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일단 그들의 속이고 거짓된 정황은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예부에서는 마땅히 짐의 말을 그 국왕에게 자문(咨)으로 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각기 본분을 지켜 분쟁의 단서를 일으키지 말라고 하라.”라고 하였다.
太祖高皇帝實錄 卷190 洪武 21年 4月 18日 壬戌
기록의 전문을 보면 주원장이 현재 고려의 압록강 땅 동안 영유권을 인정하는게 아니라 기존 입장의 되풀이에 덧붙여 고려의 이전 국경을 들먹이며 고려가 여러 중원국가에게 침략을 당한 것은 고려의 잘못일 뿐이라고 책망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고려의 북계도 압록강과 접해있어 애초에 틀린 말도 아니다.

즉, 전체적으로 보면 과거가 어떠했든 그것은 현재의 문제와는 관련이 없다고 앞서 밝히면서, 철령위가 설치될 지역은 원나라의 통치 아래 있었고 그 원나라는 명나라가 병탄했으니 당연히 그 지역도 명나라 땅인게 맞다는 기존의 뻔뻔한 주장에 전혀 어긋나지 않는 발언이다.

심지어 논문에서는 고려가 영유권을 주장한 문주, 고주, 화주, 정주 등이 전부 함경도 남부 쌍성총관부에 있었다는 것은 무시하고 주원장이 말한 '몇몇 주의 땅'은 압록강 이북의 영토라며 대놓고 호도하고 있다.

더불어 앞의 명사 이원명 열전에서 6주 앞에 요동이라는 서술이 붙어있어 오해할 수도 있는데 저 요동은 좁은 의미의 요동인 요동반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요동인 요하강 동쪽의 넓은 땅, 즉 만주 일대를 포괄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애초에 요동반도에 위치해있던 요양행성 산하 '요양로(遼陽路)'에는 문주, 고주, 화주, 정주 등의 행정구역이 설치되거나 엮인 기록 자체가 없다.

6.1.3. 요동의 철령

철령위 설치의 기준이 되는 철령이 요동 황성에 위치한다는 주장도 근거로 삼는데 이건 사실상 거의 사장된 학설이다. 왜냐하면 강원도의 철령은 카다안의 침입 때부터 지속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반면 황성의 철령은 《요동지》에 딱 한번 언급되며 그것도 철령위 설치 후 한참 뒤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요동지의 철령은 철령위의 치소가 위치해서 철령성이라 불리던 요동의 봉집현이나 현재의 톄링시처럼 철령위의 치소가 있었거나 그 하위 기관이 있었기에 붙여진 지명이지 자연지형인 철령이 황성에 위치했던게 아니라는것이 중론이다. 가장 결정적으로 명의 철령위 설치 이전에는 요동의 그 어떤 곳에서도 철령이라는 지명은 찾아볼 수 없다.
하물며 지금 철령에 이미 위(衛)를 설치해서 병마가 주둔하여 그 백성을 지키고 있으니 각각 통속되는 바가 있는 것이다.
더불어 논문에서는 앞 문단에 기재된 1388년 4월 주원장의 발언도 근거로 삼고 있는데 명은 실질적으로 강원도 철령부근까지 통제력을 미치지 못한 반면 요동의 황성[10]은 통제 중이었으니 이때 언급된 철령은 요동의 철령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다만 이것도 전후관계를 살피지 않은 해석이다. 이미 3월에 명나라는 철령위라는 기관 자체를 설립한 상태였고 이 행정구역의 초기 계획상 관할은 강원도 철령까지 이어져있었다. 게다가 요동도사의 군사들이 고려의 양계로 진입해 중앙의 철령위 설치 명령을 수행하다가 고려에 제압당했지만 명목상으로나 계획상으로나 대화가 오고간 4월에는 이미 철령에 위가 설치되어 있어야 했다. 실제로 고려군이 도착하기 전 단기간 동안 위가 설치되었을 수도 있다.[11]

무엇보다 자신의 명령을 받들던 명군이 최영이 파병한 고려군에 의하여 몇몇은 죽임을 당하고 쫓겨났는데 이를 고려의 사신에게 전혀 따지고 들지 않았다는 점을 미루어보아 주원장은 관련 내용을 아직 보고받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즉, 자신의 명령대로 철령에는 이미 명나라의 위가 설치되었다고 보고있었을 것이다.

7. 관련문서


[1] 기관의 본부를 이르는 말.[2] 1388년, 위화도 회군이 벌어졌던 그 해이다.[3] 중국역사지명대사전에 따르면 이는 랴오닝의 봉집보이다.#[4] 비슷한 사례로 이덕일이 있다.[5] 인하대학교 융합고고학과의 설립에는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가 관여했다.[6] 현재의 문천시.[7] 현재의 고원군.[8] 현재의 영흥군.[9] 현재의 정평군.[10] 요동의 철령으로 주장되는 곳.[11] 철령위 초기 치소에 대한 후보지로 함경도 철령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