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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유적건조물 / 유물산포지유적산포지 / 유적분포지 | |
면적 | 34,077㎡ | |
지정연도 | 2006년 11월 6일 | |
제작시기 | 백제 | |
위치 |
<colbgcolor=#008080> 정지산 유적의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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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충청남도 공주시에 있는 백제의 왕실 제의, 제사 관련 유적이다. 사적 제474호로 지정되어있다.2. 역사
1996년 국립공주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된 유적이다. 이후 1998년에 충청남도 기념물 제147호로 지정되었다가, 백제의 현존하는 유일한 제사 유적이라는 가치를 인정받아 사적 제474호로 승격 지정되었다.3. 특징
웅진시기 백제 왕실의 제의시설로 추정되는 유적이다. 일각에서는 백제 왕실의 장례를 치른 빈전(殯殿)으로 보고 있다.건물의 구조가 주거시설로 보기 부적한 점, 백제 국가시설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연화문 수막새가 발견된 점, 각종 제사도구가 발견된 점을 바탕으로 장지산 유적을 백제 왕실의 제의 시설로 추정한다.
특히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사격자무늬벽돌이 정지산 유적에서도 발견된 점, 무령왕릉 지석(誌石)[1]에서 무령왕비의 장례를 오늘날 정지산에서 치렀다고 기록한 점[2]에 근거하여 정지산 유적을 빈전으로 보고 있다.
빈전이란 왕이나 왕비가 승하했을 때 발인 전까지 관을 안치하는 시설이다. 빈(殯)이란 장례 방법 중 하나로 시신을 입관하여 장사지내기까지 일정 기간 바깥에 안치하는 것이다. 오늘날 빈소(殯所)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현대의 삼일장과 달리 과거 동아시아 특히 삼국시대 한국 왕실에서는 빈례(殯禮)를 오랫동안 치렀다. 왕족의 시신을 오랜 시간 빈전에 안치하는 것이다. 빈례가 진행되는 동안 왕실은 크게 장례식을 거행하여 체제 유지와 계승 안정성을 과시하고, 화려한 능묘를 만드는 데 필요한 시간을 확보하였다.
중국 측 역사서 『수서』에 따르면 "백제의 장례제도는 고구려와 같다. 사람이 죽으면 집 안에서 빈(殯)하고 3년이 지나 길일을 택해 매장한다" 한다. 한국 측 기록인 무령왕릉 지석에서도 무령왕과 무령왕비가 '27개월(3년)간 빈을 치르고 무덤에 모셨다'는 것이 교차검증으로 확인된다.
3년이라는 긴 기간 시체의 부패를 막기 위하여 얼음이 필요한데, 마침 정지산 유적에서 빙고(氷庫)시설이 확인된다. 바로 옆 금강이 겨우내 얼었을 때 얼음을 캔 뒤 정지산에 구덩이를 파 진흙과 왕겨를 채워 얼음이 오랜 시간 녹지 않도록 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지』 부여조 기록에서 "부여에서는 사람이 여름에 죽으면 모두 얼음을 채워둔다"는 점에 근거하여 같은 한민족인 백제에서도 동일한 장례 풍습을 거행했던 것으로 본다.
4. 구조
토목공사로 평탄화시킨 정상부에는 남쪽에 매우 넓은 뜰을 두고 남향의 기와건물 1동이 있었으며 그 뒤쪽으로는 3동의 부속건물이 배치되어 있었다.
남측 경사면에서는 4동의 부속건물이 확인되었다. 또한 주요건물 주위로 목책을 여러겹 둘러 외부와의 경계를 확실히 하기도 하였다.
[1] 죽은 이의 인적사항 등을 기록한 판[2] 무령왕릉 지석 4면에서 '526년 12월 백제국 왕태비(무령왕비)께서 천명대로 살다가 돌아가셨다. (궁궐의) 서쪽 땅에 장례를 거행했다.' 기록되어 있다. 정지산은 웅진백제 왕궁 비정지인 공산성의 서쪽에 위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