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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 나인협(羅寅協) |
도호 | 홍암(泓菴) |
본관 | 나주 나씨 |
출생 | 1872년 10월 8일 |
평안도 성천도호부 남전방 이동리[1][2] (현 평안남도 회창군 송동리) | |
사망 | 1951년 4월 16일 (향년 80세) |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 |
국적 | 대한민국 |
직업 | 독립운동가, 천도교 도사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
상훈 | 건국훈장 대통령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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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천도교 도사.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2.1. 천도교 신자
나인협은 1872년 10월 8일 평안도 성천도호부 남전방 이동리(현 평안남도 회창군 송동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평안남도 평양부 염점리(현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으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으며, 평양부 육로리(현 평양시 중구역 경림동)에 거주하기도 했다. 그의 초년기에 대한 기록은 어렸을 때 한학을 배웠으며 양반 출신이라는 것 외에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1894년에 22살의 나이로 강원도 원주에 사는 김영석(金永碩)의 권유로 동학에 입교했지만, 동학 농민 혁명에 가담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후 1898년에 나용환 등과 함께 손병희를 모셨고, 그를 도와 동학 포교에 힘써 1,000여 명의 교도를 관리했고 1903년 음력 21월 교도 10,000명을 관리하는 의창대령(義昌大領)에 임명되었다.1904년 3월, 나인협은 나용환, 문학수, 김안실, 홍기억, 홍기조, 노양기, 임예환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으로 망명해 있던 손병희를 만났다. 손병희는 그들에게 동학에 서양의 신사상을 접목시켜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고 국내에 돌아가 민회(民會)를 조직하라고 지시했다. 나인협은 귀국 후 1904년 9월 초 나용환, 오영창, 임예환, 홍기조, 홍기억, 황학도 등과 함께 약 13,000명의 동학교도들과 함께 진보회를 개회하고 그 자리에서 일제히 상투를 자르는 단발식을 거행했다. 또한 '동학 차회장 나인협'의 명의로 각처에 광고문을 발송해 조선팔도의 인민이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고 한, 일, 청 3국이 동양평화를 견고히 하자고 주장했다.
1905년 12월 1일,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명했다. 이후 천도교는 1906년 3월 전국 각지에 72개의 대교구를 설치했다. 나인협은 14교구장에 임명되었고, 1909년 6월에 교호 1,500호를 관장했으며, 3.1 운동 발발 직전에는 성천에서 도사로 활동했다.
2.2. 3.1 운동
나인협은 1919년 2월 24일 성천에서 서울로 올라와 49일 기도회에 대한 보고를 손병희에게 전달했다. 이때 그는 오세창과 권동진을 만나 그들로부터 독립선언 계획을 전해들었다. 나인협은 즉석에서 승낙하고 2월 27일 재동에 있는 김상규의 집으로 가서 본정부와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독립건의서·청원서에 조인하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다음날인 2월 28일 밤 8시경, 그는 손병희의 집에서 열린 최종점검 모임에 참석했다. 그는 그곳에서 최종 계획을 전달받고 천도교 중앙총부 근처 하숙집에서 홍기조, 임예환 등과 함께 투숙한 뒤 3월 1일 오후 2시에 인사동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 참석했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나인협은 4월 16일 경성지방법원 재판에서 자신은 독립선언서의 내용과 작성 및 배포 경위 등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했지만 오세창과 권동진의 말을 듣고 독립선언의 취지에 전적으로 공감했으며 조선이 독립해야만 한민족이 부흥할 수 있다고 확신해 가담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후 1년 반에 걸친 심문과 재판을 받은 그는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내란 혐의로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회부되었으며#, 그해 8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소요 혐의로 징역 2년에 본건 공소를 수리하지 않는 판결을 받았다.# 이후 공소하였으나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열린 최종심에서 징역 2년(미결 구류일수 360일 통산)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1년 11월 4일 만기출옥했다.#
2.3. 3.1운동 이후의 행적
나인협은 출옥 후 1921년 말 천도교 임시 대종사장에 임명되었으며, 1922년 9월 중앙총부에서 명칭을 바꿔 성립된 종리원의 종리사에 선임되었다. 1923년부터는 평안남도에서 종교활동에 주력하면서 서북 청년들이 주도하던 문화운동을 후원했다. 또한 1925년 천도교가 구파와 신파로 분열되었을 때, 그는 서북지역 교인들이 중심이 된 신파에 참여했다. 이후 천도교 도사로서 종교 활동에 전념하던 그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했다.해방 후, 나인협은 평안남도 성천군에 머무르면서 천도교 원로로 활동했다. 그러나 천도교 교사 출신의 김달현(金達玄)이 김일성과 손잡고 사회주의 국가 수립에 전념하는 것을 반대했다가 체포되어 6개월간 평양감옥에서 수감되었다. 그러다가 6.25 전쟁이 터지자 월남한 그는 부산 범일동 피난민촌에서 어렵게 살아가다가 1952년 4월 16일 숨을 거두었다. <동아일보>의 1952년 4월 18일자 기사에 따르면, 그는 임종 직전에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남겼다고 한다.
신성을 두려워함은 법훈이요(畏神聖之法訓)
나를 죽여 타인을 살림은 마땅하다.(當殺我而生他)
안은 정해져 있지만 외부는 변하니(內有定而外變)
도는 먼 곳에서부터 나와 통하노라.(道自遠而渠我)
나를 죽여 타인을 살림은 마땅하다.(當殺我而生他)
안은 정해져 있지만 외부는 변하니(內有定而外變)
도는 먼 곳에서부터 나와 통하노라.(道自遠而渠我)
그의 영결식은 4월 20일 오전 초량역 광장에서 거행되었고, 오세창, 이갑성, 이명룡 등 민족대표 33인 동지들이 장례를 주관했다. 유해는 부산시 대연동 범디산 중턱에 안장되었고, 정부는 200만원을 장의비 명목으로 지원했고 국회의원들은 세비의 1할을 거둬 조의금으로 냈다. 이후 그의 유해는 1973년 10월 31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나인협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