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cc00> 재일본대한민국민단 在日本大韓民国民団 Korean Residents Union in Japa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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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17be9> 설립일 | 1946년 | |
단장 | 김이중 | |
소재지 | 일본 도쿄도 미나토구 미나미아자부 1-7-32 | |
형태 | 재일 한국인 단체 |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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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사카 지부 사무실의 모습[1] |
냉전 시절에는 더 규모가 컸던 조총련과 극한 대립을 벌여왔지만 지금이야 조총련이든 민단이든 상호 간의 마찰이 많이 줄어든 상태다.[2] 본부는 도쿄도 미나토구 아자부쥬반역 근방에 위치해 있으며, 그 건물에 주일본 대한민국 대사관 영사부도 있다.
2. 역사
이 단체의 설립 배경을 파악하려면 해방정국 당시 혼란상황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1945년 8.15 광복 후 20일에는 재일조선인대책위원회 같은 재일 한국인 민족운동단체들이 일본 전국에 우후죽순같이 생겼는데, 9월 10일에는 도쿄의 7개 재일 한국인 단체와 각지 대표자 60명이 모여 '재일조선인연맹(조련) 중앙위원회'를 만들고, 9월 20일에 정식 발족했다.그러나 조련이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지지하게 되자 우익 재일 한국인 청년들이 11월에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건청)'을, 이듬해 1월에 박열[3] 등을 중심으로 '신조선건설동맹(건동)'을 각각 조직했다. 이 두 단체가 10월 3일에 합쳐져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이 만들어져 현 민단의 기틀이 다져졌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따라 공인단체로 인정받아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으로 개칭했다. 그리고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 따라 재일 한국인의 영주권이 허용되며 규모가 팽창했다. 1994년에는 '거류' 2글자를 빼고 현 명칭으로 변경했다.
회원수는 454,122명이다. [4] 하지만 재일 한국인 2, 3세들이 아예 일본으로의 귀화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조직세가 점차 약해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전까지는 대립이 심했던 조총련과의 교류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대한민국 현대사 속에서 민단은 큰 역할을 했다. 1950년 6.25 전쟁 때 재일 한국인들이 참전한 걸 비롯해 1950년대 후반에는 일본의 재일 조선인 북한 이주사업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했고, 1964 도쿄 올림픽 때는 한국 선수단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1975년부터 조총련을 포함한 성묘단의 모국방문사업을 전개하기도 했으며[5] 1997년 외환위기 때 외화송금운동을 벌인 바 있다.
민단은 한국 경제발전에도 기여했다. 1974년에 이희건 간사이흥은 창업주 등 재일 한국인 경제인들이 '재일한국인모국투자기업협의회(현 재일한국인본국투자협회)'를 발족해 1982년 신한은행이 설립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이 은행이 각종 은행과 증권, 자산운용, 할부금융업체 등을 인수/합병하며 현재의 신한금융그룹으로 성장해 올 수 있었던 것도 민단의 자본력이 뒤에 버티고 있기 때문이며, 이에 따라 지주사인 신한금융지주회사라든가 신한은행의 사외이사 중 3명을 진출시켜 놓고 있다. 통계도 만드는 등 재일 한국인에 대해 애정을 많이 쏟는다. 직업통계, 민단일보.
어두운 쪽으로는 재일 한국인 야쿠자와도 관련이 있는데, 한국에서 훈장까지 받은 다카야마 도쿠타로(본명은 강외수)는 재일동포로 민단과 인연이 있다. 그리고 송진우의 암살범인 한현우는 최서면의 신원보증으로 일본에 입국한 뒤 민단에 들어갔다. 그리고 조총련을 상대하는 데 일조했다.# 그는 나중에 표창도 받는 등 정권의 비호를 받았다.# 물론 송진우의 죽음에는 조금도 반성을 안한다. 폭력단과의 문제도 발생했는데, 김용환은 폭력단을 민단에서 추방하고자 했다. 그래서 양원석(야나가와 지로)의 조직인 유천회(야나가와카이) 소속 최재수가 추방되었는데, 그 보복으로 회의장에 난입해서 김용환을 참살했다는 무서운 일화가 있다.[6] 또한 토우세이카이 회장으로 제3공화국 시절 상당한 힘을 발휘하던 정건영(마치이 히사유키)도 민단 고문으로 활동한 바 있다.
민단과 조총련은 화해의 기류가 강했을 때 한국의 대표적인 극우 논객으로 유명한 조갑제의 저서가 이들의 화해에 찬물을 끼얹은 적이 있다. 이유인 즉, 조갑제는 한국의 반독재 민주 언론인[7]으로 일본에 알려져 있었는데, 김대중 전 대통령이 종북이라는 주장을 비롯한 여러 카더라 통신을 엮은 조갑제의 저서가 일본어로 번역되어 출간되자 이를 읽고 깨우침(?)을 얻은 일부 민단 내 우파가 반공주의 정신을 다시금 가다듬었다나... 때문인지 지금도 햇볕정책 같은 대북 유화 정책에는 상당히 비판적이며, 일부 칼럼에선 종북 같은 단어를 쓰기도 한다.# 2017년 1월 12일에는 오공태 당시 중앙단장이 부산의 일본 영사관앞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을 철거해야 한다는 발언도 했는데, 반발이 거세지자 민단은 혐오발언 등으로부터 한일관계 개선을 바라는 재일 한국인들의 현실을 감안해달라는 뜻이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동포사회를 포함하여 대한민국에서 오공태, 여건이 단장 시절 한일관계에서 어그로를 끈 민단에 대한 반응은 대단히 좋지 않았다.
어쨌든 민단 회원이라고 해서 다 정치적으로 우익 성향인 것은 아니다. 심지어 민단 회원 중에는 중핵파 등 일본 신좌파 조직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8][9]
2021년 4월 6일에 민단 최고 의결기관인 중앙대회가 박인순 의장 주재로 열려 개표 없이 중앙단장에 여건이 현 단장을 선출한다고 선언하면서 민단이 분열위기를 겪고 있다.# 민단내 분열위기가 지속되면서 재외동포재단에선 민단을 사실상의 분규단체로 지정하고 민단 중앙본부 지원예산 약 20억원의 집행을 보류하는 등 위기가 생겨났다.#
2022년 3월 24일에 민단은 일본 공명당에 정주 외국인 차별 금지와 처우 개선에 나서달라는 요청서를 전달했다고 밝혔다.#
2023년 12월 개최된 임시중앙대회에서 여건이 단장이 민단의 독단적인 운영과 반민주적 행보 등으로 인하여 탄핵되었으나[10], 주일한국대사관과 윤덕민 주일대사[11]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 최초 중재안을 발표하여 동포사회에서 큰 비판을 받았고 결국 최종 중재안 발표에서는 대사관 측 정무라인이 배제되었다.
결국 2024년 2월 28일 중재안에 포함된 재선거 실시를 통하여 김이중 카나가와현본부 상임고문이 새로운 민단의 단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김이중 단장은 일본에 사는 한국인이 목소리를 내는 자세와 활동이 필요하다며 민단의 노선 변화를 예고했다.
3. 민단 강령
*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시를 준수한다.
* 우리는 재일동포의 권익옹호를 기한다.
* 우리는 재일동포의 경제발전을 기한다.
* 우리는 재일동포의 문화향상을 기한다.
* 우리는 일본 지역사회의 발전을 기한다.
* 우리는 세계평화와 국제친선을 기한다.
* 우리는 재일동포의 권익옹호를 기한다.
* 우리는 재일동포의 경제발전을 기한다.
* 우리는 재일동포의 문화향상을 기한다.
* 우리는 일본 지역사회의 발전을 기한다.
* 우리는 세계평화와 국제친선을 기한다.
4. 역대 중앙단장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6px;" {{{#fde41a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181818,#e5e5e5 | 1~5대 박열 | 6대 정한경 | 7~8대 조규훈 | 9~10대 김재화 | 11대 원심창 |
12대 원심창 김현 김재화 | 13~16대 김재화 | 17~19대 정찬진 | 20~21대 김재화 | 22~23대 정인석 | |
24대 조영주 | 25~26대 권일 | 27대 김금석 | 28~29대 권일 | 30대 이유천 | |
31~32대 이희원 | 대리 윤달용 | 33대 김정주 | 34대 윤달용 | 35대 조영주 | |
36~37대 장총명 | 38~39 박병헌 | 40대 정해룡 | 41~42대 신용상 | 43~44대 김재숙 | |
45대 하병옥 | 46~47대 정진 | 48~49대 오공태 | 50대 여건이 | 51대 김이중 |
1952년 4월부터 10월까진 의장단 체제였다.
- 박열 (1945~1949)
- 정한경[12] (1949)
- 조규훈 (1949~1950)
- 김재화 (1950~1951)
- 원심창[13] (1951~1952)
- 김광남 (1952)
- 김재화 (1952~1955/1958~1959)
- 정찬진 (1955~1958)
- 정인석 (1959~1960)
- 조영주[14] (1960~1961)
- 권일 (1961~1963/1964~1967)
- 김금석 (1963~1964)
- 이유천 (1967~1969)
- 이희원 (1969~1972)
- 윤달용 (1972(대리)/1974~1976)
- 김정주 (1972~1974)
- 조영주 (1976~1979)
- 장총명 (1979~1985)
- 박병헌 (1985~1991)
- 정해룡 (1991~1994)
- 신용상 (1994~2000)
- 김재숙 (2000~2006)
- 하병옥 (2006)
- 정진 (2006~2012)
- 오공태 (2012~2018)
- 여건이 (2018~2024)
- 김이중 (2024~)
5. 산하 단체
- 재일대한민국부인회
-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
- 재일본대한체육회
- 재일한국상공회의소
- 재일본대한민국청년회
- 재일본대한민국학생회
- 재일한국과학기술자협회
- 재일한국인법조포럼
- 학교법인 백두학원: 건국학교 운영.
- 학교법인 금강학원
- 학교법인 동경한국학원: 동경한국학교 운영.
- 학교법인 교토한국학원: 교토국제학원 운영.
6. 논란
조총련이 북한과의 연계로 인해 일본 공안당국의 중점 감시를 받았던 것과 다른 방식으로, 이들도 일본 공안당국의 감시 대상이었다. 앞서 말했듯, 일본 내 차별과 경제적 격차 문제로 인해 많은 이들이 야쿠자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또한 민단은 극우적 반공주의에 입각하여 조총련의 대항마로서 출범한 단체이기 때문에, 반 조총련 테러 활동에 지나치게 많은 역량을 쏟아붓던 시절도 있었다. 앞서 말했듯 한현우와 최서면을 비롯한 백의사 출신의 테러범들이 민단 초기부터 유입이 되었기 때문에, 이는 피할 수 없는 노선이었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조총련과의 투쟁 중, 직접 사무실에 쳐들어 가서 현피를 뜨는 일도 부지기수였고, 일본 내 재일 한국인들의 좌우합작 조직이었던 한민통(훗날 한통련이 되는) 사무실에 짱돌을 던지고 테러를 감행하는등, 여러모로 폭력적인 면을 많이 보였기 때문에 일종의 파시스트 단체로 언론에 알려진 시절도 있었다. 또 재일 한국인 출신 야쿠자들을 결집시켜 조총련을 견제하는데 쓰기도 하였다.
1950년대 말에는 조총련계의 재일 한국인 북한 이주 사업에 반대하여, 대한민국의 지원을 받아 니가타의 일본 적십자센터를 폭파하려 계획했다가 발각된 적도 있다. # 삼무사건에도 일부 관련이 있었다고 한다. 재일동포
친일인명사전에 올라간 박춘금이 1950년대에 도쿄 민단 중앙본부 고문을 맡은 적도 있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곽동희를 중심으로 민단 민주화를 시도했으나 이듬해 5.16 군사정변으로 권일 단장에게 제명당했다. 이후에도 군사정권 지지파와 민주화 세력이 대립하다 1971년 김재권 중앙정보부 공사의 '녹음테이프 사건'으로 두 세력이 또 대립한 뒤 민주파 인사들과 한국청년동맹, 한국학생동맹 등이 제명당했으며, 1978년에 한민련 및 한통련이 한국 대법원으로부터 반국가 단체로 판결받았다. 그 사이 민단은 더욱 보수화되어 본국의 정권이 바뀌고 민주화되어도 우익 입장은 오히려 공고해졌고, 2006년 2월에 취임한 하병옥 중앙단장이 서만술 조총련 의장과 5월 17일에 재일동포의 화해와 단결을 호소하는 공동성명을 냈으나 지방조직 등으로부터 반발을 사서 9월에 물러났고, 2007년에 제명당했다.[15]
또한 유신 시절 산하 단체 한청(재일한국인청년동맹)이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나서고 민단 중앙위원회 선거까지 도전하면서 당시 반공 일색이었던 민단에 문제를 제기하자 중앙정보부의 뒷공작을 수용하여 선거를 무산시켜 버리더니 한청을 산하 단체에서 축출하기도 했다. 이렇게 축출당한 한청 회원들은 최소 문민정부까지는 한국 입국이 불허되었다.[16]
1980년대만 해도 한국의 반공 드라마나 영화에서 선한 세력(물론 조총련은 악의 축)으로만 나오고 이런 흑역사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7. 기타
일본 내 위성방송 채널(SkyPerfecTV 계열)에 한국 프로그램을 수입, 방영하는 "KNTV(Korea Now TV)"[17]를 운영한 적이 있다. 뉴스데스크, PD수첩이나 미니시리즈 드라마 허준 등 주로 MBC 계열의 프로그램을 수입했지만(물론 다른 한국 지상파 프로그램도 수입했다) 2004년 NHK에서 겨울연가를 방영하며 초대박을 친 이후로 일본 내 한국 TV 프로그램의 수요가 늘어났고, 보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방영하게 되었다. 또한 자체적으로 뉴스를 제작하기도 했는데 민단 관련 소식을 주로 알려줬다.[18]또한 일본에서 재외선거하는 곳이 대사관(영사부)및 영사관 뿐만 아니라, 민단사무실 등 민단관련 시설이 지정되기도 한다.[19]
2024 파리 올림픽 메달리스트인 유도선수 허미미의 친할머니가 민단 부인회 지회장 등 간부를 역임했다고 한다. 허미미 선수의 할머니는 생전에 허미미 선수에게 한국 국가대표로 활동했으면 좋겠다는 유지(遺志)를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8. 관련 문서
[1] 간판의 글자는 '한국민단 오사카부 지방본부'이며 아래 걸려있는 표어는 "지역 주민인 재일 한국인에게 지방참정권을 (달라)"이다.[2] 물론 본국의 체급차이가 워낙 심하기 때문에 민단이 규모면에서 봐도 조총련 8만, 민단 45만명으로 한인 사회 내에서 민단의 영향력이 훨씬 크다.[3] 의외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박열을 포함하여 일제시대 아나키스트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은 해방 이후 대부분 대한민국 측에 섰다. 아나키스트 문서의 인물 목록 참조.[4] 2020년 12월말 현재:일본 법무성 자료[5] 1985년 성묘단 구성원 중 일부는 KBS2 <11시에 만납시다> 9월 30일 방영분에 출연했다.[6] 이 김용환의 동상은 국립극장 근처에 있다.[7] 조갑제는 반독재 언론인으로서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 반하는 취재 활동을 벌여왔다가 민주화 이후 박정희빠가 되었다. 지금도 극우 언론인 중 5.18을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하는 드문 인물이다.[8] 반대로 조총련에서도 우익성향 사람이 있다고 한다.[9] 그러나 조직과 별개로 회원 개인의 성향일 뿐이며, 일본 자민당에서도 역사 왜곡, 과거사 사과 등에 전향적인 온건파가 있듯이, 신좌파라고 모두가 친(남/북)한이라고 보는 건 곤란하다. 요는 결국 대한민국 정부와 통일에 대한 관점 및 방법론인데... 소위 민주정부 시절 민단의 태도를 보면 정부를 일관되게 지지하는 것도 맞는지 의문. 군대가 그렇듯 선택적 지지다.[10] 미국, 호주 등 타국의 지역 한인회 내에서도 독단적 운영 등으로 인하여 2010 LA 한인회장 선거 사태 등 한인회 내부 분열 사례가 발생하였으나, 민단은 엄연히 일본 전국에서 활동하는 조직이라 그 규모와 파급력이 지역 한인회에 비해 크다. 게다가, 2010년대 이후 민단은 내부 분규 등으로 인해 유권자등록 등을 한인 사회에서 적극적으로 독려하는 미국 미주한인유권자연대(KAGC)에 비하여 참정권 등을 통한 영향권 확대에 소극적인 행보를 보였다.[11] 윤덕민 당시 주일대사는 일본에 대한 저자세 외교로 대한민국에서도 원성을 듣고 있다.[12] 대한인국민회 창립멤버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위원을 역임했다.[13] 박열과 같은 무정부주의 성향 독립운동 조직 '흑우회'의 일원.[14] 극진공수도 창시자 최영의의 친구였다.[15] 자세한 내용은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3년 2월 23일 방영분, 2006년 시사저널 기사, 2007년 프레시안 '분단 그늘 속 재일교포 사회'(#1, #2, #3) 참고.[16] 공식적으로 언급된 입국 기사는 문재인 정부 시절이었지만 그 이전에도 입국은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17] 현재는 한국의 대형 연예기획사인 SM엔터테인먼트 계열이다.[18] 이 당시 뉴스 앵커를 맡았던 콧수염 아저씨가 민단 간부였다. 그 옆의 여성은 KNTV에서 채용한 전문 아나운서인데 일본어를 보고 뽑았는지 한국어 발음은 일반인 수준이었다.[19] 예: 우에노, 이케부쿠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