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훈장 동백장 수훈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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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鄭建永(1923년 ~ 2002년 9월 14일)재일교포 야쿠자, 사업가로 우익 야쿠자 조직인 토우세이카이 회장을 역임했다. 통명은 마치이 히사유키(町井久之). 흔히 긴자의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통했으며, 키 185cm에 몸무게 100kg의 거한[1]으로도 유명했다.
2. 젊은 시절
1923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네살 때 조선으로 돌아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와서 센슈대학에 입학했지만 얼마 안가 중퇴했다고 한다. 센슈대학 재학 시절 교토조선인학우회장이던 조영주를 만나 이때부터 동아연맹론을 신봉하게 되었고 이는 정건영이 우익운동에 몸담는 계기가 되었다.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민단 계열의 조선건국청년동맹 도쿄본부 부위원장이 되었고[2] 좌익 계열의 재일조선인연맹(약칭 조련, 조총련의 전신)과의 투쟁 전면에서 활동하였다. 그 무렵 해결사 업체와 흥행회사를 차려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일본에 진주해 있던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운영 자금 조달을 위하여 발행된 PD[3]를 일본 국적을 가진 사람이 만기 이전에 현금화 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일본 국적이 아니었던 정건영은 이를 이용해 PD를 취급하는 회사를 차려 그 시장에 유입된 암달러를 끌어들이며 막대한 이익을 거머쥐었다. 이를 바탕으로 정건영은 이른바 마치이 일가를 형성했고, 비록 중퇴했지만 대학물은 먹은 이른바 인텔리 야쿠자를 자처하며 세력을 넓혀갔다.
3. 본격적인 야쿠자 시절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정건영은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지만 이후로도 계속 일본에서 거주하며 활동하였고, 1957년에는 마치이 일가를 모체로 조총련에 맞서는 우익 단체를 표방한 야쿠자 조직 토우세이카이(東声会)를 결성하여 자신이 회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토우세이카이는 도쿄, 요코하마, 치바 등지에 지부를 설치하고 조직원 약 1,600명의 제법 큰 조직으로 급성장 했지만 다른 야쿠자 세력들이 연합하여 견제가 들어오면서 토우세이카이는 사면초가의 위기에 놓였고, 경찰의 단속으로 다수의 간부가 체포당하기도 했다. 1963년 안도 구미(安藤組)를 이끌던 하나가타 케이(花形敬)[4]를 살해하였다.[5]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건영은 1963년 일본 정치깡패계의 거물 코다마 요시오와 결탁하였고, 코다마의 주선으로 3대 야마구치구미 두목 다오카 카즈오(田岡一雄)와 사카즈키고토를 맺었다. 그 해 11월 9일, 도쿄회관 앞 길거리에서 토우세이카이 조직원이 사업가이자 정치 브로커인 다나카 세이겐(田中清玄)[6]을 총으로 저격하여 부상을 입힌 사건이 일어났고 경찰은 배후 인물로 정건영을 체포했지만 결국 혐의점을 찾지 못하여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1964년 2월, 경시청은 조직폭력범죄 단속본부를 설치하고 전국의 야쿠자 조직에 대한 일제 단속에 나섰다. 토우세이카이는 광역 10대 폭력단체로 지정되어 경찰의 강한 단속과 압박을 받은 끝에 정건영은 1966년 9월 1일, 토우세이카이의 해산을 선언하며 야쿠자 사회를 떠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는 경찰의 눈을 속이기 위한 표면적인 행동일 뿐이었다.
4. 사업가 시절
1967년 4월에 정건영은 토우세이카이를 기업 형태로 개편한 토아유아이사업조합(東亜友愛事業組合)를 설립하여 명예회장 직에 올라 야쿠자 계로 복귀했고 이후 토아상호기업(東亜相互企業, 이하 TSK)을 창립, 자신은 사장을 맡고 코다마 요시오를 회장으로 취임시켰다.TSK는 요릿집 등의 유흥업과 부관훼리 운항, 부동산 사업을 기반으로 하여 상당한 규모의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본격적인 사업가 활동을 시작한 정건영은 한국의 정재계 인물들과 친분을 쌓으며 재일 한국인 사회의 거물로 떠올랐고, 특히 대통령경호실장 박종규와는 호형호제 하는 아주 막역한 사이였다. 정건영은 박종규의 비호를 받으며 김포국제공항을 드나들 때 통관절차도 생략하는 VIP 대접을 받을 정도였다. 그리고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 시 정건영은 코다마 요시오와 함께 조직원들을 동원하여 일본을 방문한 한국 정치가들의 경호 업무를 맡으며 막후에서 지원했다.
1966년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었고 1968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으며, 1971년에는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중앙본부 고문으로 취임했다.
1970년대 초반 대한민국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킨 정인숙이 도쿄에서 생활할 때, 박종규 경호실장의 요청을 받아 정건영이 후견인 역할로 정인숙과 그녀의 아들을 돌봐주었다. 정건영은 그 댓가로 박종규에게 TSK가 한국외환은행 도쿄지점 에서 사업자금을 빌릴 수 있도록 부탁했고, 박종규의 지시로 외환은행 도쿄지점은 1968년 부터 TSK에 대한 대출을 개시했는데 이후 그 총액은 원금으로만 무려 100억엔을 넘어갔다고 한다(...).
정건영이 야심차게 건설한 TSK・CCC터미널 빌딩
1973년 7월, TSK는 외환은행 도쿄지점이 서준 약 60억엔의 지급 보증을 바탕으로 일본부동산은행에서 54억엔의 융자를 받아 이 중 33억엔은 나스 고원 및 시라카와 고원 관광지 개발에 투자하였고 나머지 21억엔은 롯폰기 소재 TSK・CCC터미널 빌딩[7] 건설 비용으로 썼다. TSK・CCC터미널 빌딩은 정건영이 표면적으로는 야쿠자 세계와 결별하고 건실한 사업가로서 새출발 한다는 징표였으며, 토우세이카이 조직원은 TSK・CCC터미널 빌딩에 입주한 TSK나 그 계열사 사무실에 출입하는 것이 금지되기도 했다.
5. 몰락 그리고 말년
그러나 1976년 정건영의 후견인 코다마 요시오가 록히드 사건에 연루되어 쇠고랑을 찼고, 시라카와 고원 개발 관련으로 같은 해 7월 TSK의 간부가 당시 후쿠시마현 지사 기무라 모리에 에게 5백만엔의 뇌물을 주었다는 혐의로 체포된 것에 이어 기무라 지사도 그 해 8월 체포 당하면서 정건영도 소환 조사를 받았다. 거기다 오일 쇼크 등으로 인한 경기 침체로 나스 고원과 시라카와 고원 개발사업은 무너지면서 TSK 재무구조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또한 외환은행 도쿄지점은 그 때까지 TSK에게 빌려준 100억엔 이상의 대출금을 떼이지 않으려고 울며 겨자먹기로 자금 지원을 이어갔지만, 이를 보다 못한 당시 재무부장관 김용환은 과감하게 칼을 빼들고 외환은행에 TSK에 대한 지원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김용환 장관은 1977년 4월 은행장 김봉은을 필두로 11명의 외환은행 임원 중 6명을 해임시키면서 외환은행 정상화 작업에 시동을 걸었다. 김용환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외환은행이 정건영의 TSK 유지를 위해 무려 한 달에 4억엔을 쏟아붓고 있는 것에 대하여 일본 정치권에서도 점점 문제화 되면서 이를 잘라내지 않으면 정권에 위협이 될 것이라 생각하여 대통령 박정희에게 직보하면서 재가를 받아낸 것이다. 박정희는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내며 촉망받던 40대의 젊은 경제관료인 김용환의 판단을 전적으로 믿고 그를 밀어주었다.[8]
김봉은의 후임으로 외환은행장에 취임한 김준성은 정건영이 운영하는 사업이 주로 유흥업이라 살릴 가치도 없다고 판단하여 정건영을 직접 찾아가 당신네 회사가 생산 업체라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면서 더는 지원할 수 없다며 통보했는데, 이는 김준성이 정건영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직접 정건영이 한국으로 와서 김용환 장관에게 쳐들어가 "당신 내가 누군지 아는가? 지금 뭘 잘 모르고 이러는 것 아니냐?"며 으름장을 놓았고, 박종규도 TSK의 부도만은 막아달라며 사정했지만 김용환은 단호하게 잘라버리며 자금 지원 중단을 고수하였다. 이로 인해 김용환은 정건영의 부하들에게 해코지를 당할까봐 한동안 일본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후일 김용환은 이 때를 회고하며 "만약 TSK 자금 지원을 계속했다면 도쿄지점 뿐 아니라 외환은행 전체가 위험했을 것이다"라고 자평한 바 있다.
결국 자금줄이 끊어진 TSK는 1977년 6월에 부도를 내면서 도산했고, 정건영은 롯폰기의 자택에 들어박혀 은둔 상태에 들어가며 바깥 활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이후 당뇨병과 심장질환이 발병한 정건영은 부관훼리 사업 외의 대외 활동을 거의 접다시피 하면서 투병에만 전념하다가, 2002년 9월 14일 도쿄 소재 병원에서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향년 79세.
6. 여담
- 같은 재일교포인 프로레슬러 역도산[9]과 친분이 깊어 토우세이카이에서 역도산의 경호를 맡기도 했다. 1963년 12월 8일, 도쿄의 나이트클럽 화장실에서 역도산이 야쿠자 조직원인 무라타 카츠시와 시비가 붙었다가 칼에 복부를 찔리는 부상을 입었는데, 무라타는 토우세이카이가 사카즈키고토를 맺은 야마구치구미의 경쟁 조직인 스미요시카이 소속이었다.[10] 결국 역도산은 며칠 후 자상으로 인한 복막염 발병으로 숨을 거두었고, 격분한 정건영은 스미요시카이 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조직원들을 집결시켰지만 야쿠자 원로들의 중재로 큰 사고 없이 휴전에 들어갔다.
-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예선전 당시 한국 대표팀과 일본 간의 경기는 홈 앤드 어웨이로 치러야 했지만, 당시 대통령 이승만의 철천지 원수 왜놈들이 우리 땅을 밟게 할 수 없다는 고집으로 두 경기 모두 일본에서 열기로 했다. 그런데 대표팀이 일본으로 건너가기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 큰 장애물 이었다. 이 때 정건영이 나서 대표팀의 일본 내 체재 및 교통비용을 부담한다는 조건을 내세워 당시 자유당의 실세이던 이기붕을 통하여 이승만의 허락을 얻었고, 정건영의 자비 뿐 아니라 역도산, 신격호 등 재일교포 유력 인사의 지원을 받아내어 한국 대표팀을 일본에 초청할 수 있었다. 한국은 일본을 1승 1무로 꺾고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 정건영은 박종규 외에 김종필, 정일권, 김형욱, 윤필용 등 박정희 정권의 실력자들과도 친분 관계를 가졌으며, 그들로부터 자신의 사업에 관한 적지않은 도움을 받기도 했다. 물론 정건영이 금전적 지원을 해 준것은 불문가지.
- 나름 체육인 이었는지라 1988 서울 올림픽 개최식에 초대받기도 했지만, 위에 언급한 관광지 개발 실패로 생긴 막대한 부채에 시달리던 정건영은 "빚을 다 갚기 전에는 조국에 갈 면목이 없다"며 거절하고 칩거 생활을 계속했다고 한다.
- 말년까지 칩거하면서도 부관페리 회장으로 사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정건영이 죽은 이후 지분상속 분할으로 인하여 최대 주주가 일본쪽 회사로 바뀌면서 한 때 논란이 일기도 했다.
7. 같이보기
[1] 당시 일본은 물론 160cm는 중키, 170cm는 장신 취급을 받던 한반도에서도 185cm 라면 굉장한 체격임에 틀림 없었다. 게다가 체중도 100kg 였으니 지금으로 치면 210cm 정도로 서장훈 이상 수준의 체격이라고 볼 수 있다.[2] 이때 같이 활동한 인물 중엔 조영주와 연이 있던 최배달도 있었다. 다만 최배달은 얼마 안가 민단에서 나와 평생을 무도가로만 활동한다.[3] 지금의 수표와 비슷한 지불 수단.[4] 만화 바키의 등장인물 하나야마 카오루의 모티브가 된 인물로 유명하다.[5] 원래 두목인 안도 노보루(安藤昇)가 요코이 히데키(横井英樹)로부터 채무를 받아 오라는 의뢰를 수행하기 위해 그와 만났는데, 요코이의 뻔뻔한 태도와 망언에 열받은 나머지 히트맨을 시켜 저격해버리는 바람에 체포되어 징역 8년형을 선고 받았다.[6] 그는 일본공산당 간부를 지낸 공산주의자 였지만 1934년 천황주의자로 전향하였고, 전후 정치 브로커로 활동하며 코다마와 경쟁 관계에 있었다.[7] 여기서 CCC는 Celebrity Choice Club의 약자이며, 6층 규모의 이 빌딩에는 TSK가 운영하는 고급 회원제 클럽과 레스토랑, 사무실 등이 입주하였다.[8] 별개의 일이지만, 유신정권 말기 자신의 성장 위주 정책과 동떨어진 안정론을 주장하던 경제정책의 수장 신현확 부총리를 못마땅해 한 박정희가 재무장관에서 물러난 후 영국으로 유학간 김용환을 다시 기용하려 한 적도 있다. 물론 10.26 사건이 터지며 무산되었지만.[9] 단 역도산은 일본으로 귀화한 반면 정건영은 대한민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었다.[10] 일설에는 스미요시카이가 야마구치구미와 토우세이카이에 경고할 목적으로 역도산에게 테러를 가한 것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즉 역도산은 야쿠자 조직 간의 세력다툼의 희생양이 된 셈이지만 어디까지나 카더라 이다...[11] 제4공화국에서는 김정일, 제5공화국은 이규동 역을 맡았다.태조 왕건에선 기훤 역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