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환 바우로 주교 관련 틀 | ||||||||||||||||||||||||||||||||||||||||||||||||||||||||||||||||||||||||||||||||||||||||||||||||||||||||||||||||||||||||||||||||||||||||||||||||||
|
'''초대 성공회 서울교구장''' | |||||||||
출생 | 1922년 4월 5일 | ||||||||
전라북도 정읍군 (現 전라북도 정읍시) | |||||||||
사망 | 2010년 3월 26일 20시 7분 경 (향년 87세) |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세브란스병원[3] | |||||||||
재임기간 | 초대 서울교구장 | ||||||||
1965년 5월 27일 ~ 1983년 11월 7일[4] | |||||||||
제10·12대 성 미카엘 신학원장 | |||||||||
1970년 8월 1일 ~ 1971년 11월 11일[제10대] | |||||||||
1977년 1월 26일 ~ 1979년 1월 31일[제12대] | |||||||||
제7대 재단법인 연세대학교 이사장 | |||||||||
1972년 9월 21일 ~ 1997년 2월 8일 | |||||||||
수상 | CBE 명예훈장 (1974) 국민훈장 동백장 (1985)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학력 | 성 미카엘 신학원 (성직과정 / 졸업) 캔터베리 중앙신학대학 | |||||||
종교 | 성공회 | ||||||||
가족 | 없음 | ||||||||
<colbgcolor=#871B4D><colcolor=#ffffff> 차부제서품 | 1948년 12월 19일 | ||||||||
서울대성당 알프레드 세실 쿠퍼 주교 주례 | |||||||||
부제서품 | 1952년 | ||||||||
아서 어니스트 차드웰 주교[7] 주례 | |||||||||
사제서품 | 1953년 5월 31일 | ||||||||
서울대성당 아서 어니스트 차드웰 주교 주례 | |||||||||
주교서품 및 교구장 승좌 | 1965년 5월 27일 | ||||||||
서울대성당 존 찰스 시드니 데일리 주교 주례 | }}}}}}}}} |
[clearfix]
1. 개요
"이 땅 위에 주의 나라를 건설하는데 있어 가장 쓸모 있고 주의 뜻에 알맞는 집을 짓는 것이 오늘 우리의 사명입니다."
최초의 한인 주교, 초대 서울교구장 이천환 바우로 주교
최초의 한인 주교, 한인 교구장이자 초대 성공회 서울교구장. 신명은 바우로이다.최초의 한인 주교, 초대 서울교구장 이천환 바우로 주교
2. 생애와 업적
1922년 정읍에서 출생한 이천환 주교는, 1952년 부제품을, 1953년 사제품을 받고 상주성당에서 사제 생활을 시작했다. 1956년에 교구장 존 데일리 주교와 선교사 신부들의 추천을 받아 2명의 동료 신부와 함께 영국으로 떠나, 1959년 캔터베리 중앙신학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했다. 귀국 직후부터 1961년까지 성 미카엘 신학교 교수로서, 1961년부터 주교 임명 직전까지는 수동성당 관할사제로 사목하였고, 1965년 마이클 램지 캔터베리 대주교의 명을 받들어 서울교구장이 되었다.서울교구장 승좌 당시는 한국인 사제 9명, 한국인 부제 1명이어서 여전히 선교사 신부들의 도움이 많이 필요했고, 서울이나 인천에서 사목한 경력도 없었기 때문에 주교 직무에 적응하는 데 애를 많이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천환 주교가 승좌하는 즈음에 천주교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마무리 단계로 가고 있었고, 개신교계에서도 WCC를 중심으로 한 교회일치운동이 한창이었다. 이천환 주교도 이 점을 목격, 타 교파 신자들에게도 과감히 교회의 문호를 개방하고, 천주교, 루터회 등과 교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등 교회일치운동에 동참했다. 이 유산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고교회주의'와 함께 대한성공회의 정체성으로 남아있다. 한국인 사제 양성을 적극 추진하여 1970년경부터는 한국인 성직자 수가 선교사 수보다 많아지게 되었고, 평신도들의 전도 활동도 적극 장려했다.[8] 이 주교의 노력으로, 서울교구의 교세는 서울과 인천 밖에서도 점차 확대되어 나갔다.
또한, 임기중에는 NCCK 회장, 대한기독교서회 이사장, 대한성서공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연합기구 운영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특히, 1972년부터 1997년까지 무려 25년간을 연세대학교 이사장으로 재임하며, 오늘날 연세대의 위상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무려 18년 6개월간 주교좌를 지킨 이천환 주교는 1983년 모종의 사건 때문에[9], 임기가 3년여 남아있었음에도 중도사임하고, 미국 버지니아 주에서 한인교회를 개척, 관할사제를 잠시 맡다가 귀국했다. 이천환 주교는 이후 모든 후배 주교들의 멘토로서 활약하다가, 2010년 3월 26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3. 여담
- 성공회 성직자는 천주교 성직자마냥 독신일 필요는 없지만, 이천환 주교는 전폭적인 사역을 위해 자발적으로 독신을 지켰다. 독신을 유지하는만큼 자기관리에도 철저해서, 예복은 칼각이 잡혀있고, 전례화에는 광이 났으며, 성체를 분배하는 손에서는 향이 나는 등, 늘 깔끔한 상태를 유지했다고 한다.
- 주교 서품 이후로 교회의 정치적 중립을 늘 강조하면서도, 정치권력의 횡포에는 적극적으로 맞섰다.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는 연극을 교구 소유의 세실극장에서 공연하게 하여 중앙정보부와 대립하기도 했고, 중앙정보부에서 재야 인사를 체포하러 오면 성당이나 빌딩 구석에 숨겨준 적도 있다고 한다.
- 서울교구장과 연세대 이사장직을 동시에 맡았던 당시, 연세대 신학과를 다니는 몇몇 신학생들이 이 주교에게 인사하러 오면, 인당 3만원[10]씩 돈봉투를 주며 공부 열심히 하라며 격려했다고 한다. 어떤 신부[11]는 신학생시절 인사 세번으로 9만원[12]을 챙겨 모두 책을 사는 데 썼고, 그 책들을 열심히 읽는 것으로 보답했다고 한다.
4. 둘러보기
| |||||||||
초대 서울교구장 이천환 바우로 주교 각하 | 1st Bishop of Seoul His Excellency Paul Lee Cheon-hwan |
역대 성공회 서울교구장 | ||||
초임[13] | ← | 초대 이천환 바우로 주교 | → | 제2대 김성수 시몬 주교 |
역대 성공회대학교 총장 | ||||
성 미카엘 신학원장 | ||||
제9대 최철희 윌리암 신부 | ← | 제10·12대 이천환 바우로 주교 | → | 서리 이근홍 누가 신부 |
제11대 이근홍 누가 신부 | ← | → | 제13대 윤환 바우로 신부 | |
역대 연세대학교 이사장 | ||||
제6대 최재유 | ← | 제7대 이천환 바우로 주교 | → | 제8대 방우영 |
[1] 대영제국 훈장 3등급. 영연방 국가의 국적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명예훈장을 받았다. 1974년 수훈.[2] 외국인이 받는 명예훈장이었기 때문에 Sir가 붙지 않는다고 여기 쓰여 있었으나, CBE는 3등급 훈장으로, 명예훈장이 아닌 정식훈장이라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Sir 칭호와 무관하다. 그런 서술이 성립하려면 CBE가 아닌 2등급 훈장 KBE를 받은 경우였어야 한다. Sir는 2등급 훈장에 준하는 서훈에 붙는 칭호이기 때문으로, Sir 칭호가 붙는 유명인들의 거의 전부는 훈장을 받은 뒤 공헌을 누적해 "Knight Bachelor"라는 서훈을 따로 받았기 때문에 Sir가 붙는 것이다.[3] 1560호 병실[4] 18년 5개월 12일[제10대] [제12대] [7] 당시 한국교구 보좌주교로서 피랍된 세실 쿠퍼 주교를 대신해 교구장 서리를 맡고 있었다.[8] 대표적으로, 서울의 도봉성당은 평신도 신학 공부모임의 참여인원이 늘어 본당으로까지 성장한 케이스다.[9] 명목상으로는 건강악화(당뇨)[10] 통계청, 「소비자물가조사」 상 물가상승률을 고려하여 2023년 기준으로 환산하면 약 119,000원이다.[11] 정철범[12] 통계청, 「소비자물가조사」 상 물가상승률을 고려하여 2023년 기준으로 환산하면 약 356,000원이다.[13] 마지막 한국교구장 존 데일리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