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시인 조지훈이 1952년에 발표한 시집 <풀잎 단장>에 수록되어 있는 시이다. 서정주의 <신부>와 같이 경북 영양 지방의 전설을 소재로 하고 있다. 시의 내용이 어려워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면 <신부>를 먼저 읽어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인 <신부>와 달리, <석문>은 버림받은 여자의 관점에서 시상이 전개된다.[1]2. 시 전문
석문 조지훈 당신의 손끝만 스쳐도 소리 없이 열릴 돌문이 있습니다. 뭇사람이 조바심치나 굳이 닫힌 이 돌문 안에는, 석벽 난간(石壁欄干) 열두 층계 위에 이제 검푸른 이끼가 앉았습니다. 당신이 오시는 날까지는, 길이 꺼지지 않을 촛불 한 자루도 간직하였습니다. 이는 당신의 그리운 얼굴이 이 희미한 불 앞에 어리울 때까지는, 천 년(千年)이 지나도 눈 감지 않을 저희 슬픈 영혼의 모습입니다. 길숨한 속눈썹에 항시 어리운 이 두어 방울 이슬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남긴 푸른 도포 자락으로 이 눈썹을 씻으랍니까? 두 볼은 옛날 그대로 복사꽃 빛이지만, 한숨에 절로 입술이 푸르러 감을 어찌합니까? 몇 만리 굽이치는 강물을 건너와 당신의 따슨 손길이 저의 목덜미를 어루만질 때, 그때야 저는 자취도 없이 한 줌 티끌로 사라지겠습니다. 어두운 밤 하늘 허공 중천(虛空中天)에 바람처럼 사라지는 저의 옷자락은, 눈물 어린 눈이 아니고는 보이지 못하오리다. 여기 돌문이 있습니다. 원한도 사무칠 양이면 지극한 정성에 열리지 않는 돌문이 있습니다. 당신이 오셔서 다시 천 년(千年)토록 앉아 기다리라고, 슬픈 비바람에 낡아 가는 돌문이 있습니다. |
3. 해제
<한국현대시 400선>에서는 이 시를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누었다. 우선, 첫 번째 단락에는 1연에서 3연까지가 해당되며, 자신의 인연인 '당신'에게서 버림받은 채 오랜 시간을 혼자서 기다리던 여인에게 쌓여온 한은 온갖 풍파를 겪은 돌문에 은유된다. 그리고 4연과 5연이 해당하는 두 번째 단락에서는 자신의 인연과 미래에 있을 지 모르는 만남을 가정하고 있다.먼저 1연에서는 이 시의 핵심 소재인 돌문(石門)이 등장한다. 이 돌문은 천 년이라는, '검푸른 이끼'가 쌓이고도 남을 긴 세월 동안 '당신'의 따스한 손길만을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 화자의 '당신'을 향한 사랑과 인내의 정도를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2연에서는 시적 화자가 천 년이라는 인고의 시간 동안 지켜온 자신의 인내와 정성을 확인하고 있다. 화자는 '당신'과 만나는 날까지는 '촛불 한 자루'조차 꺼뜨리지 않고 고이 간직할 것이고, 눈마저 감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를 표명하며 '당신'과의 재회가 그만큼이나 간절하다는 것을 피력하고 있다. 그리고 화자는 이 '촛불'을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 눈 감지 않을 자신의 모습에 비유한다. 그렇다면 이 말은 화자가 '당신'을 만난다면 눈을 감을 수 있다는 뜻이고, 시의 소재가 된 전설과 이후로 전개되는 시상의 내용을 생각해보면 의미심장한 발언이다.
화자의 감정이 점차 달아오르고 있는 것을 다음 3연에서 알아볼 수 있다. 지금까지 자신의 정절과 인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내내 소극적인 어투를 유지하던 모습과는 달리, 모든 문장에서 의문형 어미를 사용하여 화자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감정과 처지에 대해 한탄하고 있다. 자신을 기다리도록 한 '당신'에게, 자신이 그렇게 기다림으로써 얻게 된 한의 표상들에 대해 푸념하듯이 털어놓는 것이다. 그 표상으로는 화자의 속눈썹에 언제나 맺혀 있는 '두어 방울 이슬', '당신'이 떠나기 전에 남긴 '푸른 도포 자락', 한숨에 절로 '푸르러 가는 입술'이 있다. '이슬'과 '입술'은 오랜 인내의 시간 동안 화자에게 쌓여온 한(恨)을 시각화한 표상이고, '도포 자락'은 화자와 '당신'이 한순간이나마 함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인연의 상징이다.
전 연에서 자신의 한을 말로 토해낸 화자는 이제 미래에 다시 만날지 모르는 '당신'과의 재회를 상정한다. 4연에서 재회를 이루면 '한 줌 티끌'로 사라질 것임을 밝히는데, 그 순간을 바라보는 '당신'은 눈물을 흘리지 않기 힘들 것이라며 원망에 가까운 결심을 내뱉는다.
5연의 첫 부분은 다시 1연과 비슷하게 전개되는데, 갈수록 내용이 달라진다. 1연에서의 돌문은 '당신'의 손끝에만 닿아도 열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면, 5연의 돌문은 지극한 정성 끝에서도 결국 열리지 않을 것을 단언하고 있다. 천 년 동안이나 변하지 않았던 화자의 마음이 단 몇 문장을 내뱉는 것만으로 바뀌진 않을 테니, 여기서의 돌문은 1연의 그것과는 상징하는 바가 다르다고 추측할 수 있다. 게다가 화자는 '당신'이 이곳에 오게 되면, 이 문을 열기 위해 자신과 같이 천 년의 세월 동안 인고의 시간을 거칠 것이라는, 차라리 섬뜩한 저주에 가까운 말마저 퍼붓고 있다. 분명히 화자는 1연에서와 다른 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1연에서의 돌문은 기다림의 문으로, 당신이 오기만 하면 굳이 닫혀 있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당신과 재회하는 것만으로 열릴 것이다. 그러나, 5연에서 언급된 돌문은 恨과 원망의 문으로, 지금 시점에서 '당신'이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당신'을 향한 화자의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굳게 닫혀 있을 것임을, 그리고 화자가 사라짐으로서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둘 사이의 인연에 대한 후회와 한은 화자뿐만 아니라 신랑도 떠안게 되어 천 년이 되도록 지속될 것임을 암시한다.
4. 소재가 된 전설
이곳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설화인 만큼 결론이 한 가지가 아니다. 시의 내용과 대치되는 해피엔딩 버전도 있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여기에는 시의 내용과 같은 것만을 수록한다.옛날 일월산 아랫마을에 살던 황씨 처녀는 그녀를 좋아하던 마을의 두 총각 중에서 한 사람에게 시집을 갔다. 그런데 신혼 첫날 밤 자기 전에 신랑이 화장실을 다녀오는데, 신방 문에 칼 그림자가 비치는 것을 보았다. 이에 깜짝 놀란 신랑은 자신의 연적(戀敵)이 자기를 죽이려고 숨어 있는 것으로 알고, 그 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리 달아나 버렸다. 그러나 그 칼 그림자는 다름아닌 마당의 대나무 그림자가 문에 비친 것인데 어리석은 신랑이 오해를 한 것이다. 신부는 그런 사실도 모르고 원삼과 족두리도 벗지 못한 채[2] 신랑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다 결국 깊은 원한을 안고 죽었는데, 신랑이 이 일이 생각나 다시 이곳에 찾아왔을 때 그녀의 시신은 썩지 않고 첫날 밤 그대로 있는 것이었다. 신랑이 손을 어루만지자 비로소 그 시신은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이 사실을 알게 된 신랑은 자신이 오해했음을 깨닫고 신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일월산 부인당에 사당을 짓고 그곳으로 시신을 옮겨 그녀의 혼령을 위로하였다.
[1] 운문인 만큼 시점을 논하는 것이 어색할 수 있지만, 산문시의 특성상 그렇게 해석해도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2] 원삼과 족두리는 신혼 후에 신랑이 벗겨주어야 한다. 그런 이유로 신랑이 다시 찾아왔을 때까지 옷을 벗지 못했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