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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7 04:08:56

박서보

박서보의 주요 훈장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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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파일:문화금관.jpg
<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2021년
이름 박서보
분야 화가
금관문화훈장(1등급)
파일:문화은관.jpg
연도 2011년
이름 박서보
분야 화가
은관문화훈장(2등급)
파일:문화옥관.jpg
연도 1994년
이름 박서보
분야 화가
옥관문화훈장(4등급)
}}} ||
파일:박서보 화백.jpg
본명 박재홍 (朴在弘)
출생 1931년 11월 15일
경상북도 예천군
사망 2023년 10월 14일 (향년 91세)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홍익대학 문학부 (미술과[1] / 학사)
링크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경력3. 작품
3.1. 의사-앵포르멜3.2. 기하추상과 그 변주3.3. 초기 묘법3.4. 민족기록화3.5. 중기 묘법3.6. 후기 묘법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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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단색조 미술가.

현대 한국 미술계의 거장으로서, 한국 미술계를 단색화의 시대로 이끌어낸 주역으로 평가받는다.

1970년대 자기절제와 세련미를 보여준 대표 연작 '묘법'으로 유명하다.

2. 경력

3. 작품

파일:여인좌상55.jpg
여인좌상, 캔버스에 유채, 121 x 88cm, 1955.
파일:닭1956.jpg
닭, 박스지에 유채, 19.7 x 14cm, 1956.

3.1. 의사-앵포르멜

파일:회화57.jpg
繪畵 No.1-57, 캔버스에 유채, 95 x 82cm, 1957.
박서보는 조선미전-국전풍 구상 회화를 통해 대내외 활동을 전개하면서, 각각 구미 추상표현주의, 유럽 앵포르멜 미술을 참조한 《회화 No.1-57》(1957?), 《作品 No.18-59》(1959) 등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무렵 박서보는 김창열, 하인두 등과 반국전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1958년에 이르러 이들은 본격적으로 비구상화를 선보이고 비평가 이경성이 이를 “안 ・ 홀멜”(앵포르멜)로 지칭하면서 탈식민적 비평 시공이 창출되었다.[2]
파일:원형질62.jpg
原形質 No. 1-62, 캔버스에 유채 및 복합재료, 161×131cm, 1962.
1961년, 유네스코 산하 국제조형예술협회(IAA) 주최의 ‘세계청년미술가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한동안 프랑스에 체류할 수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이브 클랭의 작품과 피에르 레스타니(Pierre Restany)의 비평적 토대에서 누보 레알리슴 운동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그해 12월 귀국 후 “앙훠르멜은 포화상태”가 되었다고 논평하면서, 이듬해 10월에는 국립화랑도서관에서 ‘원형질전’을 열어 《원형질》 시리즈를 선보였다. 이 연작은 사실상 이브 클랭의 작업세계를 립오프한 것이나 다름 없었지만, 그는 그것을 여전히 한국 전쟁 체험을 통해 자생한 앵포르멜 미술 운동의 일환으로 자기개념화 했다.

3.2. 기하추상과 그 변주

파일:유전질68.jpg
遺傳質 No, 2-68, 캔버스에 유채, 131×131cm, 1968.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현대미술의 사조와 미학이 더 적극적으로 수입되자, 박서보는 1968년에 이르러 일본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서 개최된 '한국현대회화전'에 옵아트를 립오프하는 기하추상화 《유전질》 시리즈를 선보였다. 이는 서울의 도시개발 및 한국 앵포르멜 계파 운동의 쇠퇴와 맞물린 극적인 변화였고, 탈식민적 시공간의 미학적 몰이해가 전제되어 있다.
파일:유전질70.jpg
遺傳質 No, 7-69-70, 캔버스에 유채, 90.9×116.5cm, 1970.
그의 《유전질》 시리즈는 기하추상을 립오프 하는 데서 더 나아가(역으로) 근대인의 실루엣을 의사-옵아트적으로 재구성하는, 실존과 환영을 동시에 성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는 이를 “오프아트”(옵아트)로 정의하고 있는데, 계보적으로는 사물과 회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추상과 실재를 유희했던 시즈오카의 겐쇼쿠(幻觸) 그룹-이우환의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3.3. 초기 묘법

파일:묘법69.jpg
Ecriture(描法), No.6-69, 캔버스에 연필 및 유채, 91.6 x 69cm, 1969.

3.4. 민족기록화

파일:박서보 1976.jpg
설법으로 왜장을 감동시킨 사명당, 캔버스에 유채, 197 x 290.9cm, 1976.

3.5. 중기 묘법

파일:묘법89.jpg
Ecriture(描法), No.890503-3, 캔버스에 혼합 재료, 300.5 x 228cm, 1989.

3.6. 후기 묘법

파일:묘법22.jpg
Ecriture(描法), No.20220405, 세라믹에 아크릴, 91 x 74.5, 2022.

4. 기타



[1] 동양화 전공으로 입학했다가 2학년 때 서양화 전공으로 전과했다.[2] 당시 서구/구미의 형식 및 미학은 미군이나 일본 잡지를 통해 피상적으로 수입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 미술계에서 추상표현주의와 앵포르멜 경향은 동일한 것으로 혼용되었다. 게다가 다다-앵포르멜 경향의 피상적인 이해 탓에, 추상표현주의=앵포르멜 모방을 통한 계파 운동이 곧 반국전적 반예술-전위 운동 비스무리한 것으로 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