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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17:24

단색화

1. 개요2. 역사3. 여담

1. 개요

Dansaekhwa

한국의 모노크롬 페이팅을 '단색화(Dansaekhwa)'라고 부른다.

2. 역사

1950~60년대부터 이미 유럽과 미국의 화가들 사이에서 모노크롬 화풍의 그림이 유행했다. 특히 이브 클랭의 '청색 모노크롬', 색면 화가 마크 로스코와 바넷 뉴먼의 모노크롬은 유명하며, 신 다다이즘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흰색 회화(White Painting), 1951〉와 〈지워진 데쿠닝의 드로잉(Erased de Kooning Drawing), 1953〉 #, 치유와 평화를 주제로 작업한 아그네스 마틴 #, 낙서 모노크롬의 사이 톰블리 #, 미니멀리스트이자 추상표현주의 작가인 로버트 라이먼 # 등의 작가들이 활동했었다.

이에 뒤늦게 한국에서도 70년대 초 모노크롬 열풍이 불었는데, 이때 위에서 언급한 '아그네스 마틴', '사이 톰블리', '로버트 라우센버그', '로버트 라이먼' 등의 작품들과 매우 유사한 작품들이 쏟아졌다. 이 시기 활동했던 한국의 유명한 원로작가들의 작품을 살펴보더라도, 위의 네 사람의 특징을 조합한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 단색화 작가들은 "색채를 뛰어넘은 동아시아의 정신성[1]"이 서양의 모노크롬과 다른 점이라고 말하지만, '자연, 치유, 명상, 깨달음, 경건함' 등은 이미 앞선 4명의 화가들도 언급했던 말들이다.

또한 그들이 동아시아의 정신성이라고 말하는 '노장사상'의 주된 주장 중 하나가 '권력에서 멀어지라'는 것인데, 70년대 단색화 화가들 중 핵심멤버들 다수가 그 시대 미술계의 높은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국전 심사'나 '비엔날레 추천' 등을 통해 라인을 형성하고 미술계 권력을 좌지우지했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그들의 철학이 얼마나 빈곤한 것인지 새삼 생각하게 된다. 또한 그들 중 대다수가 군사정권의 민족기록화 사업에 참여하여서, '추상화가'의 타이틀을 가진 사람이 갑자기 '구상화'를 그리는 촌극을 벌였던 것을 생각한다면 과연 이것이 '노장사상과 관련이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2][3]

더욱이 노장사상을 뛰어넘어 "색채의 사용을 자제해 감정의 분출을 억제하고 단순 반복적인 붓질을 통해 무념무상의 초월적 정신세계를 지향한다."면서 "한국의 선비가 자기자신을 수양했던 '수신(修身)'의 정신을 담고 있다"고까지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수신'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서 제일 앞에 있는 말로서 '수신'을 하고 나서 '정치 참여'를 한다는 유교의 사상을 말하는 것이다.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유교의 정신이야말로 항상 민심을 생각하는 현실정치참여에 있는 것인데, 당시 군사정권 아래에 미술계의 큰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서는 얘기조차 하지 않았던 단색화 화가들이 '유교의 정신'이나 '선비'를 들먹이는 것은 동아시아 사상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있겠다.[4]

이들이 말하는 '단순 반복적인 붓질을 통한 무념무상의 초월적 정신'에서, 그 철학적 의미가 사라진다면 결론적으로 이 작품들은 단순 노가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사상의 빈곤, 작품과 삶의 불일치, 회화의 독창성 부족 등의 이유 때문에, 이들의 작품은 인스타용 그저 예쁜 벽지일 뿐이라고 놀림받기도 한다.

애초에 외국에서도 다수의 '미니멀리즘' 작가들이 '동아시아의 정신성'에 영향을 받아 작품활동을 하고 있었으므로, 새삼스레 한국의 단색화 작품들이 '동아시아의 정신성'을 말한다고 주장하더라도 서구에서는 이를 전혀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지 않다. 따라서 영미권에서는 한국 단색화(모노크롬) 작품을 단순히 미니멀리즘의 아류라고 보거나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인 현실이다.

3. 여담



[1] 자연과의 합일, 또는 자연에 순응하는 노장사상을 동아시아의 정신성이라고 주장한다.[2] 이 시기의 단색조 회화를 단순히 예술을 위한 예술이나 현실을 초월한 은자(隱者)의 아름다운 침묵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은 단색조 회화의 많은 화가들이 국가에 의해서 추진된 민족기록화 사업에 참여한 사실을 통해서 돌이켜볼 수 있다. 단색조 회화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박서보의 <묘법>이 구체적인 윤곽을 드러낸 1973년은 민족기록화 경제편이 완성된 해이기도 하다. 박서보는 평상시 상이한 여러 스타일을 동시에 시도한다는 말을 남기고 있지만, 추상과 구상의 양극단을 달리는 한 작가의 같은 해 두 작품을 보는 것은 한국의 근대화, 한국의 추상미술이 거쳐 온 모순적인 문화정치학의 이중구조를 여지없이 드러내 보인다. 자발적 참여가 아니었어도 이러한 대비가 가능한 것이 우리의 근대화였고 우리의 모더니즘이었다. (권영진(2010), "‘한국적 모더니즘’의 창안: 1970년대 단색조 회화", 《미술사학보》 35, p.85)[3] 소수의 몇몇 단색화 화가들만이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이 시기에 해외에 있었던 김환기, 이응노와 실제로 침묵으로 저항했던 윤형근 등만이 이 비판에서 자유롭다.[4] 물론 단색화 화가들 중에 자신의 삶으로 화가의 철학을 잘 보여주는 작가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작가는 매우 드물지만 있긴 하다. 대표적으로 윤형근이 그러한 작가인데, 문제는 윤형근을 방패삼아서 뒤에 그렇지 않은 작가들까지 그러한 철학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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