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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8 13:53:50

윤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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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근
尹亨根 | Yun Hyong-Keun
파일:윤형근 사진.jpg
출생 1928년 4월 12일
충청북도 청원군
사망 2007년 12월 28일 (향년 79세)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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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파평 윤씨 문정공파
직업 화가
경원대학교 교수 (1984~1992)
경원대학교 총장 (1990~1992)
학력 홍익대학교 (서양화 / 학사)
배우자 김영숙[1]

1. 개요2. 생애3. 작품4. 어록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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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화가. 생전에 말이 없어 ‘침묵의 화가’로 불렸다. 면포나 마포 위에 2~3개의 청다색 또는 검은색 기둥을 세운 그림으로 유명하다.

2. 생애

1928년 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청주에서 태어나, 서예와 사군자를 즐긴 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청주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해 잠시 은행원[2]으로 일하다가 화가가 되기 위해 1947년 서울대학교 미대에 입학하였으나, 미군정이 주도한 '국대안(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 반대' 시위에 참가했다가 제적당하였다. 1950년 6.25 전쟁 직후에는 대학시절 시위 전력으로 보도연맹에 끌려가 학살당할 위기를 간신히 모면하였다. 1954년 당시에 서울대 학장이던 '장발'이 시위 전력 있는 사람은 서울대 복학을 시켜주지 않아 김환기의 도움으로 홍익대 서양화과에 편입하여 대학을 졸업하였다. 졸업 후에 청주여고 교사가 됐지만, 4·19 이후 이승만 정권에 대해 쓴소리를 했다가 부당한 발령을 받고 사직한다. 1956년에는 전쟁 중 피란가지 않고 서울에 남아있었다는 명목으로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기도 했다. 1960년에는 김환기의 장녀 김영숙과 결혼하였다.

유신 체제가 한창이던 1973년에는 숙명여고 미술교사로 재직 중이었다. 하지만 당대 최고 권력자인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지원으로 부정 입학한 재벌가 딸의 비리를 따져 물었다가, 그가 즐겨 쓰던 '베레모'가 레닌의 것과 닮았다는 명목으로 '반공법 위반'으로 잡혀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이 때를 경험한 후 같은 해에 만 45세의 나이로 본격적인 작품 제작을 시작하였다. 조각가 최종태는 이 날을 회상하면서 “숙명사건이 아니었으면 윤형근 선생이 그림을 안 그렸을지도 몰라요. 그 사건 이후 10년의 유신 시절 동안에 윤형근의 그림이 만들어졌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 그의 작품에서는 밝은 색채가 아닌 전형적인 ‘검은’ 작품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 때 그려진 작품들은 나중에 그의 대표작이 된다. 수묵화의 농담에서 물감이 번지는 느낌을 두 개의 기둥으로 표현한 단색화가 바로 그것. 이는 하늘을 상징하는 파란색과 땅을 상징하는 암갈색을 혼합한 색인 '청다색'을 큰 붓으로 내려 그은 것이다. 내려 그은 두 기둥 사이에서 문이 생기는데, 이것을 '천지문(天地門)'이라고 이름지었다. 심연으로 빠져들어갈 듯한 묵빛이 여백과 대조를 이루며 묘한 한국적 정서를 이끌어낸다. 한국 전통 가옥이나 고목, 흙을 연상시키는 이미지 속에서 오랜 세월 억압당했던 그의 감정이 스며나온다.
“낙엽이 다 지고 나목의 숲속에 산비탈에 거목이 넘어져서 썩어가는 것을 봤다. 한쪽은 이미 흙이 되어가고 있었다. 분명히 그 빛깔은 흙 빛깔과 다름없었다. 그 나무가 쓰러진 것으로 보면 꽤 오랜 세월이 된 것 같았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숙연해졌다”
윤형근의 일기 중에서..

1974년 12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제2회 앙데빵당전’에 ‘다색과 청색 No.39’ 등을 출품했다. 이 때 한국을 방문한 조셉 러브(Joseph Love)가 이 작품들을 감명깊게 보고는 일본에 돌아가 도쿄화랑 야마모토 타카시(山本孝)에게 윤형근을 소개하였다. 이를 계기로 1977년 8월 도쿄센트럴미술관에서 열린 ‘한국현대미술단면전’에 출품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의 소식을 접했을 때는, 쓰러지는 인간 군상을 연상시키는 일련의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그 당시 작품들을 살펴보면, 쓰러진 기둥들이 검은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예술은 똥이여, 사람들이 픽픽 죽어가는데 예술이 다 뭐 말라죽은 거여”라고 한탄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한국을 떠나 프랑스로 간다.

1980년대 이후, 프랑스에서 제작된 후기 작품들은 그 전 작품들과 비교해 한층 간결해졌다. 특히 1991년 미니멀 아트의 대가인 도널드 저드(Donald Judd)와의 만남 이후로 윤형근의 작품들은 더욱더 극단적인 단순함을 추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림에서 어떤 단호한 확신마저 보이게 된다. 색채는 검은색의 미묘한 변주가 사라진 채 '순수한 검정'에 가깝고, 물감과 함께 섞었던 오일의 비율도 줄어들면서 화면은 건조해졌다. 형태와 색채, 과정과 결과가 더욱 엄격해지고 간결해지지만, 순수한 검은색 앞에서 관객은 왠지 모를 심연의 세계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그의 후기 작품들은 존재와 존재 간의 관계, 그리고 고독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생전에 그의 화풍이 '추사 김정희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의 그림을 보다보면, 고매한 인격의 자연스러운 발현으로 여겼던 옛 선비정신이 느껴지기도 한다.

오늘날 그의 작품은 테이트 모던과 시카고아트인스티튜드, 독일 로이틀링겐미술관 등에서 소장하고 있다.

3. 작품

4. 어록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피상적으로 표피가 알록달록하고 빛깔이 곱고 뭐 이런 게 아름답다고 난 생각 안해.
진리에 사는 것, 진리에 생명을 거는 거. 그게 인간이 가장 아름다운 거예요.
진실한 사람은 착하게 돼있고, 진실하고 착한 사람은 내면세계가 아름답게 되어있어.. 그것 뿐이예요.
'그림만 잘 그리면 됐지 그 사람 사생활은 어찌 돼도 좋다' 이렇게 볼지 몰라도
인간이 바로 서야.. 작품이란 그 사람의 흔적이니까 분신이니까 그대로 반영되는 거에요.
한 두장은 거짓말해서 이렇게 만들 수 있어도.. 쭉 계속하다 보면 그 사람의 품위가 나타나는 거예요.
가장 높은 품격을 가진 것이 가장 좋은 작품이 아닌가.. 난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국립현대미술관과의 인터뷰 중에서..

5. 여담


[1] 김환기의 장녀[2] 정확히는 미원금융조합에 서기로 입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