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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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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치과의학교(1922)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1929)









의학교(1899) 경성의학전문학교(1916)
경성제국대학(1924)
법관양성소(1895),
한성법학교(1909)
경성전수학교(1911) 경성법학전문학교(1922)
상공학교(1899), 농상공학교(1904),
공업전습소(1906)
경성공업전문학교(1916) 경성고등공업학교(1922) 경성공업전문학교(1944)
경성광산전문학교(1939)
농상공학교(1904),
농림학교(1906)
수원농림전문학교(1918) 수원고등농림학교(1922) 수원농림전문학교(1944)
동양협회전문학교 서울분교(1907),
동양협회식민전문학교 경성분교(1915)
동양협회경성전문학교(1918) 경성고등상업학교(1920) 경성경제전문학교(1944)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1914) 경성여자사범학교(1935)
한성사범학교(1895)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1911) 경성사범학교(1922)
조선약학강습소(1915) 조선약학교(1918) 경성약학전문학교(1930)

1. 개요2. 전사(前史)
2.1. 법관양성소
2.1.1. 경성법학전문학교 학과 편제(1946)
2.2. 한성사범학교
2.2.1. 경성사범학교 학과 편제(1946)2.2.2. 경성여자사범학교 학과 편제(1946)
2.3. 의학교
2.3.1. 제중원에서 대한의원으로 이어지는 역사2.3.2. 경성의학전문학교 학과 편제(1946)
2.4. 상공학교->농상공학교
2.4.1. 공업전습소
2.4.1.1. 경성공업전문학교 학과 편제(1946)2.4.1.2. 경성광산전문학교 학과 편제(1946)
2.4.2. 수원농림학교
2.4.2.1. 수원고농 반제운동 사건2.4.2.2. 수원농림전문학교 학과 편제(1946)
2.4.3. 동양협회전문학교 경성분교
2.4.3.1. 경성경제전문학교 학과 편제(1946)
2.5. 조선약학강습소
2.5.1. 서울약학대학 학과 편제(1950)
2.6. 경성치과의학교
2.6.1.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학과 편제(1946)
2.7. 경성제국대학2.8. 경성음악학교
2.8.1. 경성음악학교 학과 편제(1946)
3. 국대안 파동과 국립서울대학교의 설립
3.1. 국립서울대학교안과 국대안 파동3.2. 대학 설립 과정에서의 진통3.3. 국립서울대학교의 탄생
4. 개교기념일5. 국립서울대학교 → 서울대학교6. 관악캠퍼스 이전7. 법인화 이후8. 관련 문헌

1. 개요

서울대학교는 1946년 8월 미군정청에 의해 경성대학을 비롯한 9개 구제전문학교[1]를 합쳐 만들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학생과 교수들이 미 군정청의 계획에 반발하면서 소위 '국대안 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리고 1950년 사립 서울약학대학을 흡수하여 약학대학을 신설하였다.

주의할 점은, 해당 학부의 전신이라고 해서 현재와 같은 대학 기관인 것은 아니다. 일제강점기의 유일한 대학이었던 경성제국대학이 흡수 통합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구제전문학교서울대학교에 통합되면서 대학으로 승격한 것이다.

2. 전사(前史)

아래에는 각 전신학교의 역사를 간략히 설명한다. 설립 연도 순으로 정리되어 있다.

2.1. 법관양성소

1895년 법관양성소로 출발하였다. 서울대학교의 연원 중 가장 오래된 교육기관이다. 1909년 법학교로 개칭되었고, 합방 이후인 1911년에는 경성전수학교가 되었다. 이후 전문학교로 승격되었으며, 1922년에는 경성법학전문학교로 개칭하였다. 출발이 대한제국의 법관양성소였기 때문에 합방 후에도 한동안 조선인 학생들만 입학이 허용되었다. 전문학교로 승격되면서 이러한 제한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의전, 고상 등 타 전문학교에 비해 조선인 입학생의 비율이 많은 편이었다. 경성제대와 달리 경성법전 졸업생들은 법학 실무에 뛰어드는 경향이 강했다고 한다. 태평양전쟁 중인 1944년 법과계통 전문학교를 줄이고자 하는 총독부의 방침에 따라 폐지되었고 경성경제전문학교로 흡수되었다. 해방 후 1945년 동문들에 의해 경성법학전문학교로 복구되었으며, 독자적인 대학 승격을 준비하다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안에 의해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 서울대학교에서는 경성법학전문학교의 전신인 법관양성소의 설립년도인 1895년개학 연도로 삼고 있다.[2] 유명 졸업생으로 이준 열사와 함태영 전 부통령이 있다.

2.1.1. 경성법학전문학교 학과 편제(1946)

법관양성소(1895) → 법학교(1909) → 경성전수학교(1911) → 경성법학전문학교(1922) → 경성경제전문학교(1944) → 경성법학전문학교(1945) → 서울대학교 법과대학(1946)

예과/학부/전문부 운영(1946)

2.2. 한성사범학교

1895년 한성사범학교로 출발하였다. 합방 이후인 1911년에는 폐지되어 사범교육이 고등보통학교 소속 사범과로 이관되었다가, 1922년 다시 독립하여 경성사범학교가 되었다. 1935년에는 경성사범학교 여자과가 경성여자사범학교로 독립하였다. 원래 당시 학제상 사범학교는 오늘날의 사범대학과 달리 초등교원을 양성하는 기관이었으며 고등교육기관이 아닌 보통학교/소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진학할 수 있는 중등교육기관이었다. 이 시기 중등교원의 양성은 일본 본토에만 있는 고등사범학교나 일반 대학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러다 해방 직전인 1944년에 비로소 사범학교의 지위가 전문학교급으로 격상되었다. 해방 이후 경성사범학교를 비롯, 경성여자사범학교, 대구사범학교에서 독자적인 대학 승격을 시도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기존의 초등교원양성기관이 아닌, 중등교원양성기관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3] 해방 이후 1945년 경성사범학교와 경성여자사범학교가 각각 경성사범대학, 경성여자사범대학으로 개편되었다가 1946년 서울대학교에 흡수되어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이 되었다. 유명 출신인물로 소설가, 언론인 선우휘가 있다.

2.2.1. 경성사범학교 학과 편제(1946)

한성사범학교(1895) → 고등보통학교 사범과(1911) → 경성사범학교(1922) → 경성사범대학(1945) → 서울대학교 사범대학(1946)

예과/학부 운영(1946)

2.2.2. 경성여자사범학교 학과 편제(1946)

경성여자사범학교(1935) → 경성여자사범대학(1945) →서울대학교 사범대학(1946)

예과/학부/전문부 운영(1946)

2.3. 의학교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경성의학전문학교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1899년 3월에 공포된 「의학교관제」에 따라 의학교로 출발하였다. 내외과 및 각종 의술을 가르치고 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학부소관이며, 총리대신을 지낸 김홍집(金弘集)의 옛저택을 교사로 사용하였다. 1대 교장은 우리나라에 종두법을 도입한 지석영(池錫永)이다. 이후 1907년 의학교(및 부속병원)가 광제원, 대한적십자병원과 통합해 '대한의원'이 되었고, 의학교육은 대한의원 교육부(동년에 의육부(醫育部)로 개칭)에서 담당하였다. 1909년 의육부가 독립하여 대한의원 부속의학교가 되었다. 한일합방 직후인 1910년 대한의원이 중앙의원으로 잠시 바뀌었다가 곧 총독부로 이관되어 조선총독부의원이 되었고, 부속의학교는 이후 1911년 조선총독부의원 부속의학강습소가 되었다. 1916년 조선총독부의원 부속의학강습소가 구제전문학교로 승격, 경성의학전문학교가 되었다. 1920년대 초반, 조선교육령이 개정되면서 조선에도 대학 설립이 가능해지자, 경성의전을 대학으로 승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실제로 일본의 제국대학 설립 과정을 볼 때, 의학전문학교가 제국대학으로 발전하는 사례가 많았다.[4] 그러나 총독부는 기존의 경성의전을 그대로 두고, 새로 설립될 제국대학에 별도의 의학부를 설치하였다. 경성제국대학 설립 이후에도 꾸준한 대학 승격 운동이 있었으나 총독부는 일제 패망 때까지 식민지에 새로운 대학을 설치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 본토에도 의과대학, 의학전문학교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경성의전은 본토의 일본인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경성제대 의학부와는 사이가 좋지 않은 편이었다. 경성제대 의학부 설립 당시 상당수의 교직원을 경성의전에서 빼와서 충당한 데다 지원도 줄었다. 경성제대 의학부의 존재가 경성의전의 대학 승격을 막는 장애물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해방 후 1946년 경성제대 의학부와 통합되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이 되었지만, 이 과정에서도 가장 강력히 저항한 학교이기도 하며, 우여곡절 끝에 통합이 됐어도 의전 출신 재학생을 의학부 출신 재학생과 달리 전문부[5]로 취급하는 것을 두고 경성의전 측이 강력히 반발하여 한동안 진통이 있었다.[6]

2.3.1. 제중원에서 대한의원으로 이어지는 역사

제중원(광혜원)은 1885년 조선 정부가 미국인 의료선교사 호러스 뉴턴 알렌의 건의를 받아들여 근대화 정책의 일환으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현 외교통상부) 산하에 설치한 한국 최초의 근대 서양식 왕립병원이다. 따라서 제중원은 관립병원인 동시에 민간병원이라는 반관반민의 이원적 성격을 갖고 있었으며 이런 이유로 제중원의 적통을 두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이 대립하는 일이 있었다.[7]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서울대학교병원은 이에 따라서 제중원부터(즉, 1885년부터)를 자신의 역사로 설명하고 있다.

2.3.2. 경성의학전문학교 학과 편제(1946)

의학교(1899) → 대한의원 의육부(1907) → 대한의원 부속의학교(1909) → 조선총독부의원 부속의학교(1910) → 조선총독부의원 부속의학강습소(1911) → 경성의학전문학교(1916)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1946)

예과/학부/전문부 운영(1946)

2.4. 상공학교->농상공학교

1899년 상과와 공과로 이루어진 상공학교로 출발하였다. 1904년 농과가 추가되어 농상공학교로 개편되었다. 예과와 본과로 나뉘었으며 예과 1년, 본과 3년으로 운영되었다. 이는 대한제국 유일한 실업학교였다. 이후 1906년~1907년에 걸쳐 각 과가 모두 분리되어, 농과는 1906년 '농림학교'가 되었다가 1907년 수원으로 이전하며 수원농림학교가 되었고, 공과는 1907년 공업전습소가 되었다. 상과는 1907년 일본의 동양협회[8]가 세운 동양협회전문학교 경성분교가 되었다.

2.4.1. 공업전습소

1907년 개편된 공업전습소는 1912년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에 부속되어 중앙시험소 부속공업전습소가 되었다가, 1916년 총독부에 의해 전문학교로 승격, 경성고등공업학교가 되었다. 1939년 광산부문이 경성광산전문학교로 독립되었다. 1944년 경성공업전문학교로 개칭되었다. 서울대학교 통합 직전에는 토목과(1916), 염직과(1916), 응용화학과(1916), 응용화학과(1916), 건축과(1916), 전기과(1938), 기계과(1938), 전기통신과(1944), 전기화학과(1944) 등이 존재하였다.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설립 전까지 후에 분리되는 경성광산전문학교와 함께 유이한 공과계 고등교육기관이었다.[9] 유명 출신인물로 시인 이상이 있다.
2.4.1.1. 경성공업전문학교 학과 편제(1946)
상공학교(1899) → 농상공학교(1904) → 공업전습소(1907) → 경성고등공업학교(1916)・경성광산전문학교(1939) → 경성공업전문학교(1944) → 서울대학교 공과대학(1946)
2.4.1.2. 경성광산전문학교 학과 편제(1946)
경성광산전문학교(1939) → 서울대학교 공과대학(1946)
광산업이 호황을 맞이해 경성고등공업학교만으로 수요 충족이 어려워지자 설립했다. 당시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 지금의 노원구에 위치했다.

2.4.2. 수원농림학교

1906년 개편된 농림학교가 수원으로 이전, 1907년 수원농림학교가 되었다. 1910년 합방 직후 조선총독부 권업모범장에 부속되어 권업모범장 부속농림학교가 되었고, 1918년 총독부에 의해 전문학교로 승격, 수원농림전문학교가 되었다. 1922년에는 수원고등농림학교로 개칭되었다. 해방 직전인 1944년에는 다시 수원농림전문학교로 개칭되었다. 농상공학교 시절의 농과를 시작으로 각 학과가 분화하여, 서울대학교 통합 직전에는 농학과(1922), 임학과(1922), 수의축산과(1937), 농토목과(1942), 농화학과(1946)가 존재하였다.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으로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이 된 후에도 계속 수원에 있었는데, 이 때문에 서울로 캠퍼스를 이전하기 전까지 수원농대라는 약칭으로 통용되었다. 반면 서울'농대'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이 아닌, 서울농업대학[10]의 약칭이었다. 유명 출신인물로 정치인 장면, 경제학자 백남운이 있다.
2.4.2.1. 수원고농 반제운동 사건
수원고등농림학교는 일제 강점기 동안의 몇 차례의 항일반제운동사건의 초점에 놓인 바 있다. 이른바 수원고농 반제운동 사건으로 지목되는 사건이 세 차례가 있었는데, 1926년 수원고농 재학생과 동문들이 결성한 '개척사'라는 항일 비밀결사가 일경에 발각되어 관련자가 적발된 1차 수원고농 사건을 비롯하여, 1935년 7월 반제 독서회가 발단이 된 2차 수원고농 사건, 1941년의 교내 한글연구회 모임이 발단이 된 3차 수원고농 사건 등이 바로 그것이다. 현재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학생회는 전신인 수원고농 시절의 항일운동 전통을 기려 학생회 슬로건으로 "반제항전 일 세기 자랑찬 전통"을 사용하고 있다.
2.4.2.2. 수원농림전문학교 학과 편제(1946)
농상공학교(1904) → 수원농림학교(1907) → 수원농림전문학교(1918) → 수원고등농림학교(1922) → 수원농림전문학교(1944) → 서울대학교 농과대학(1946)

학부/전문부 운영(1946)

2.4.3. 동양협회전문학교 경성분교

1907년 개편된 동양협회전문학교 경성분교는 1915년 동양협회식민전문학교 경성분교로 개칭되었다. 1918년 일본 본토와 분리되어 동양협회경성전문학교가 되었으며, 1920년 동양협회와 분리되어 사립 경성상업학교가 되었다가, 이후 1922년 재정난으로 총독부에 이관되어 관립 경성고등상업학교가 되었다. 1944년에는 경성법학전문학교와 통합되며 경성경제전문학교로 개칭하였다가, 해방 이후 경성법학전문학교가 다시 분리되었다. 해방 이후 독자적으로 대학승격을 준비하였으나 국립서울대학교 설립 과정에서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 입시에서의 조선인 차별이 심한 편이었다고 한다. 유명 출신인물로 두산그룹 창립자 박두병, 고고학자 도유호가 있다. 당시의 학교부지에는 현재 서울사대부중, 서울사대부고가 위치하고 있다.
2.4.3.1. 경성경제전문학교 학과 편제(1946)
동양협회전문학교 경성분교(1907) → 동양협회경성전문학교(1918) → 경성상업학교(1920) → 경성고등상업학교(1922) → 경성경제전문학교(1944) → 서울대학교 상과대학(1946)

위치는 현재의 성북구 종암동에 있었다.

예과/학부/전문부 운영(1946)

다음은 1941년도 경성고등상업학교 교과과정이다.
수신, 일본학, 국사(일본사), 국어(일본어), 지나어(중국어), 영어, 상업통론, 은행 및 금융론, 화폐 및 외환론, 교통론, 보험총론 및 해상보험론, 부기(상업 및 은행), 원가계산, 회계학, 상업수학, 상품학, 상업지리, 상업문, 상업실천, 상업사, 주산, 경제원론, 통계학, 동양경제사정, 상업정책, 공업정책, 대륙경제정책, 재정학, 법학통론, 민법, 상법, 물리화학, 수학, 체조
신탁론, 해운, 육운 및 공운, 상품실험, 배급조직론, 물가론, 거래소론, 세관 및 창고론, 협동조합론, 상업경제서강독, 경제학사, 경기변동론, 경제통계론, 농업정책, 세계근세사, 중국최근사, 중국사회사정, 중국화폐금융론, 경제심리학, 사회학, 공학, 상사관계법, 국제법 및 어학

2.5. 조선약학강습소

서울대학교의 전신 대학 중 유일하게 국립서울대학교 설립 이후에 편입된 단과대학이다. 1915년 조선약학강습소로 출발하였다. 1918년 조선약학교로 개편, 1930년 경성약학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 해방 후 사립 서울약학대학으로 대학 인가를 받았다. 한국전쟁 중 약학인력 양성을 목적으로 서울대학교에 편입,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이 되었다. 서울대학교 설립 이후 편입된 유일한 전신이다.

위치는 처음에 종로 5가 탑골공원 인근의 관청 건물을 빌렸다가 이후 남대문 근처로 이주하였고, 최종적으로 총독부가 수여한 현 을지로 6가 일대의 2천평 부지에 정착하였다.

2.5.1. 서울약학대학 학과 편제(1950)

조선약학강습소(1915) → 조선약학교(1918) → 경성약학전문학교(1930) → 서울약학대학(1945) → 서울대학교 약학대학(1950)

2.6. 경성치과의학교

1922년 경성치과의학교로 출발하였다. 1929년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 당시 대학에 아직 치학부(치과대학)가 개설되지 않았고, 전문학교도 일본 본토에서조차 네 곳밖에 없었기 때문에 경성치의전의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해방 후 국립서울대학교 설립 과정에서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 서울대학교 설립 당시, 유일한 사립학교였다는 점이 특징.

2.6.1.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학과 편제(1946)

경성치과의학교(1922) →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1929) → 서울대학교 치과대학(1946)

2.7. 경성제국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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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에 개교한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의 제국대학이다. 해방 후인 1946년에 폐교되었고 다른 전문학교 및 중학교 등과 통합하여 현재의 서울대가 개교되었다.

2010년 이전에는 서울대학교측은 1946년을 개교년도로 삼고, 서울대가 1946년 폐교된 경성대학 등 10개의 학교를 통합하여 설립되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경성제대 출신 동문이나 세간의 인식 등을 보았을 때 경성제대가 서울대의 전신 중 하나임은 부정할 수 없다.

또한 기존의 서울대학교 입장과는 다른 서울대학교 측의 변화가 감지되고 있는데, 서울대학교 개교년도와 관련하여 2010년 서울대학교 평의원회는 1946년 서울대학교로 통합된 10곳 학교의 연원 중 가장 오래된 법관양성소와 한성사범학교의 개교년인 1895년을 시작점으로 하여 '1895년 개학(開學), 1946년 개교(開校)'의 입장을 택하였다. 이 경우 경성제국대학의 역사도 서울대학교의 역사로 자연스럽게 편입될 수 있다. 다만, 대외적으로는 경성제국대학의 적통을 주장하지 않고 역사에서 제외하기 때문에 1946년으로 이야기한다.

2.8. 경성음악학교

1945년 현제명이 설립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엄연히 성악, 기악, 작곡 등을 가르치는 음악실기학교인 콘서바토리(conservatory)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6년 서울대학교 설립 과정에서 예술대학 음악부로 편입, 해체되었다. 이같이 연구중심 종합대학교에 실기 교육을 담당하는 콘서바토리가 합병된 형태는 전 세계에서 의외로 자주 볼 수 있는데, 존스 홉킨스 대학교 산하 피바디 음악원, 신시내티 대학교 산하 컬리지-콘서바토리[11], 로체스터 대학교 산하 이스트만 음악대학 등등 종합대학과 연결된 많은 음악원 및 음악대학들이 음악과 관련된 학술연구를 진행하여 음악학사, 음악석사, 음악박사 학위를 수여한다.

2.8.1. 경성음악학교 학과 편제(1946)

경성음악학교(1945) → 서울대학교 예술대학(1946)

3. 국대안 파동과 국립서울대학교의 설립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 창설로 인해 경성대학을 비롯한 서울 근교의 관공립학교는 모두 발전적 해체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국대안 파동'이라 불리는 분규가 몇 달 동안 지속되었다. 이 무렵 조선 유일의 대학이었던 경성대학은 여러 단과대학, 학과로 분할되었고, 각 관공립학교 역시 서울대학교의 단과대학으로 승계되었다.

3.1. 국립서울대학교안과 국대안 파동

일제 패망 후, 전국 각지의 고등교육기관은 다시 학교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해방에 직면했을 때만 해도 일본인 교직원들은 일본이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는 자신들이 강의를 계속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들의 순진한 바람과 달리, 해방 직후부터 조선인 학자, 학생들에 의한 대학 접수가 시작되었다. 경성제국대학의 현판에 적힌 '제국'이 해방 다음 날인 8월 16일에 지워진 것은 이를 인상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경제학자 백남운, 물리학자 도상록 등 저명한 조선인 출신 학자들이 새로 출범한 경성대학의 교수진을 맡았다.

거의 대부분이 도쿄제국대학 출신이었고 일부 교토제국대학 출신 소수가 있었던 경성제국대학일본인 교수 전원은 1945년 10~11월에 걸쳐 미군정청 명령에 의해 공식적으로 퇴출되어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거의 대부분의 교수진이 공석이 되었다. 이들의 자리는 대부분 여러 제국대학 출신 조선인들로 채워졌으며 제도적으로도 미국식 학제로 바뀌었다. 조선인 교수들은 9월부터 채워지기 시작했고 특히 의학부의 경우 윤일선(훗날 서울대학교 총장을 지냄.)의 경우와 같이 경성제국대학과 그 부속병원의 조선인 조수들이 교수직을 그대로 물려받은 경향이 짙었다. 법문학부의 경우는 조선인 조수가 일본인에 비해 소수였으며 대부분은 경성제대 대학원에 계속 남아있지 않고 졸업 후 관료/법관(법학부) 및 전문학교/중학교 교원(문학부)으로 나가있었기 때문에 찾아서 모셔와야 했다.

미군정청은 1945년 10월 경성대학의 총장과 학부장을 임명하여 학부 수업을 재개하기에 앞서 학무국을 통해 9월부터 접촉한 유진오, 조윤제, 백낙준, 백남운, 이병도 5인으로 하여금 교수 인선을 담당하게 하여[12] 12월에 한국학자 27명을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 조교수로 임명하였다. 교원 리스트는 경성제국대학 문서의 '인적 교체' 항목 참조.

그러나 조선인 교수회에 의한 교수 초빙 및 교수 자치는 일제가 물러난 조선의 행정을 담당하게 된 미군정과 마찰을 빚었다. 그 엄혹했던 일제강점기 말기에도 학원 자치를 누린 제국대학 출신 교원들은 미군정의 간섭을 아주 불편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미군정 입장에서는 막 전쟁이 끝난 상황에서도 패전국의 군정청의 명령을 거부하고 일본식 시스템을 유지하려는 경성대학 교수진을 용납하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학장 임명을 둘러싼 갈등구 교내 미군 부대 주둔으로 인한 소란 등으로 인해 1945년에는 제대로 된 학사 운영이 이뤄지지 못했다. 어쨌든 이 해 경성대학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경성대학' 졸업생을 배출하고 새 예과생을 모집하였다. 구제고등학교 학생, 구제 제국대학 학생, 구제 관립대학, 공립대학 및 와세다 게이오 등 사립대학 학생들 그리고 구제전문학교 학생들은 신,편입학으로 예과 및 본과에 들어갔다.

이듬해(1946년) 2월 10일, 당시 조선 유일의 대학이었던 경성대학은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법문학부를 개강했다.[13] 경성대학 외에도 다른 관공립, 사립 전문학교도 개강을 했다. 이들은 개강과 동시에 일정 시기 이루지 못했던 대학 승격 작업을 준비했다.
건국동량의 요람, 대학으로 승격되는 24 남자대학(동아일보, 1946.05.20)

우리 육영계의 반가운 소식은 9월 신학기부터 28개 관공 남녀 사립전문학교가 대학으로 승격되므로 더 한층 빛을 발하고 있다. 이리하여 문과계통은 4년제 대학으로, 자연과학 계통은 6년제 대학으로 이름을 고치는 동시에, 내용 충실을 도모하고 있다. 이리하여 새로 나타나게 되는 대학은 서울대학을 제외하고 관공립전문학교가 대학으로 된 것이 14교, 민립대학이 9교이고, 여자대학만도 이화대학을 비롯하여 여자사범, 여자의과, 숙명여자대학 등 5교나 된다. 그리고 입학시험은 제1기로 7월 1일부터 4일 간, 제2기로 7월 13일부터 4일 간 각기 모집하는데 금년 은 기왕에 이 학교 저 학교 시험 치던 폐단까지 없이 하고, 다만 두 번만 수험할 수 있게 하는 제도를 제정하여 학도의 불타는 연학의 좁은 길을 열어주기로 하였다.

이미 결정된 대학 중에 가장 그 이름부터 특이한 학교는 보성전문이 고려대학이라 한 것이고, 그밖에는 대개 전 교명을 단과대학으로만 고쳤다. 연희전문은 종합대학으로, 중앙전문은 중앙여자대학으로 각각 승격준비를 하는 등 각 학교는 아연 활기를 띄우고 있는 터이다.

이제 각 대학의 시험기일 모집인원 등을 조사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제1기 시험(7월 1일/4일)
경성대학(전 성대) 예과 문과 120명(국사/한문) 이과갑 160명(화학/물리) 이과을12명(화학/생물)
고려대학 예과(전 보전) 법과 경제과 문과 각 100명 문과 2년 보결 약 60명
경성의과대학(전 경성의전) 동 예과 100명(물리화학) 전문부 100명(동일)
승격준비중인 학교
대구농업대학(전 대구농전)
광주의과대학(전 광주의전)
경성광산대학(경성광전)
대구사범대학(대구사범)
경성여자의과대학(경성여자의전)
숙명여자대학(숙전)
경성약학대학(약전)

제2기시험(7월7일/13일)
세브란스의과대학(전 세의전) 대학예과 100명(물리/화학/생물) 전문부 80명(동일)
연희종합대학 문과 예과 정치과예과 경제과예과 외교과예과 수리과예과
경성사범대학(전 경사) 동예과 문과 150명 이과 150명 동학부 교육과 국문과 사학과 영문과 체육과(이상 각 40명)
경성여자사범대학(전 여사) 국문과예과 영문과예과 역사과예과 교육과예과 가사과예과 미술과(신설준비) 이상 각과 50명
경성경제대학(전 고상) 예과 100명 전문부 200명 동 각학년 보결생 약간
경성치과대학(전 치전) 예과 전문부
이화대학(전 이전) 문과예과 음악과예과 가사과예과 미술과예과 보육과예과 약학과예과 의학과예과(각 모집인원 미정)
승격준비중인 학교
수원농림대학(수원고농)
대구의과대학(대구의전)
경성공과대학(경성고공)
부산수산대학(부산수산전문)
혜화대학(혜화전문)

그러나 이 무렵 미 군정에서는 각종 관공립학교를 통폐합, 하나의 종합대학을 설립하겠다는 국립대학안을 기획하였다. 초기에는 법문학부, 의학부, 이공학부, 세 학부(단과대학)으로 구성된 경성대학에 농학부, 교육학부 등을 추가하고 법학부와 문학부를 분리하여 종합대학을 만들자는 안이 제기되었다. 이 안에 따르면, 경성대학 외의 법학전문, 경제전문, 의학전문 등의 각 전문학교는 개별 단과대학으로 독립하여 발전하게 된다. 일본의 사례를 생각하면 된다. 관공립 전문학교로 출발한 도쿄고등상업학교, 도쿄고등사범학교, 도쿄고등공업학교 등은 도쿄대학과 별도로 각기 도쿄상과대학(히토쓰바시대학), 도쿄교육대학(쓰쿠바대학), 도쿄공업대학 등으로 발전하였다. 결과만 놓자면 이 안은 폐기되었다. 경성대학을 비롯한 서울 근교의 모든 관공립학교를 통폐합하여 종합대학인 국립서울대학교를 설립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국립서울대학교안'이 채택되었다.[14]
최고학부를 통합개편, 9월 신학기부터 실시. (동아일보, 1946.07.14)

교육균등의 새로운 이념 아래 문교부에서는 앞서 제정한 신 교육제도에 마쳐, 기왕의 서울대학과 도내의 각종 관립전문(예외로 치과의전도 포함)학교를 통틀어 종합대학인 국립 서울대학교로 기구와 내용을 고쳐 9월 신학기부터 새로운 출발을 짓게 되었다.
즉, 새로운 대학 제도는 국립대학교의 총칭 아래 문리과/사범/법과/상과/공과/의과/치과/농과/예술과 등 9개의 단과대학과 한 개의 대학원을 두어 유기적인 연락 밑에 운영되는 것이다.
이는 9월 신학기부터 실시되는데 현존한 서울대학은 물론 각종 전문학교는 시설이 그대로 이관되는 동시에, 종전의 전문은 전문으로서, 신입생만은 신제도에 의하여 교육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단과대학은 대략 다음과 같이 개편되며, 지금 문제되어 있는 서울대학[15] 의학부, 경성의전 합병문제도 합병이 아니라 기구의 개편으로 해석된다고 할 것이다.
-9개 단과대학명=
문리과대학(경대 예과와 경대 문학부, 이공학부의 일부가 주체)
사범대학(경사와 경여사)
법과대학(법전)
상과대학(경제전문)
공과대학(고공과 광전 일부)
의과대학(경대 의학부와 경의전)
치과대학(사립 경성치전)
농과대학(수원농전)
예술대학(신설로서 미술과 음악을 전공) 등 9종이다.

국대안에 대해서는 1946년 6월 말부터 일부 언론에 의해 그 윤곽이 보도된 바 있었으나, 각 대학은 그에 대하여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입시를 진행 중인 상황이었다. 미군정의 국대안 발표는 여전히 각 대학에 있어 급작스러운 것이었다.
각 전문대학 입학지원(자유신문, 1946.07.03)

배우자하여도 배움의 터가 없어 눈물을 머금고 있던 우리나라 청년학도들은 해방과 함께 그 향학열을 높을대로 높아져서 입학시험을 앞둔 시내 각 전문 대학에는 매일 같이 지원자가 쇄도하고 있는데 특히 고려대학 예과, 경대 예과 등은 13대 1이라는 비율을 보이고 있어 여전히 시험지옥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감이 난다.
다음 각 학교의 지원자수와 장마로 원서접수기일을 연기한 학교를 보면 다음과 같다.

경성대학 법문학부(모집인원 지원자수 순)
경제과 약간명 150
정치과 상동 88
법학과 약간명 110
문학과 상동 60
철학과 약간명 40
사학과 상동 20

경성대학 의학부(모집인원 지원자수 순)
1학년 60 40
2학년 약간명 2
3학년 상동 2
4학년 상동 1

경성대학 이공학부(모집인원 지원자수 순)
약간명 200(단 예과출신을 제외)

경성대학 예과(모집인원 지원자수 순)
문과 120 1612
이과갑 160 1328
이과을 120 528

고려대학 예과(보전)(모집인원 지원자수 순)
예과 200 2670
학부 100

(후략)

3.2. 대학 설립 과정에서의 진통

국대안의 대상이 되는 모든 기관에서 거센 반발이 일었다. 특히 경성대학 의학부와 경성의전과의 합병 문제가 가장 진통을 겪었다. 양 교 모두 교직원과 학생 가릴 것 없이 격렬한 반대가 있었다. 역설적으로 다른 단과대학과 달리, 경성대학 의학부와 경성의전은 경성대학 설립 이전부터 합병이 거론될 만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경대 의학부와 의전 합동(동아일보, 1946.07.08)

경성대학 의학부와 경성의학전문학교의 합동문제에 대하여 그 귀치가 자못 주목되어 오는 바, 군정청 문교부 군정관 부리-핏탠가 중좌는 5일부 편지로서 경성대학의 학부 학생에게 회답을 보내어 합동의 부득이한 조치를 표명하였다. 이 회담 내용에 의하면 현재 경성의전은 그 설비에 비하여 많은 편인데 비하여, 대학의 설비는 학생 수에 비하여 병원과 학교 설비에 여유가 있으므로 합동하면 분리되어 있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며 또한 합동은 신학기부터 실시될 것이라 한다.이러한 회답을 받은 동 의학부 학생 일동은 7일에 제2호 성명서를 내어 합동안이 타당치 않음을 지적하여 합동안을 철회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합동은 소멸을 의미-경의전 교직원회서 성명(동아일보, 1946.07.12)

방금 군정청 문교부에서는 경성대학 의학부와 경성의전을 합동할 방침을 세우고 있다 하는데, 경성의전에서는 이에 순응할 수 없다고 지난 10일 하오 6시부터 동 병원 신강당에서 교장 심호섭 씨, 원장 백인제 씨 이하 교직원회를 열고 대략 다음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성명서: 우리 학교는 이미 광무 3년 우리나라가 일본의 침략을 받기 전부터 국립의학교로 창립되었고, 그동안 양으로나 질로나 우리 민족 보건에 공헌한 바가 크고 많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교수진으로 보거나 교직원의 향햑열과 상호 화합의 공기를 보거나 울 학교는 가장 우수한 학원으로 자부하는 바이고 우리들은 경성의전의 발전에 대한 권리와 의무를 느끼는 바이다.(중략) 진구한 교사는 그나마 소실되고 병원은 협작해서 해방 조선의 화급한 요구의 하나인 의육의 중책의 완성을 기하기에는 절대적 골난을 느끼는 바이므로, 필요한 시설을 문교당국에 요구했을 따름이고, 역사 깊은 우리 학원의 소멸을 의미하는 합동설을 인정할 위사는 위로는 교수진으로부터 밑으로는 학생에 이르기까지 추호도 없을 뿐 아니라, 타 학원의 발전을 해하고자 한 사실은 물론, 그러한 생각조차 없음을 성명하는 바이다. 7월 10일 경성의전 교수직원 일동
대학안에 반대, 경대 학생회서 성명(동아일보, 1946.07.25)

경성의전과 서울대학 의학부 합동문제가 나자, 서울대학에서는 반대운동을 계속하여 오던 중 지난 13일 국립서울대학교안이 발포된 후, 다시 2차나 학생대회를 열고 이에 반대 운동을 23일에 재차 다음과 같은 반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하나, 11교를 1개의 종합대학으로 통합하여 관선 이사회로서 통제지배하려 함은 학원의 자주권을 탈취하고 학원의 민주화를 유린하는 것
하나, 학교 수가 감소되고 불가피적으로 학생 수의 감소를 초래하는 것
하나, 경제학부와 정치학부의 폐쇄와 이공학 계통의 축소는 조선과학발전에 장해를 가져오는 것.

우여곡절 끝에 통합은 되었으나, 한동안 각 대학은 내홍을 겪었다. 이 시기 일련의 국대안 반대 운동을 흔히 '국대안 파동'이라 한다. 국대안 파동은 교수자치와 관권개입의 측면에서 이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16]부터, 좌우익의 대립, 미국식 자유주의 교육제도와 일본식 교육제도의 충돌이 원인이라는 관점[17]까지 여전히 해석이 분분하다.
사대생들 건의맹휴(경향신문, 1946.10.13)

서울 사범대학 학생 일동은 국립대학안에 대하여 11일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요구 조건을 들어 맹휴를 단행하는 동시에 학교당국의 긴급선후책을 요망하였다 한다.
하나, 교육자, 학자, 문화인, 기타 각계 명사로서 민주주의적인 가칭 "국대안 심의기관"을 설치하여 그 모순점(이사회, 학생처 등)을 해결시킬 것
둘, 학내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완전보장하는 학생 자치권을 승인할 것
셋, 학내 경찰 간섭을 절대반대하며 이에 관하여 학장은 전 책임을 질 것
넷, 이상 요구조건을 완전 해결하지 못한 시에는 학장은 인책 사임할 것
"학사호"문제로 학생이 교수 구타(동아일보, 1947.07.05)

서울국립대학교의 의과대학 내의 전문부 일부 학생들은 졸업한 뒤의 '학사호'문제로 말미암아 지난 2일 1학년 말 시험이 끝난 뒤, 허규 씨 등 교수 2명을 구타하는 동시에 학교 건물을 파괴하고 학장 주택을 습격하였는데, 학교 당국에서는 8명을 퇴학시키고 169명을 정학에 처하였다.
즉, 전 경의전 계열의 학생들은 벌써부터 학교 당국에 자기들이 학습하고 있는 강의과목과 교수는 의학부 학생(전 성대)이 학습하고 있는 과목과 동일한데도 불구하고 학부 출신자들은 졸업 후 학사호를 달게 되나, 자기네들은 학사호를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여 수차에 걸쳐 동일한 대우를 해주도록 요청하는 동시에, 예과과목에 대한 자격시험을 실행하여 합격된 의전 출신자에 대해서만이라도 학사호를 수여할 것을 당국에 요청하였으나, 국대 총장은 지난 28일 의학부 출신과 같은 자격을 요구하는 자는 문리과대학에 가서 2년 간 더 수업을 하라는 지시가 의전부 학생들에게 전달되었는데 이에 분격하여 지난 2일 드디어 수 명의 교수를 구타하는 동시에, 학교 건물과 설비 등을 파괴학 오후에는 학장 심호섭 씨 댁을 습격하였으며, 그 다음날인 3일에는 의과대학 사무장 댁까지를 습격한 것이다.
"경성대학 이공학부 교수단, 경성대학전교수회, 조선교육자협회, 전국교육자협회 등 교수단체와 사회단체도 동조하며 '국대안' 철회를 요구하였고, 학생들도 등록거부, 맹휴[18] 투쟁을 전개해 나갔으며, 미군정과 문교당국은 정학, 퇴학처분, 휴교령, 교수 파면으로 맞서면서'국대안'반대투쟁은 장기화되었다. 결국 맹휴 학교가 57개교, 맹휴 인원이 연 4만 명에 달하였고, 9개 대학 8,040명의 학생 중 4,956명이 제명당했으며, 9개 대학 429명의 교수 중 380여명의 교수와 강사진이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이희수,<미군정기 최대의 교육운동, 국대안 반대운동>, '우리교육' 통권 9호, 1990, p123

특기할 만 한 점은 이 시기 많은 좌익계열 학자들이 경성대학을 떠났다는 것이다. 백남운, 리승기, 도상록 등은 월북하여 이북의 새로운 종합대학 설립을 주도하였다. 국문학자 김태준처럼 남로당 활동으로 인해 처형당한 이도 있었다. 북행을 하거나, 이 시기 국립대학 안에 반대한 학자 중 다수가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한 제국대학 인맥으로 얽힌 사이라는 것도 재미있는 사실이다. 초기 김일성대학의 창립에는 경성제대, 도쿄제대, 교토제대, 규슈제대 등 다양한 제국대학 출신 학자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들의 공백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는 제국대학의 후신이라고 자주 언급되는 국립 서울대학교의 초창기가 경성제대 출신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일본 사학 출신의 리버럴한 학자들의 영향 하에 있었다는 것과 대비된다. 어쨌든 이후 적지 않은 수의 학내 구성원들이 경성대학과 국립서울대학교를 떠났다. 좌익 계열의 교수 또는 학생들 중에는 북한 행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밖에 낙향을 선택하거나 군 입대를 하기도 했다.

한편 김종필남덕우가 국대안에 반대하여 서울대 사범대를 퇴학, 또는 중퇴했다는 증언이 있었으나, 본인들을 이를 철저히 부정하였다. 김종필은 훗날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기자) 서울사대 중퇴 후 서울대의 국립대학안을 반대하다 피신 차원에서 사병입대했다는 소문이 있다."

"(김종필) 완전히 연기도 안나는 소문이다. 나는 사실 국대안을 찬성했다. 경성사범학교가 승격되는데 왜 반대하겠는가. 3학년때 아버지가 돌아가신뒤 집안이 급격하게 기울었다. 당시 소형 자동차까지 타고 학교에 다닐 정도였는데 집안이 어려워지자 이제 내 힘으로 앞길을 열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파고다 공원앞 모병소에 원서를 냈다. 그리고 신설부대인 13연대로 들어갔다 두들겨맞고 탈영한 뒤 양심의 가책을 느껴 다시 들어가기도 했다."#[19]

남덕우 역시 본인이 집필한 회고록 '경제개발의 길목에서'에서 본인이 '해방 당시 을지로에서 프린트사를 운영하다가 이듬해 국민대학관(국민대학교 전신) 학생 모집 공고를 보고 정경학과에 입학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국대안 파동 당시 국대안을 반대했다고 증언하는 것은 해방 직후에 자신이 좌익 활동을 했다고 말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므로, 설령 학생 시절 국대안에 반대했다고 하더라도 이를 솔직하게 증언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지점이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당시 주한미국대사관에서 근무하던 외교관인 그레고리 헨더슨[20][21], 그리고 김종필과 5.16 쿠데타를 주동했던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은 '김종필은 국대안 파동 당시에 좌익 활동을 했으며,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퇴학 처분을 받고 낙향했다'고 입을 모아 분명히 증언한 바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김종필/일생 항목 참조.
"그러나 국대안이 강행되며 생겨난 서울대학교는 한동안 보수적 교수들의 아성이라고 비판받기도 했다."

이희수, <미군정기 최대의 교육운동, 국대안 반대운동>, '우리교육' 통권 9호, 1990
"국대안 반대 운동의 중심 세력을 이룬 유능한 제국대학 출신 서울대 교수들은 북으로 가 김일성 대학 창설의 주역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각자 분야에서 "독보적 존재"였고 또 학생들로부터 "수재”로 알려진 교수들이다."

김기석, <해방 후 분단국가 교육체제형성 1945-1948>, '서울대학교 사대논총' 53, 1996

3.3. 국립서울대학교의 탄생

우여곡절 끝에 1946년 8월 22일부로 미군정 법령 제102호 국립서울대학교설립에관한법령이 제정•공포되어 그때까지 효력을 유지하고 있던 일본 제국제국대학령을 폐지•대체하여 국립서울대학교가 설립되었다. 일본에서 이 작업은 좀 더 시간을 두고 실시되어 1947년 9월 30일 국립종합대학령으로 개정을 거쳐 1949년 5월 31일 국립학교설치법으로 대체되었으며 그 내용은 제국대학관립대학에 근교의 관공립 구제전문학교를 통폐합시키는 고등교육기관의 일원화 및 미국식 학제로의 개편으로, 국대안의 내용과 유사했다.

1946년 8월 22일 설립 당시의 단과대학과 학과는 다음과 같다.

단, 예과는 경성대학 예과 재학생이 모두 졸업하는 1947년까지만 한시적으로 존속하였다. 예과생들은 원하는 전공으로 본과에 진학할 수 있었고, 대부분의 학생이 문리과대학, 의과대학, 공과대학을 선택하였다.
서울대학교 예과를 폐지 (경향신문, 1948.05.25)
국립대학교의 예과 제도는 금년 예과 졸업생 870명을 최후로 폐지하게 되었다는데, 동 예과는 일제시대에 창립된 후 20년 간 존속되어 왔었으며, 국립대학제 실시로 말미암아 없어지게 되었는데 금년 졸업생들의 취학 희망은 다음과 같다.
-문리대 지망 195-정치과 71-영문과 22-불문과 21-철학과 21-사회과 19-상대 16명-법대 18명-예대 1명-농대 4명-공대 291명-의대 131명 (이상 21일 현재)

마지막으로 1950년 사립 서울약학대학이 관으로 이관되어 서울대학교에 편입됨으로써 서울대학교로의 통합과정이 마무리되었다. 이후의 학과 변천과정은 서울대학교/학부 항목을 참고할 것.

4. 개교기념일

서울대학교의 공식 개교기념일10월 15일이다. 그러나 개교일과 개교기념일은 항상 일치하지는 않으며[23], 서울대학교의 실제 개교일과 '10월 15일'이라는 날짜의 근거에 대해서 의문점과 논란이 존재한다.

서울대의 전신 학교 중 가장 오래된 한성사범학교는 1895년 5월 1일, 법관양성소는 같은 해 음력 4월 12일(양력 5월 6일) 개교했지만 서울대 측의 공식 입장은 통합 국립서울대학교가 출범한 1946년을 개교 원년으로 삼고 1895년은 개학(開學) 연도로 보고 있다.

1946년 8월 22일 미 군정법령 제102호로 '국립서울대학교설립에관한법령'이 공포됨과 동시에 시행되었다. 이에 따라 1946년 9월 18일 8개 단과대학이 개학하고, 10월 10일 상과대학, 10월 14일 의과대학이 개교식을 가졌다.

그런데 정작 10월 15일이 어떻게 개교기념일로 정해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현재 남은 가장 오래된 기록은 1952년 10월 15일에 제6회 개교기념식을 가진다는 대학신문 기사(1952년 10월 13일자) 뿐이다.[24] 또 1953년 10월 15일에 개교 7주년 기념식을 가진다는 기사도 있다.# 6.25 전쟁 때 각종 교무행정 자료가 소실되어 더 이상 확인되지 않는다. 참고자료1 2

정리하면, 기존 학교들을 통합해 출범한 서울대학교의 특성상 단과대학 별로 개교일이 다르며 개교기념일이 정해진 근거는 자료 유실로 알 수 없다.

5. 국립서울대학교 → 서울대학교

국립서울대학교로 출범한 이후 '국립'을 교명에서 떼고 서울대학교로 개칭하였다.

개칭 시점에 대해서는 약간의 혼동이 존재한다. 일부 자료에 1948년에 개칭했다는 서술이 있으나, 1948년 8월 '국립서울대학교 학칙', 1949년 '국립서울대학교대학원 학칙'이 제정된 점, 1949년 7월 15일 졸업증서 등 공식기록을 참조하면 1949년까지 국립서울대학교가 정식 명칭이었음이 확인된다.
교육법 (1949년 12월 31일 시행)
제83조 국가가 설립경영하는 학교는 국립학교, 특별시, 도, 시 또는 교육구가 설립경영하는 학교는 공립학교(市立學校, 道立學校 또는 區立學校라고도 함) 법인 또는 사인이 설립경영하는 학교는 사립학교라 한다.
국립, 공립, 사립의 별은 학교명에 관할 수 없다.

'서울대학교 40년사'와 '서울대학교 50년사'의 연표에서 1949년 12월 31일 "교육법의 공포로 본교는 '서울대학교'라 개칭됨"이라고 서술되어 있어 공식적인 개칭 시점은 해당 법령이 시행된 1949년 12월 31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개칭 후에도 1950년 5월 12일자 졸업증서나 신입생 모집 공고에 국립서울대학교'로 쓰이는 등 한동안은 두 가지 명칭이 혼용되기도 했다. 1953년 4월 20일 시행 '국립학교 설치령'에서는 교명 '서울대학교'가 명시되었다.

6. 관악캠퍼스 이전

1971년 관악캠퍼스 조성이 시작되어 1975년 완료되었다. 서울대학교/캠퍼스 참고.

7. 법인화 이후

경쟁력 강화를 위해 법인화를 추진했다. 추진과정에서 여러 반대에 부딪혔으며, 논란 및 사건사고도 여럿 있었다. 2011년 법인화되어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가 되었으며, 2021년에는 법인화 10년을 맞았다. #

8. 관련 문헌



[1] 경성경제전문학교, 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법학전문학교,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경성광산전문학교, 경성사범학교, 경성공업전문학교, 경성여자사범학교, 수원농림전문학교[2] 일단 대학 차원에서는 광혜원의 적통을 주장하는 연세대학교와의 대립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아래 경성의전 참고.[3] 그렇지 않은 사범학교는 이후의 교육대학으로 발전하게 된다.[4] 센다이의전 → 도호쿠제국대학, 후쿠오카의전 → 규슈제국대학, 오사카의과대학 → 오사카제국대학, 아이치의전 → 나고야제국대학[5] 구제대학 소속이지만 구제전문학교에 상당하는 과정[6] 교직원에 대한 테러 등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흠좀무[7] 일단 연세대학교는 학교의 역사를 제중원 설립일인 1885년으로 보고 있다.[8] 타쿠쇼쿠대학의 전신[9] 이공학부 설립 후, 평양에 대동공업전문학교가 설립되었다.[10] 경성농업학교의 후신이자, 지금의 서울시립대의 전신이다.[11] 음악대학과 음악원이라는 두 단어를 붙였다.[12] .해방 전후 崔虎鎭의 학문세계와 학술활동 참조[13] 이 시기 경성대학을 지칭하는 표현이 다양하다. 일제강점기에는 보통 줄여부를 때 성대(城大)로 통용되었다. 왜냐하면 당시 일본에서 더 먼저 생긴 교토제국대학의 줄임말이 경대(京大:'都帝國學)였기 때문에 중복을 피해서 경성의 '성(城)' 자로 줄인 것이다. 그러나 해방 후 남의 나라가 된 일본의 교토대학을 의식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경성대학의 공식 명칭은 서울대학이 되었고, 약칭은 경대(京大)가 되었다. 1946년의 기사들을 보면 동일한 대학을 두고 경성대학, 서울대학, 경대, 성대 등의 여러 표기가 난립하고 있다.[14] '대학교'라는 말이 학교의 공식명칭이 된 한국의 첫 사례이다. 국대안 이전의 한국은 고등교육기관의 이름으로 '대학'을 썼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을 제외한 다른 한자문화권 역시 대개 '대학교'가 아닌 '대학'을 사용한다.[15] 경성대학을 가리킨다[16] 좌파 계열 학자들의 시각[17] 국대안에 관여한 교육학자 오천석의 시각[18] '동맹 휴학'을 의미한다.[19] 인터뷰 시리즈가 '김종필 회고록'으로 엮여 출판된 이후에는 해당 기사가 온라인에서 삭제되었다.[20] Gregory Henderson. 한국명 한대선. 미군정, 이승만 정권, 박정희 군사정부 시대에 두번에 걸쳐서 7년간 주한미국대사 정치특보로 활동했다. 독재던 군사정권이던 친미반공 노선이면 상관없다는 미국 정부의 방침과는 다르게 한국에 민주주의 체제를 심을려고 노력했던 인물로 첫번째 근무 때는 국회 프락치 사건이 고문조작임을 밝혀내면서 이승만 정권과 불편한 관계가 되었고,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두번째 근무때는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의 군사정부와 정면충돌했고 결국 리영희 합동통신 기자한테 군정 연장에 관한 양국 간의 협상 내용을 흘려준게 문제가 돼서 본국에 소환되었고, 그길로 외교관 커리어가 끝나버렸다.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계속 군부독재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정약용과 실학 사상에 대한 연구서적을 출판하는 등 미국에서 한국학 연구를 개척한 인물로도 손꼽힌다.[21] 그레고리 헨더슨은 박정희, 김종필을 비롯한 쿠데타 세력의 상당수가 좌익 경력이 있다면서 이들이 미국의 통제를 벗어나서 멋대로 북한과 통일협상을 진행할지도 모른다면서 극도로 우려했다. 이 시기에 헨더슨이 본국으로 보낸 보고서는 쿠데타 세력의 좌익 경력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함께 반미 성향에 대한 우려로 가득차 있다. 1963년 헨더슨 보고서 일부.[22] 부속기관으로 부속병원과 부속간호학교가 존재, 예과는 문리대 소속[23] 예컨대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광혜원 설립일은 1885년 4월 10일이나 개교기념일은 '5월 둘째주 토요일'로 정하고 있고, 고려대학교의 전신 보성전문학교는 1905년 4월 3일 개교했으나 개교기념일은 5월 5일이다.[24] 서울대학교 학보인 대학신문은 1952년 2월 4일 창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