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대별 역사
1.1. 원삼국시대
마한의 54개국 중 불미국(不彌國)이었다고 추정된다.1.2. 삼국시대
자세한 부분은 침미다례 참조. 사실 침미다례의 원래 주도 세력은 해남 군곡리 세력이었다가 근초고왕 시기에는 해남 신월리, 영암 시종면 양대 세력으로 바뀐 상황이었는데, 해남 신월리가 격렬하게 저항하다가 타멸당하고 영암 시종면은 굴복했었다. 하지만 백제는 영암 시종면을 믿을 수가 없었는지 나주 반남면 세력을 지원하기 시작한다. #바로 이 시점부터 나주가 영암과 해남을 제끼고 번영하기 시작한다. 현 반남면에는 그 규모와 숫자로 따지면 경주의 왕릉들과 맞먹는 대형 고분군이 있는데, 그 전에도 어느 정도 세력은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영암 시종면 세력의 분가 격이었다. 그러다 백제가 영암 시종면 세력을 믿을 수 없어 불미국을 키워주기로 마음 먹었고, 불미국 세력이 옛 본가였던 영암을 제치고 부쩍부쩍 커지기 시작한 건 이 때부터였다.[1]
이후 6세기 중반에 백제의 직접 지배 지역으로 개편되면서 불미국이 있던 지역은 발라군(發羅郡)이 되었다. 백제 멸망 후에는 당나라에서 웅진도독부를 설치하며 대방주(帶方州)가 된다.
1.3. 남북국시대
통일신라가 웅진도독부를 몰아낸 후 전국을 9주로 편제하고 발라군을 발라주(發羅州)로 승격시켜 오늘날의 전남지방을 관할하는 치소로 삼았으나 발라주는 9년 만에 다시 발라군으로 강등되고 무진군(武珍郡, 현 광주광역시)을 무진주(武珍州)로 승격시켜 무진주 중심의 지방편제로 개편하고 현 나주시 반남면 지역은 반남군(潘南郡)으로 승격시켰다. 이와 함께 신라 지방 기병 군단인 10정 가운데 미다부리정을 현 나주시 남평읍 지역인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에 설치하여 무진주 관내의 치안을 유지하고 토착세력을 통제하게 한다. 686년(신라 신문왕 6년) 통의군(通義郡)으로 개칭되었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년) 금성군(錦城郡) 혹은 금산군(錦山郡)으로 개칭된다.[2]1.4. 후삼국시대
901년부터 후백제 영역이었으나, 903년(태봉 궁예 3년/후백제 견훤 12년/신라 효공왕 7년) 궁예는 왕건을 파견해 나주 공방전을 펼쳐 금성군을 후백제에게서 빼앗아 나주(羅州)라 개칭한다. 그 후 전주가 후백제의 도읍으로서 견훤의 세력권이었던 것처럼 나주는 왕건의 주요 거점이 된다. 하지만 후백제는 이 일대를 빼앗으려고 집요한 노력을 기울였고, 907년에는 나주 전체를 잠깐 석권하기도 했었으나 908년에는 도로 왕건에게 빼앗겼고, 도리어 역공당해 이 당시 오늘날 광주광역시 서쪽 절반까지 도리어 빼앗기고 말았다.[3]하지만 후백제 또한 그 이후에도 광주와 나주 일대를 집요하게 공략했고, 때문에 오늘날 나주시 남평읍 일대는 내내 후백제 영토였다. 상술한 바 있는 신라 정규 기병 군단 미다부리정은 경덕왕의 군제 개편 당시 명칭이 현웅(玄雄)정으로 개칭되었고 검은 깃발을 부대기로 썼는데, 이 현웅정의 주둔지인 나주시 남평읍 일대가 내내 후백제 판도였음은 특기할 사항이다.[4]
이후 929년에 후백제가 나주 전역을 점령하게 되지만 935년에 고려가 다시 수복하게 되며, 훗날 견훤은 장남인 견신검을 주축으로 한 반란으로 인해 금산사에 유폐됐다가 나주를 통해 고려로 탈출했다.
1.5. 고려
나주는 왕건의 적통을 이어받아 왕위에 오른 혜종의 출생지이기도 하였으므로, 왕실의 어향(御鄕)이라 불리게 된다. 983년(고려 성종 2년) 십이목(十二牧)이 설치될 때 나주에 나주목(羅州牧)이 설치된다. 제2차 여요전쟁 때는 현종의 피난처가 되기도 했다. 1018년(현종 9년), 현종은 자신이 위기일 때 피난처가 되어주었던 나주(羅州)와 전주(全州)의 첫 글자를 따 전라도(全羅道)를 만드는데 이게 지금까지 이어지는 한국 지방행정 역사에서의 도 개념의 시작이다.(광주와 전남ㆍ전북은 2018년에 전라도 정도(定道) 1000년 행사를 공동으로 열었다.) 다른 도들은 300여 년이 지난 후에 생긴다. 이렇게 5도 양계 제도가 실시되면서 전라도 나주목이 되었으며, 전주목과 함께 도의 이름에 들어갈 정도로 큰 도시였다.[5] 현종은 국가 행사인 팔관회를 개경, 서경, 나주 이렇게 3곳에서 개최하도록 하였다. 같은 시기 다시면 지역에 있었던 회진현이 나주목에 병합되었다.이외에도 고려시대에 일어난 백제부흥운동이었던 이연년 형제의 난이 김경손에 의해 나주에서 진압되기도 했다.
1.6. 조선
조선 시대에도 나주목이었으며, 전라도에서 전주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 당시만 해도 이웃 광주는 나주보다 작은 도시였다.[6] 동학농민운동 당시 동학군이 점령하지 못한 도시가 나주였다. 그 정도로 양반의 세가 강했던 곳이었으며, 자연히 전라도 남부 행정의 중심지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895년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23부제로 개편할 시 나주부가 있었을 만큼 전남 지역에서는 가장 큰 도시였다. 고려-조선 때 이렇게 나주가 번성했던 이유들 중 하나는 그 지리적 입지 때문이었다. 곡창 지대인 전라도 내에서도 특히 손꼽히는 농업 생산력을 자랑하는 나주평야의 중심지였고, 여기에 서남해안의 해운 및 영산강 수운을 동시에 장악할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런 지리적 이점 때문에 나주는 전남의 중심지 역할을 할 수 있던 것.[7]그러나 동학농민운동 이후 갑오개혁의 연장선인 을미개혁이 시작되었고 1895년 단발령, 23부제가 순서대로 시행되었다. 양반의 세가 강했던 동네였던 만큼 단발령에 반발하여 의병들이 봉기하면서 나주군수가 죽는 일이 발생하였고 나주부 관찰사였던 윤웅렬[8]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광주로 처소를 옮겼다. 곧 윤웅렬은 나주의병들을 진압하였지만 광주에 이미 강력한 방어진을 형성해 놓았기에 진압 후에도 나주로 돌아가지 않고 조정에 상주해 광주에 처소를 두는 것을 허락받았다. 그 후 갑오개혁이 실패로 돌아가고 23부제가 13도제로 바뀌는 1896년, 전라도를 남북으로 나눌 때 자연스럽게 전라남도청을 나주부 관찰사의 처소였던 광주에 두면서 나주의 쇠퇴가 시작된다. 결과적으로 관찰부/도청 이전 후 광주가 빠른 속도로 나주의 세력을 흡수하면서 급성장하는 동안 나주는 큰 발전을 하지 못했다.
1.7. 일제강점기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남평군 및 함평군 동부가 나주군에 편입되었으며, 동시에 영암군으로 일부 면[9]이 이관되었다. 1929년에 구 나주역에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촉발했다. 또한 나신면이 나주면과 영산면(영산포)에 분할되어 편입되었다. 1931년에 나주면이 나주읍으로 승격되었고, 1937년에 영산면이 영산포읍으로 승격되었다.1.8. 대한민국
광주의 서쪽에 있는 광산군 송정읍이 성장하면서 1949년에는 광산군(현 광산구)에 3개의 면[10]이 또 이관되어 군역이 축소되었다. 1981년에야 나주읍과 영산포읍을 합하여 겨우 금성시(錦城市)로 승격될 수 있었다.[11][12] 이는 전남, 전북을 통틀어 32년만의 시 승격[13]이었다.[14] 읍 승격은 순천시와 동일할 정도로 빠른 편이었으나 시 승격은 그에 비하면 상당히 늦은 편이었다. 그나마 비료공장(현 LG화학 나주공장)이 하나 있어서 지역의 산업 기반이 되었는데, 이게 없었으면 시 승격은 없는 것이 될 수도 있었다.[15] 1986년 금성시는 나주시로 명칭을 변경했으며 1995년 나주군과 통합하며 도농복합시가 되었다. 2014년 광주전남공동혁신도시 입주가 시작되면서 금천면과 산포면에서 빛가람동이 분리되었고, 이후 인구 10만명 선을 회복하였다.2. 인구 추이
인구는 1966년 245,162명까지 증가하였으나[16] 이후 꾸준히 감소하여 2009~2010년에 7만 7~8천명선까지 줄어들었었다. '전라도'라는 명칭 자체가 전주와 나주에서 유래한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17] 전남도 5개 시 중 유일하게 인구가 10만명에 미달하는 도시였으나 혁신도시인 빛가람동의 인구 증가에 힘입어 2016년 4월 22일 이후 인구 10만명이 다시 회복되었지만, 국회의원 선거의 경우 아직 단독으로는 선거구를 구성할 인구가 되지 않아서 화순군과 합쳐 나주시·화순군 선거구를 구성하고 있다.전통적인 도내 주요 도시였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인접 지역에 새로운 대도시가 발전해서 그쪽으로 인구가 유출되어 쇠퇴했다는 점에서 충청남도 공주시와 비슷한 신세다. 공주 또한 인접한 대전이 급성장하였으며 1932년에 도청마저 빼앗겨버려 그대로 쇠퇴했다. 하지만 여전히 공주 시내의 인구는 6만명으로 빛가람동을 제외한 나주 시내 인구의 약 1.7배이다. 비록 철도가 없던 공주와 다르게 나주는 호남선 철도가 지나가긴 했지만 호남선은 2003년의 복선화 이전까지는 단선이었으며, 1960~90년대에는 주로 경부선과 경부고속도로를 중심으로 산업화와 개발을 했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었다.[18]
지금이야 호남선이 복선화가 되었고, KTX도 나주역에 정차하니 2005년 전라남도청 이전 당시에 도청이 이 곳으로 이전했다면 나주는 전통과 접근성을 갖춘 이상적인 도청소재지로 거듭났을 것이다.[19]
한때 3만 8천명 선까지 줄어들었던 동 지역 인구는, 혁신도시 건설로 빛가람동의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 2015년 다시 4만명을 돌파하였고, 2017년 8월에 마침내 6만명을 돌파하게 되었다.[20] 이는 점점 쇠퇴해가는 원도심과 읍면 지역으로부터 빛가람동을 비롯한 외부 지역으로의 인구 유출에 대한 명확한 해결방편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덕분에 빛가람동은 나주시 내 읍면동 중 유일하게 인구 3만명을 일찍이 돌파하여 2023년 12월 기준 총 인구 117,238명 중 39,831명으로 약 33.97%(...)나 되는 후덜덜한 비중을 점유하고 있다.[21] 빛가람동은 전체 면적 약 7.33㎢로 608.4㎢에 달하는 나주 면적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약 1.2%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주시 내에서는 독보적인 인구 밀도를 자랑하는 것. 결국 2019년 즈음부터 혁신도시의 인구가 구도심 지역 6개 동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아지게 되었는데, 2020년대 이후로는 혁신도시 자체 인구 증가는 더뎌졌지만 혁신도시의 영향으로 구도심과 혁신도시 사이의 금천면과 송월동에 주택단지와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양대 도심지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22]
광주전남공동혁신도시 이외에도 남평읍의 강변도시와 송월동의 나주역역세권개발구역 겸 송월지구 개발 등으로 어느 정도 인구 증가 효과를 보았고, 1995년 인구인 10만 7천명을 넘었다.
앞으로 2030년까지 80년 초 인구였던 18만 명에서 20만 명 정도로 증가할 것이라는 예측이 있지만 이건 장및빛 전망일 뿐, 실현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대한민국의 심각한 저출산에 수도권 집중 심화로 인한 지방 인구 감소까지 겹쳐 혁신도시 하나만으로 대규모 인구 증대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미 2018년 이후로 인구 증가세가 둔화된 상태로 인구 12만 달성도 지지부진한 상태가 지속되면서 향후 전망이 썩 좋다고 볼 수는 없다. 물론 인구가 미미하게나마 꾸준히 증가 중이기는 하나, 인구 통계를 보면 혁신도시의 인구 증가가 대부분이고, 그마저도 월 1000명 수준을 넘지 않는 선에서 타 읍면동의 인구 감소를 메꾸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 2020년대 이후로는 빛가람동에 남은 아파트 부지가 개발되지 않고 있어[23] 인구수가 4만명을 넘지 못하고 정체되고 있다. 나머지 지역은 감소를 겪고 있거나 현상 유지중인 것은 뻔할 뻔자.
이러한 옛 영광이 무색하게 현재는 전남 3대 도시(목포, 순천, 여수)보다 한참 밀리고 전남 5개 시 지역 중에서 인구가 꼴찌인 것도 서글프지만 더 문제는 어느정도 도시로서 덩치를 갖춘 이 3대 도시조차도 꾸준히 청년 인구가 수도권으로 유출되고 있고, 머지않아 대한민국 전체 인구 수도 지속적으로 줄 텐데, 나주시는 인구 증가는 고사하고 그냥 10만명만 유지해도 다행이라는 것이다.
3. 쇠퇴의 원인 = 철도와 도로?
일각에서는 나주시 쇠퇴의 주 원인을 철도와 도로의 발달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근대 이전의 모든 국가의 물류는 수운이 주류였고, 산세가 험한 한반도는 더욱더 그랬기 때문에 수운이 번성했을 때는 영산강과 전라도 최대의 내륙 항구 영산포를 끼고 있는 나주도 번성했었다. 물론 이후에도 호남선과 국도 1호선이 나주를 지나게 되었지만, 이제는 경유지 중 하나로 전락해 호남선의 종점인 목포, 호남선과 경전선의 교차점인 광주에 떠밀려 쇠퇴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별로 타당하지 못한 주장이다.물론 목포시의 경우에는 호남선의 종점이자 항구도시라는 점이 발전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끼쳤다. 당장 인천광역시(원인천)와 부산광역시도 각각 경인선과 경부선의 종점이면서 지역을 대표하는 항구가 있어 여객과 화물을 환적하는 허브로 성장했기 때문이다.[24] 하지만 광주의 경우 철도의 교차점이라 부흥했다는 주장에는 허점이 많다. 첫째로 지금이야 광주송정역이 매우 커진 데다가 광주 시가지가 확장되어 어찌어찌 시내로 들어와 있지만, 호남선 개통 당시부터 광산군 및 송정시의 광주 편입 시기까지는 광주 시가지와는 이어지지 않은 별개의 지역에 가까웠던데다가 송정리역도 그다지 큰 역이 아니었다. [25] 오죽하면 광주로의 편입보다 전라남도 송정시로의 승격이 먼저 이루어졌을까? 둘째로 경전선의 광주 시내 구간의 전신인 전남선의 개통 시기는 1922년으로, 광주가 전남 지역의 중심이 된 지 30년 가까이 후의 일이었다. 더구나 전남선은 개통 당시부터 1944년 광주~담양 구간 폐선까지 기껏해야 송정리역에서 광주역을 거쳐 담양을 잇는, 다시 말해 당시 기준으로 오로지 호남선에서 광주만을 이었던 노선임을 감안하면 광주가 호남선과 경전선의 분기점이라 발전했다는 것은 앞뒤가 뒤바뀐 주장이다.[26]
타 지역의 사례를 살펴보자면 전통적으로 지역의 중심도시 내지는 대도시 역할을 하던 곳 중 현재까지도 확고한 지역 중심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충청북도 청주시, 전라북도 전주시 등이 있는데,[27] 이 두 지역의 공통점은 지역에서 처음 생긴 간선 철도인 경부선과 호남선이 빗겨간 도시라는 점이다. 전주시와 청주시를 잇는 전라선과 충북선이 있지만, 두 노선 모두 첫 개통 시점에는 인근의 간선 노선 역[28]에서 해당 지역을 잇기 위해 생겨난 노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더구나 경부선이 1905년에 개통한 것과 달리 청주시를 경유하는 충북선은 1921년에야 개통되었다. 만약 철도의 분기점이 발달한다는 공식이 맞았다면 청주시 대신 연기군(현 세종특별자치시)이, 전주시 대신 익산시가 크게 발달했어야 정상이지만, 그렇게 되지는 못하였다. 즉, 대전광역시같은 극히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29] 우리 역사에서는 철도가 지역의 발전을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발전한 지역에 철도가 끌려 들어가는 것에 가깝다. 반대로 살펴보자면, 청주시와 전주시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일제강점기 이래로 도청이 계속해서 해당 지역에 있다는 점이다. 특히 조선시대 이래 충주시에 있던 충청북도의 중심을 청주시로 옮기고부터 충주시는 쇠퇴하고 청주시가 발달했다는 것은, 도시 쇠퇴 및 발달의 정도는 다르지만 전라남도의 상황과 매우 비슷하다.
결국 광주가 지금과 같이 발전한 데에는 전라남도의 중심이 되기 위해 꼭 필요한 도청이 광주에 들어섰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윤웅렬이 나주부 관찰사이던 시절 처소를 광주로 옮기지 않아 도청이 계속 나주에 있었다면 나주시는 전남 지역의 중심지 지위를 유지했을 것이며, 광주광역시 대신 나주광역시로 전라남도에서 분리되었을 수 있다.[30]
[1] 고려 시대 때 설치된 행정구역인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인데, 백제의 이런 지원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영암이 그 자리에 들어갔을 것이다. 이때 역전된 영암과 나주 사이 구도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2] 나주의 '나(羅)'가 '비단 라' 자여서, 뜻이 같은 '비단 금(錦)' 자와 통한다.[3] 여담이지만 이때 빼앗긴 오늘날 광주광역시 서부는 929년까진 고려가 계속 강하게 고수하고 있었다. 견훤 입장에서는 892년 청년 시절의 본인이 거병했던 지역을 내준 격이니 얼마나 뒤통수가 따끔하고 자존심이 상했을지는 상상이 어렵지 않다.[4] 거사물정이었던 청웅정과 함께, 견훤의 신라 정규군과의 강한 인연이 여기에서도 드러난다.[5] 도호부까지 있었던 전주목과 더불어 고려 내내 목의 지위를 잃은 적 없는 전라도 양대 도시였다.[6] 다만 시골까지는 아니었고 어느 정도 규모 있는 도시였다. 조선시대에 나주목이 잠시 강등되어 전라도가 개명될 때 나주 대신 광주의 이름을 따서 전광도로 불리기도 했다. 광주는 남원과 함께 도내 3등 정도의 위상이었다.[7] 전라도에서 정치, 행정, 문화의 중심지가 전주라면, 교통과 물산의 중심지가 나주라고 할 수 있다.[8] 윤치호의 아버지이자 윤보선 대통령의 큰할아버지이다.[9] 원정면, 금마면, 비음면, 종남면으로 현재의 금정면, 신북면 북부, 시종면 북부지역이다.[10] 현재의 광산구 평동(평동면), 삼도동(삼도면), 본량동(본량면)이다. 광산군청이 송정읍으로 이전하면서 인근 면을 편입하였다.[11] 특이한 것은 당시의 시군명 명명 관행에 따르면 군의 중심 읍이 시로 승격되면 군의 이름을 시의 이름으로 하고 기존 군의 이름은 원래 이름에서 변형하거나 역사적 연원이 있는 이름을 따와 개칭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가령 수원군→수원시+화성군, 강릉군→강릉시+명주군, 청주군→청주시+청원군, 천안군→천안시+천원군, 전주군→전주시+완주군, 순천군→순천시+승주군, 경주군→경주시+월성군, 진주군→진주시+진양군 등), 나주의 경우 이와는 반대로 '나주시+금성군'이 아닌 '금성시+나주군'이 됐다는 것. 이런 곳이 한 곳 더 있었는데, 통영군→충무시+통영군.[12] 사실 나주읍도 영산포읍도 승격 당시 인구 5만을 넘지 못해 엄밀히 말하면 시로 승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승격 직전 1980년의 인구를 보면 나주읍 31,203명, 영산포읍 26,227명이었다. 그런데 현재 도농복합시 승격 기준(인구 2만 명 이상 읍이 2개 있으며 두 읍 인구 합이 5만 명 이상 + 군 전체 인구 15만 명 이상)에는 또 들어맞는다. 어쩌면 나주시의 선례를 따라서 도농복합시 승격 기준을 정했던 걸지도 모른다.[13] 여수, 순천이 부로 승격된 게 1949년이었다.[14] 전라북도의 정주시(현 정읍시)와 남원시도 이 날 시로 승격되었다. 이쪽은 1947년 이리시(현 익산시) 승격 이후 34년만이다.[15] 나주읍은 인구 폭락을 면하고, 역대 인구조사 기록을 보면 오히려 인구가 늘어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반대로 포구라는 이유로 발전했던 영산포읍은 포구 기능 상실 이후 인구가 감소하였다. 1966년에 3만여 명이었던 영산포(읍)의 인구는 현재 8천 7백여 명이다. 당시 나주읍은 영산포읍보다 조금 적은 2만 9천여 명이었는데 이전에는 격차가 더 컸다. 50년이 흐른 지금은 구 나주읍과 영산포읍의 인구를 모두 합해야 겨우 3만명이다.[16] 이는 무려 당시 전주시(농촌지역인 완주군 제외)보다도 2만 5천명 더 많은 수치였다(!).만약, 이대로 인구가 증가했다면 선거구도 나주시 갑과 나주시 을로 나뉘었을 거다.[17] 경상북도의 상주시 또한 비슷한 상황이다. 10만선에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상황이였으나 10만명대가 붕괴되었다. 동 지역 인구도 5만명 정도다.[18] 이러한 수도권과 경부축 중심의 불균형한 국토 개발과 이에 따른 부작용은 공주시가 땅은 넓어도 그 넓은 땅이 거의 산과 언덕이라 개발할 만한 평지는 많지 않은데도 시내 인구를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는데, 나주시는 평지가 많고 큰 강이 흐르고 바다와 항구도 멀지 않은데다가 철도까지 통해 현대적인 산업도시로 개발하기 적당한 위치에 있는데도 공주시보다 인구 감소가 심각하다는 데에서 극명히 드러난다.[19] 그러나 만약 나주로 도청이 이전되었다면 균형발전이라는 도청 이전의 취지가 무색하게 될 뻔했다. 나주에서 광주까지는 적어도 30분 정도가 소요되는데 30분 거리로 도청이 이전된다고 해서 관련 기관이나 상권, 주민들이 이주 할 이유가 만무하게 되고, 결과적으로는 괜히 도청 건물만 새로 만들게 되는 수준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애초에 도청 이전은 전라남도의 균형발전이라는 지향점이 있었고, 광양-여수-순천 중심의 동부는 일정수준 이상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던 반면, 서부권인 목포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은 전남 내부에서도 상대적으로 낙후된 지역이었기에 도청은 자연스럽게 전남 서부에 자리잡게 되었다.[20] 다만 빛가람동을 제외한 기존 시내 인구만 보면 3만명 선으로 오히려 2015년에 비해서 더 감소했고, 지금도 계속해서 감소 중이다. 2023년 현재 구도심 인구 3만명이 붕괴되었다. 시에서도 구도심의 주거, 인프라의 개선 의지가 크지 않아 침체가 가속되고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주거, 교육, 교통 인프라 확충에 미흡했던 점이 크다. 이 때문에 광주의 베드타운 역할조차 못 하고 전근대 도시 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도심은 농촌 읍내 수준에서 수십 년간 정체돼 있다. 잡음이 많기는 해도 혁신도시가 어떻게든 굴러가고 있는 것이 신기할 따름. 나주시에서도 이를 아는지, 혁신도시 조성 이후로 인구를 어떻게든 끌어모으려 시의 모든 역량을 빛가람동에 쏟아붓고 있다.[21] 빛가람동의 인구 증가가 2020년대 들어서 매우 더뎌졌음에도 이 비율은 점점 높아지고만 있다.[22] 조금씩이지만 신축 아파트와 주택이 계속해서 들어서면서 광주 시내의 구축 주택에 거주하던 일부 시민들이 나주의 새 건물로 이주하는 데 기여를 하고 있는 듯하다. 화순, 장성과 함께 광주의 인구를 조금씩 빨아들이며 광주 인구 140만 붕괴에 기여하고 있다.. 광주전남을 제외한 타 지역에서의 이주는 혁신도시 내 기관의 신규 취직자를 제외하면 미미한 편.[23] 한국에너지공과대학교 옆 옛 부영CC 부지를 포함한 총 4개 블록이 현재 아무것도 없거나 몇 년째 공사한다고 말만 하고 있는데, 해당 부지는 모두 부영건설 소유이다. 아무것도 안 지을 거면 다른 건설사에라도 팔아라 또 근처의 금천면에 꽤 대단지인 코오롱아파트가 들어서고, 나주역 바로 옆에도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라 빛가람동의 인구 증가 신화도 서서히 그 빛을 잃고 있다.[24] 오히려 목포시는 서해와 남해에 접해 섬이 많고 수심이 얕은 지역적 특성과 예나 지금이나 개발에서 소외된 전라도의 최서남단이라는 점 때문에 크게 발전하지 못한 것에 가깝다.[25] 영산포역이 폐역되기 전의 호황이던 때엔 송정리역보다도 이용객이 많았다고 한다. 영산포읍과 주변 교통 수요만으로도 송정리역보다 많은 이용객이 있었던 것이다.[26] 도청 소재지가 나주에 계속 있었다면 철도와 도로 교통 모두 나주를 중심으로 하도록 계획했을 것이다. 서울과 목포(또는 제주)를 잇는 간선에 중심지가 자리하고 있고, 전남만 한정해서 보더라도 서쪽으로 치우치긴 했지만 북쪽으로 치우친 광주보다 한 가운데에 있는 나주가 교통의 중심지로서 더 좋은 위치였다.[27] 강원도 춘천시는 강원도에서 원주시에 이은 제 2의 도시라 입지가 조금 애매하며, 경상북도 안동시는 예로부터 이어져 온 지역의 수부도시인 대구가 광역시로 독립하고 나서도 조금 지난 21세기에 들어서야 경상북도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는 도시이고, 이마저도 북부 지역에 한정되어 있어 불완전하다.[28] 조치원역 및 이리역(현 익산역)[29] 그 대전광역시마저도 발전에 철도 분기점이 큰 역할을 한 것은 맞지만 충남도청의 이전이 뒤따르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발전할 수 있었을지 장담할 수 없다.[30] 이렇게 됐다면 구한말까지도 나주만큼 큰 도시도 아니었고, 별다른 수운 시설도 없어 교통도 불편하던 광주는 지금의 나주보다도 더 쇠퇴한 도시가 되어 최악의 경우 시 승격조차 못 해 광주군이나 광산군으로 남았을 것이다. 물론 역사에 만약이란 없으니, 무엇을 어떻게 하든 근시일 내에는 현재 뒤바뀐 나주와 광주의 격차를 좁힐 수는 없다.